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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1.11.24 10:17

나도 꽃 "이름이 불리워지기를 바라는 상처입은 꽃들"

차봉선과 서재희라는 상처입은 이름들을 보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어쩌면 주인공 차봉선(이지아 분)은 특정되지 않는 공간 속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인지란 주체로서의 자신에게서 비롯된 행위다. 내가 있기에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내가 없다. 과연 무엇으로 보고 무엇으로 듣고 무엇으로 느끼고 무엇으로 생각하는가?

어려서 부모로부터 버림받았다는 기억은 그녀의 자존에 크나큰 상처를 주었을 것이다. 부모가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나는 부모에게 필요없는 존재였다. 인간이 자신에 대해 자각하는 것은 무언가에 필요한 존재로서다. 자신의 가치다. 그런데 그것이 없다.

차봉선의 지나칠 정도로 경우 없어 보이는 행동들은 아마도 그러한 영향일 것이다. 보이지 않으면 어쩌는가? 찔러본다. 들리지 않으면 어쩌는가? 들릴 때까지 더 세게 찔러본다. 느껴지지 않으니 자신의 살갗을 긁어보고. 생각나지 않으면 머리를 두들겨 보고.

한 마디로 관심받고 싶은 것이다. 관심을 받고 싶은데 확신이 없어 서툴다. 서재희(유시윤 분)이 차봉선에게 관심을 갖는 이유다. 유시윤은 다른 이유로 다른 사람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어 한다. 자신을 지우려. 마치 자기 자신을 혐오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차봉선이 서재희에게 끌리는 이유일 것이다. 서재희는 자신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마치 그녀가 그러하듯 그녀를 계속 자극한다. 돌아봐 달라. 나를 인정해 달라. 누군가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모호하게 실체가 없는 자신에게 형체를 부여하고자 하는 것과 같다.

쉽게 상처주고 쉽게 상처입고, 어리광일 것이다. 그들은 서로에게 어리광을 부린다. 어리광을 부림으로써 서로로부터 자신을 확인한다. 거울과 같다. 모호한 가운데 오로지 서로에 대해서만 자신의 존재가 확실해진다. 그것은 구원이기도 하다.

과연 현대인 가운데 크고작은 상처 하나쯤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보다 거대화되고 고도화되는 사회에서 사람은 어디선가는 반드시 상처를 주고 상처를 입으며 그렇게 살아가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그 상처를 어찌할 것인가? 외면할 것인가? 아니면 싸울 것인가? 그도 아니면 아예 긍정하고 그것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일 것인가?

차봉선은 그래도 열심히 싸우려 하고 있었다. 서재희는 열심히 도망치려 하고 있었다. 둘 다 결국은 같다. 자신의 상처를 정면으로 보려 하지 않는 것. 그대신 서로가 거울이 되어 열심히 서로의 모습을 비춰본다. 결국 거울이 되어 주던 서로의 모습이 깨어짐으로써만이 두 사람 다 자기의 일부를 온전히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려 할 수 있게 될까?

제아무리 차봉선이 김달(서효림 분)을 구박하고 괴롭혀도 정작 어머니 김도미(김지수 분)가 돌아보지 않으면 그것도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아버지가 화를 내고, 어머니가 상처를 입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김도미와 김달의 존재는 차봉선에게 천적이나 다름없다. 어떻게 해도 뻔뻔할 정도로 그들은 상처를 입지 않는다. 그나마 밥상을 뒤엎는 아버지의 반응은 위로가 된다.

박화영(한고은 분)은 서재희에게 그를 옭아매는 족쇄다. 과거의 기억이 사라지지 않는 한 서재희는 결코 박화영을 정면에서 마주볼 수 없다. 박화영의 비극이기도 하다. 박화영은 남편이 죽었지만, 서재희는 그 남편을 죽였다. 죽은 것은 잊고 용서할 수 있지만, 죽인 것은 자기 자신이 자신을 용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에는 서재희도 너무 순진한 것일까?

상처입은 사람들. 제대로 치유되지 않은 상처가 덧나 흉하게 일그러져 보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꽃이란 아마도 사람. 아마도 존재. 김춘수의 시에서 꽃은 이름을 가진 존재였다. 이름을 불려지기 위한 것이다. 누구나 이름이 불려지기를 바란다. 아니었을까? 가련하다는 생각이 든다.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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