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1.11.24 08:49

뿌리깊은 나무 "강채윤의 굴복, 세종에게 죽은 아비의 이름을 바치다!"

세종에게도 태종의 피가 흐르고 있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카리스마란 다른 말로 의지다. 의존이다. 맡겨버리는 것이다.

도적이 쳐들어왔다. 가족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맞서싸워야 한다. 그런데 그 앞에 누구보다 뛰어난 전사가 한 사람 있다. 혹은 탁월한 전략가였을 것이다. 그가 말한다.

"나를 따르라!"

그것은 본능일 것이다. 과연 그에게 도적을 무찌를 힘이 있다. 그의 뒤를 따른다면 그는 자신과 자신의 가족과 재산을 지켜줄 것이다. 기꺼이 명령에 복종한다. 선물을 바치고 그를 위한 특별한 자리를 마련한다. 자신의 모든 운명을, 자신의 자유와 권리와 의무와 책임, 그 모든 것을 그에게 맡긴 채 스스로 자유롭고자 한다. 권력이란 그러한 다수의 보다 편하고자 하는 욕구로부터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욕구를 투사한 것이 카리스마인 것이다.

당연한 것이다. 비만 오면 넘치는 하천에 둑을 쌓기 위해서라도 그것을 지휘할 누군가가 필요하다. 숲을 일구고, 늪을 개간하고, 사냥을 나서 짐승을 잡고, 단 두 사람만 있어도 누군가 일을 주도할 사람이 필요하다. 보다 지혜롭고, 보다 강건하고, 보다 책임감이 강한 누군가다. 따로따로 각자의 일을 하기보다 뛰어난 한 사람이 지휘하여 모두가 일괄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쪽이 보다 효과적이고 결과도 좋다. 아무리 권력에 반발하며 부정하려 해도 끝내 권력에 의지하고 마는 이유다.

그것은 마치 천 것이라며 강채윤을 경멸하면서도 끝내 강채윤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광평대군(서준영 분)의 처지와도 닮아 있다. 제아무리 강채윤을 신분을 이유로 무시하고 멸시하려 해도 그러나 밀본이 뒤를 쫓는 상황에서는 어떻게든 강채윤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평소 백정이라고 천하게 여기다가도 결국 고기를 먹으려 하면 백정의 손을 빌어야 하는 것과 같다. 어째서 화장실을 치울 일이 있으면 직접 하지 않고 청소부를 굳이 불러 그에게 의뢰하는가?

다만 그럼에도 어떤 것은 흔하고 어떤 것은 희귀하다. 어떤 것은 특정한 몇몇에게만 영향을 주고 어떤 것은 더 많은 다수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보다 드물게 희귀하고, 더구나 더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바라고, 지극히 상식적인 것이다. 희귀한 것은 특별한 것이고, 보다 많은 다수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그들의 의지가 그 한 개인, 혹은 집단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다수의 의지가 그러한 한 개인, 혹은 집단에 투사됨으로써 권위라는 것이 나타나고, 권력이라는 구체적인 힘을 가지게 된다. 바로 그렇게 할 수 있는 힘. 그러한 믿음. 카리스마란 그런 점에서 신뢰라 할 수 있다. 그를 믿고 따른다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

역사를 왕조사, 혹은 영웅주의적인 시각으로 보는 것도 위험하지만, 그렇다고 오로지 왕조와 영웅을 배제한 민중의 시각으로 보는 것도 위험하다고 하는 이유다. 과연 세종이 아니고서도 한글은 창제되었겠는가? 이순신이 아니었어도 임진왜란 당시 조선은 일본을 물리칠 수 있었을 것인가? 아인슈타이니 있었기에 상대성이론도 있다. 칸트의 철학은 칸트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세계인구 60억이 모여도 그 단 한 사람이 하는 것만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그럼에도 그러한 한 개인이 뿌린 씨앗에 살을 붙이고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은 다수의 사회다. 어느 한 가지만으로 역사를 보려 할 때 그래서 분명 함정에 빠지게 된다. 민중을 맹신하거나, 영웅에 매몰되거나.

강채윤(장혁 분)의 딜레마다. 강채윤은 조선의 하잘 것 없는 민초를 상징한다. 노비 출신이고, 그로 인해 어려서 불행한 일을 겪었다. 함길도에서는 국가의 도구가 되어 외적과 싸우는 수라장까지 겪었다. 어쩔 수 없이 체화할 수밖에 없다. 자신이 그 더럽고 험한 길을 가는 동안 그의 뒤에서 편하게 안전한 길을 골라 따라오는 이들이 있음을. 그들은 기꺼이 자신들의 안락을 위해 그를 수렁으로 나락으로 밀어 떨어뜨릴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또한 느낀다. 지금 가는 그 더럽고 험한 길마저 그들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어떤 길을 가느냐는 뒤에서 지시를 내리는 그들에 달려 있을 수 있다. 자칫 잘못된 지시를 내리면 모두가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이지만, 제대로 된 명령을 내릴 수 있으면 보다 수월하게 길을 갈 수 있다. 어디로 어떻게 갈 것인가를 일일이 생각하고 고민하기엔 당장의 앞에 놓인 길이 너무나도 험하고 거칠어 그들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자신이 있다.

그렇기 때문이다. 어째서 강채윤은 그에게 백성의 삶을 이야기하는가? 백성의 처지를 이야기하려 하는가? 그리고 자기 아비의 죽음에 대해 그 책임을 물으려 하는가? 자신의 한과 원망을 왜 그에게 쏟아부으려 하는가? 과연 세종이 왕이 아니었어도 강채윤은 그렇게 집요하게 세종을 죽이려 했을까? 강채윤이 세종을 죽이려는 다짐 안에도 왕에게 들려주고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이 작용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니라면 아마 아버지를 죽인 원한은 갖더라도 그에게 책임을 묻고 증오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세종은 왕이었고 강채윤은 그의 백성이었다. 백성이 왕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그러라는 왕이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었다. 일일이 글자 한 자 한 자에 뜻을 담아 외워 그것을 쓸 수 있어야만 하는 것으로 여겼는데, 고작 스물여덟자 자모만 익히면 모든 소리를 글로써 써낼 수 있다고 한다. 그렇게 죽을 고생을 하고 천 여 자를 외웠음에도 여전히 모르는 글자가 더 많은데, 단지 반나절 외우는 것만으로도 자모를 모두 익히고 그것을 소리나는대로 쓸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세종은 초인이었다. 누구도 생각지 못한 것을 해내는 파천황의 초인. 굴복하고 만다. 그는 왕이다.

강채윤이 끝내 원한을 접고, 자신의 아버지의 이름을 세종에게 맡긴 이유였다. 강채윤 스스로 그리 이야기한 바 있었다.

"대의를 위해 일하시는 분들, 이런 작은 일따위 눈 하나 깜짝 않고, 우리 아버지 같은 사람 죽으면 영광으로 생각하라, 그리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자기 목숨 아니니까요. 자기 가족 목숨이 아니니까요."

한 사람을 죽이면 살인자지만 만 사람을 죽이면 영웅이 된다. 한 사람의 죽음은 단지 피해자에 불과하지만 만 사람이 죽고 나면 그들은 대의를 위한 희생자가 된다. 그렇게 죽어나가는 것이 힘없는 백성들이다. 아무것도 없는 민초들이다.

그것이 싫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그토록 악을 쓰고, 목숨을 걸어가며 세종에게 대들었던 것이었다. 거부하기 위해서. 부정하기 위해서. 그러나 세종이 왕이고 그가 왕으로서 이루려 하는 대의에 동의하게 되었을 때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백성이 되고 민초가 되어 있었다. 왕을 위해, 왕이 이루려는 대의의 초석이 되고 싶다.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조차 세종에게 기억하도록 함으로써 그가 있음으로써 세종이 있을 수 있음을 확인하고 싶다.

그 또한 하나의 자존이다. 존엄이다. 다만 타인에 의지한 자존이고 존엄이다. 그래서 투사다. 그것이 카리스마다. 그럴 수 있는 것. 결국은 전혀 반대편에 있던 강채윤마저 세종이 이루어낸 전대미문의 업적에 이끌리고 만다. 이끌리며 왕의 백성으로, 대의를 위한 초석이기를 자처하고 만다. 마치 처음 인간사회에서 권력이 나타나던 그 순간처럼. 그렇게 최초의 왕은 나타났던 것이고, 최초의 왕 앞에 사람들은 신하임을, 백성임을 자처했던 것이었을까?

정기준(윤제문 분)의 말처럼 세종이 위험한 이유다. 필자 스스로도 느끼고 있다. 저와 같은 왕이 있다면. 저와 같은 왕이 있다면 기꺼이 자신을 굽히고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긴 채 그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고 싶다. 어쩌면 민주주의의 가장 큰 적은 세종과 같은 인자하고 지혜롭고 현명한 임금의 존재가 아닐까? 민주주의마저 부정하고 그를 위해 백성이 되고 신하가 되고 싶다.

아무튼 역시 그렇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은 아바마마(세종)께 성군이라 하지. 헌데 아느냐? 아바마마께도 태종대왕의 피가 흐르고 있다!"

왕이란 개인이되 개인이 아니다. 개인이면서 국가이다. 전부다. 왕이 죽으면 나라가 망한다. 왕이 잘못되면 백성이 피해를 입는다. 왕이 잘못된 판단을 함으로써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피가 흐를 수 있다. 그러한 의지가 집약된 것이 왕이다. 왕이란 바로 그러한 의지의 벼린 칼날 위를 걷는 위태로운 존재다. 세상에 가장 고귀한 것이 왕이지만 그런 만큼 가장 비천하게 죽을 수 있는 것도 왕이다. 왕의 권력이란 바로 그러라고 있는 것이다.

왕이 왕으로서의 역할을 다 하지 못할 때 그는 왕이 아니게 된다. 왕이 아니면 단지 필부에 불과하다. 필부에 불과한 이가 고귀한 자리에 앉아 있으니 어찌 문제가 없을 수 있을까? 그래서 왕이란 항상 강박 속에 살아간다. 그러한 강박이 왕을 왕으로 만들기도 한다. 한 순간도 쉬지 못하고 백성을 위해 노심초사하며 지옥을 살아가야 했던 세종처럼.

"왕이 편한데 태평성대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래서 항상 왕들은 무언가를 하려 한다. 제아무리 무능한 왕이라도 왕인 이상에는 왕으로서 무언가를 하기 위해 항상 고민한다. 그가 왕인 이유다. 그 앞에는 가족도 친지도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도 없다. 태종의 피가 흘러서가 아니라 태종이 왕인 때문이다. 부모를 죽이고, 형제를 죽이고, 자식을 죽이고, 끝끝내는 자기 자신마저 죽여가며 왕의 길을 걸어간다. 왕이 아무도 죽이려 하지 않을 때 왕은 더 이상 왕이 아니게 된다. 왕을 위해 모든 것을 건다. 자신의 첫백성이던 강채윤에게 자신이 만든 한글을 굳이 보이고 인정받으려는 이유다. 그것이 세종에게는 자기 아들의 목숨보다도, 그 어떤 무엇보다도 더 소중하다.

다만 항상 모든 왕들이 세종과 같은가면, 하기는 측천무후도 측천문자를 만들어 널리 유포시키고 있었다. 파스파문자나 거란문자나 여진문자 하나같이 그러한 왕으로서의 과시욕의 산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권력이 그들 문자를 만들고 다시 그들 문자를 사용하도록 강제했다. 수양제는 통제거를 만들었고, 진시황은 만리장성을 쌓았으며, 영락제는 수도 없이 북방으로의 원정을 감행하며 찬탈의 오명을 씻으려 했었다. 왕이기 위해서였다. 왕이기 위해서 자신의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인 비정한 영조처럼. 그런 점에서 차라리 평생을 목공일만 하다가 죽은 명의 천계제야 말로 인간으로서 가장 성공한 군주가 아니었을까? 왕은 아니었지만 행복한 개인이었다.

아무나 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왕이란 자리가 아니다. 더구나 일찌감치 국가라고 하는 체계가 잡혀 버린 동아시아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단순히 왕위에 오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왕으로서 살아가야 한다. 왕으로서 숨쉬고, 왕으로서 밥을 먹고, 왕으로서 잠을 자며, 왕으로서 배설한다. 그 모든 행위가 왕으로부터 비롯되었을 때 그는 왕이 된다. 태종이 왕인 이유이고 세종이 왕인 이유다. 광평대군이 왕의 자식인 이유다. 소이(신세경 분)와 무휼(조진웅 분)과 성삼문(현우 분), 박팽년(김기범 분), 이제는 강채윤까지 그러한 왕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것도 그러한 때문인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이도를 버리고 스스로 왕으로서 세종이 된다. 왕에게 따라서 가장 슬프고 고통스러운 것은 친인이나 자기 자신이 죽는 것이 아니라 왕이 왕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타협이란 없다. 설사 아들 광평대군의 목숨이 걸려 있어도 양보란 있을 수 없다. 그것을 정기준도 안다. 정기준 자신도 왕이라는 것에 대해 조금은 엿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광평대군도 안다. 모르는 것은 왕이 아닌 이들. 왕이 될 수 없는 이들이다. 인정에 이끌려 아들의 목숨을 살리려 왕권에 도전하려는 이들을 용납하고 마는 인간들이다. 밀본이 실패하는 이유였다. 또한 왕이 되고자 했으나 왕이 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의 이유였다. 왕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왕 자체다. 자신이 아니다.

가장 흥미로웠다. 강채윤이 세종을 받아들이기까지. 사실 한글이라는 것이 글자 그 자체만으로 그다지 드라마에서 말하는 것처럼 쓸모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사회에서 말하는 문맹률의 허상이다. 단순히 읽고 쓸 줄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단어의 뜻을, 그리고 문장의 맥을, 그리고 문장과 문장 사이의 행간을. 교육이 필요하다.

어째서 그 쉬운 한글이 있었음에도 한국사회에서는 그토록 문맹률이 높았는가? 모든 국민이 읽고 쓸 줄 아는 글이라는 자체가 이미 환상이다. 설사 읽고 쓸 줄은 알더라도 제대로 이해하고 사용할 수 있는가? 그렇게 될 수 있기까지는 그로부터도 수백년이 넘게 걸렸다. 아니 지금도 한글만으로 모든 이치와 진리를 이해하는 것은 무리다. 한자를 배워야 하고, 영어를 배워야 하고 일본어를 배워야 한다. 한글의 완성은 바로 그러한 번역사업이 아니었을까? 번역이 동반되지 않는 한글이란 단지 소리를 적는 기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그것만도 어디인가?

거부하고 부정한다. 반발한다. 도전한다. 그러나 결국 그 권위에 굴복하고 만다. 권위란 업적이다. 능력이고 실적이다. 무엇보다 카리스마다. 도저히 세종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그는 왕의 백성이 되어 자신의 죽은 아비의 이름을 왕에게 바친다. 상당히 상징적이었을까?

필자가 <뿌리깊은 나무>를 좋아하는 이유다. 왕조사적이지만 민중사적이다. 민중사적이지만 왕조사적이다. 그 이면을 모두 관조한다. 누구보다 뛰어난 왕 세종과 누구보다 불손한 민초 강채윤을 통해. 역사를 관통하는 탁월한 직관이고 놀라운 이해일 터다. 멋지다. 항상 감탄한다.

모바일에서 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