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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1.11.22 09:37

천일의 약속 "이서연의 울음, 다른 여자들 사는 것처럼 그래보고 싶다."

현명하면서도 강한 어머니 강수정을 보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그동안 달라질 게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어? 그 아이의 하루는 건강한 사람의 하루와 달라. 시간낭비하지 마. 너 하려는 일이 벌써 상식밖인데 지금이나 2, 3개월 뒤나 뭐가 달라?"

뜻밖에 박지형(김래원 분)의 어머니 강수정(김해숙 분)에게 이입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 어머니도 저러셨을까? 아니 필자의 어머니도 그리 마음에 안 들어 반대하시다가도 끝끝내 자식을 이길 수 없어 마음을 돌려야 했을 때 분명 저리 하셨을 것이다.

현명하다고 하는 것은 지혜롭다는 것과는 또 다른 의미일 것이다. 유식하다거나 영리하다거나 계산이 빠르다거나 하는 것과도 전혀 다르다. 그것을 달리 덕이라 부른다. 사람을 포용하는 것이다. 나와 남의 구분 없이 모두를 마치 자기 일처럼 품어 생각한다. 옳고 그름을 가리거나, 이익이 되고 손해가 되는 것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가.

아무래도 어머니들은 뱃속에서 길러 낳다 보니. 열 달을 어머니 뱃속에서 자라 아이는 태어나게 된다. 그 일체감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같은 부모의 마음이더라도 어머니의 마음이 남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래서 불교에서도 자비라 할 때 자(慈)를 두고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라 해석하기도 한다. 어머니가 자식을 생각하듯 모든 중생을 기쁘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 곧 자이며, 또한 모든 중생을 애닲아 하는 마음이 비(悲)인 것이다. 어머니의 마음은 그렇게 크고 깊다.

그렇게 안 된다고 말했다. 그렇게 절대 안 된다고 반대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말한다. 만일 이서연(수애 분)이 자기 딸이었다면 박지형이 그러하듯 어느 집 자식이 자기 딸 맡아준다 하면 얼마나 고마울까 그런 생각도 해 보았노라고. 마냥 아들이라고 박지형의 입장에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아들이기에 박지형의 행복을 우선하고 있을 뿐 어머니로서 다른 누군가 어머니의 딸이기도 할 이서연을 마냥 무시하고 배제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분노로, 그 다음에는 실망으로, 절망으로, 그리고는 체념으로, 마지막에는 그토록 아들이 결혼하기를 소망하는 이서연의 입장에서 생각한다. 오히려 박지형보다 앞서 이서연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말한다. 아들이 사랑하는 여자이니 이서연의 행복이 또한 아들 박지형의 행복이다. 기왕에 아무리 반대해도 결국 함께 살게 될 것, 될 수 있으면 행복하게 사는 쪽이 모두에게도 좋다. 그것이 어머니의 마음이다. 자비이며 현명함이다.

항상 강수정의 대사를 듣고 있으면 그래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어머니 속썩인 일도 생각나고, 그럼에도 아들의 뜻을 꺾지 않으신 그 마음도 생각나고, 그리고 그 이면에 담긴 어떤 '현명함'을 생각하게 된다. 많이 배워서가 아니라, 남다르게 머리가 뛰어나서가 아니라, 그동안의 삶에서 우러나는 인간의 깊이다. 침착하고 사려깊고 다정하다. 그녀의 다정함은 아들을 위해서라면 남편 박창주(임채무 분)와도 맞설 수 있는 다정함이다. 아들이 결혼하려고 하는 이서연의 병을 알면서도 아들의 행복을 위해 이서연의 병을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그런 강한 다정함이다.

아무래도 불초한 자식이다 보니. 세상에 부모에게 죄인 아닌 자식이 있을까? 어머니 앞에 고개를 뻣뻣이 치켜들 수 있는 자식이란 아마도 매우 드물 것이다. 하기는 자식의 일을 자기 일처럼 어린아이처럼 딸 노향기(정유미 분) 앞에서 심술을 부리는 오현아(이미숙 분)도 어머니일 것이다. 그녀는 오로지 자기 딸만을 위하려 드는, 딸을 너무나 사랑하기에 다른 것은 용납하려 들지 않는 지도그런 에고의 모성이다. 그녀는 마치 천진한 아이같다.

이서연의 생모(김부선 분) 역시 그래서 상당히 흥미로운 인물일 것이다. 자기 자신의 행복을 위해 자식조차 돌아보지 않는다. 물어 무엇하느냐고. 보아서 무엇하느냐고. 남자라고 하는 울타리 없이 살아가지 못하는 여성이 지금도 많다. 오로지 남자에 의지해 살아갈 수밖에 없는 피동적인 존재로써 여성 자신을 배우고 훈련받아 온 경우가 적지 않은 탓이다. 모성보다는 여성이 우선한다. 여성보다는 인간을, 인간보다는 생물로서의 본능을 우선하고 만다. 이서연 생모의 자식들에 대한 태도는 그런 점에서 체념에 더 가깝다. 어쩔 수 없다.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다.

그래서 흥미롭다. 과연 이서연의 생모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것인가? 이대로 여전히 이서연과 거리를 둔 채 그렇게 길들여진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인가, 아니면 어머니로서의 자신을 자각하게 될 것인가? 전자더라도 의미가 있고, 후자라면 멜로적인 감동이 한층 배가될 것이다. 이서연의 비극은 상당부분 어머니에게서 비롯된 것이 크므로.

아무튼 박지형이 때를 잘 맞췄다. 한창 공포에 떨고 있을 때였다. 차를 운전하고 가다가 도대체 지금 어디를 가고 있는지, 어떻게 여기까지 온 것인지, 무엇보다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인지, 가장 두려운 상황이다. 전혀 알지 못하는 곳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듯한 상황이다. 그녀는 자신의 병을 알고 있다. 공포와 더불어 절망이 그녀를 사로잡는다. 그녀를 짓누른다.

울부짖는다. 마치 아이처럼 엉엉 소리내어 울기 시작한다.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그녀를 두르고 있던 단단한 자존심의 벽이 공포와 절망 앞에 한 순간에 허물어지고 있다. 죽음에 대한 공포였다. 그보다는 다가올 미래에 대한 절망에서 비롯된 공포였다.

삶이 간절했다. 앞으로의 삶에 대한 보장이 필요했다.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는, 그래서 공포를 느끼지 않아도 되는 평범한 삶이, 행복이 더없이 간절하게 다가왔다. 박지형이 이서연의 병에 대해 듣고서 비로소 이서연에 대한 사랑을 깨달았듯, 더 이상 행복이란 없을 것이라는 절망과 그로 인한 공포가 더욱 평범한 삶의 행복을 갈구하게 만드는 것이다.

"문권아, 나, 아무것도 상관없이 다른 여자들 사는 것처럼 그래보고 싶다? 1년이라도 좋고, 2년이어도 좋고, 3년이면 축복이고..."

그래서 체념 아래 희망이라는 것이 자라기 시작했다. 더 큰 이상이나 자존심 대신 소박한 행복에 대한 바람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다만 일 년, 다만 2년, 혹시라도 3년의 삶이 더 주어지면 좋겠다. 3년의 행복이 더 주어지게 된다면 그 또한 행복일 것이다. 이기적이 되어 간다. 기꺼이 자신의 행복을 위해 박지형을 이용하기로 하다. 박지형을 위해 그를 떠나보내야 한다는 허세따위 더 이상 그녀에게는 남아 있지 않다. 공포와 함께 자라난 삶에 대한 간절함만이 있을 뿐이다.

비로소 박지형의 캐릭터가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한다. 이제부터 시작일 것이다. 그리도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던 만큼 그에게도 고통과 시련이 찾아올 것이다. 그것을 이겨내야 한다. 그가 노향기와 그녀의 가족, 그리고 자신의 가족들에 입힌 상처 만큼 그는 그 댓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속에서 비로소 박지형은 자신이 한 행위에 대한 이해와 용서를 구할 수 있게 된다. 얼마나 그 마음이 진실된가에 박지형의 캐릭터의 성패가 달렸다.

이서연의 병을 듣고서야 비로소 이서연에 대한 마음을 깨달았다. 이서연과 같다. 상실에 대한 공포다. 이서연은 죽음이라는 공포였고, 박지형은 이서연을 영영 잃게 될 것이라는 공포였다. 상실에 대한 공포는 존재에 대한 절실함을 일깨운다. 영영 잃을 수 있다는, 다시는 되돌릴 수 없을 것이라는 공포가 존재에 대한 간절함을 일깨우도록 만든다. 마치 벼랑의 끝에 선 사람처럼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다며 결의와 다짐을 다지게 만든다. 이제껏 주저거리던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더 이상 머뭇거릴 수는 없다.

통계적으로도 그래서 재해나 전쟁과 같은 절박한 상황에 이르게 되면 이성에 대해 마음을 열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던가? 마음보다 먼저 몸을 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아마 그 또한 최악의 상황일수록 더욱 많은 아이를 낳아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기 위한 당연한 본능일 것이다. 사람으로서 당연히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한 본능이기도 하다.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누구나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으며,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 의무가 있다.

과연 이서연은 행복할까? 행복할 것이다. 아니 행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 그녀가 누릴 수 있는 시간은 더 적다. 아마 언젠가는 행복하다는 자체를 느끼지 못하는 순간이 오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행복해야 한다. 행복하지 않은 순간조차도 행복해야만 한다. 그것이 그녀가 태어난 이유이고 그녀가 살아가는 이유다. 살아가는 목적이다.

이서연이 울음을 터뜨릴 때 하마트면 보고 있던 나마저 함께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 절박함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전혀 생소한 장소에 떨어져 있는 자신에 대한 공포가 그대로 느껴지고 있었다. 아마 드라마의 분기였을 것이다. 비로소 박지형이 제 역할을 찾게 된다. 그의 진실된 사랑이 이서연의 절박함을 만나 실체를 가지게 된다. 그녀의 행복한 웃음에서.

매우 디테일하다. 그리고 입체적이다. 마치 일상에서 사람들이 나누는 것과 같은 대화들. 연예인을 안주삼아, 세상일들을 군것질거리삼아, 그렇게 씹고 훝으며 일상을 살아간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말들은 빼곡이 거리를 지나치는 사람들과 같다. 더욱 깊이 이입하게 되는 이유다.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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