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1.11.11 09:32

뿌리깊은 나무 "달밝은 밤 외로운 언덕에서 강채윤, 소이와 재회하다!"

세종의 소이에 대한 감정의 단편을 보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달빛이 서러운 건 시리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달이란 차가운 것으로 여겨졌다. 불개가 해를 물고는 뜨거워 놓치고, 달을 물고는 차가워 놓친다. 그래서 일식이 되고 월식이 되었다. 온기 하나 없이 하얗게 비치는 달빛이 어쩌면 그리도 시려운지. 어느새 눈까지 시려 절로 눈물이 고이고 만다. 서러워서 눈물이 고이는 것일까? 눈물이 고이기에 서러운 것일까?

휘영청 달밝은 밤에 오랜 남녀가 만난다. 오래전 죽은 줄로만 알았던 꼬맹이들이 어느새 훌쩍 어른이 되어 외로운 밤 언덕 위 아름드리 나무를 사이에 두고 비로소 다시 만난다. 달빛과 더불어 서러운 시간이 흐른다. 아프고 괴로웠던 시간들이, 저미고 에이던 그 감정들이, 색색의 저고리가 달빛 아래 그래서 창백하게 바랜다. 그렇게 상처는 덧나고 덧나, 그리움은 쌓이고 쌓여, 달빛 만큼이나 서러운 눈물이 되어 흐른다.

도저히 저런 장면이 나올 수 없는데. 아무리 달빛이 밝아도 저렇게까지 밝을 수는 없다. 아마 눈물이 고인 때문일 것이다. 눈물이 그렁이면 창백한 달빛도 저리 번져 보인다. 눈물에 번져 빛까지 번져 세상은 그리 서럽도록 아름답다. 외로운 언덕과 휘황한 달빛과 아름드리 나무와 그를 사이에 둔 오랜 남녀. 바로 직전까지 얼굴을 보고 이야기도 나누던 사이였다. 서로 생소한 이름 강채윤이라, 소이라 부르며, 아니 이름조차 부르지 못하고 겸사복 위사라, 나인이라 부르며. 그러나 그들이 다시 만나게 된 것은 그들의 기억속에 있는 이름 담이와 똘복이를 부르면서. 그래서 눈물이 고이며 달빛은 저리 휘영청 해보다 더 밝다.

얼마나 애닲았을까? 얼마나 서러웠을까? 자기 때문이라 여겼다. 자기가 글을 몰라서, 글을 모르면서도 괜한 허세로 안다고 거짓말을 한 탓에, 그리고 그리 몰아세우고 사과도 못한 채 떠나보낸 것이 또 한 사람에게는 평생의 한으로 남았다. 잠 못 이루는 날이 벌써 스무해가 넘었다. 자는 것이 고통스러워 억지로 잠을 거부하다 한 순간 쓰러져 죽은 듯, 잔다기보다는 기절하고 깨어나기가 그 긴 시간이었다. 그래서 차라리 체념하고 자기를 탓하며 보내온 시절이었는데. 그래서 포기하고 지나온 시간의 끝에 운명은 그들을 다시금 그 자리에 모이도록 만들었다. 기억에도 새로운 어린 시절 그리도 행복했던 그 시절 그 장소로.

왕에게마저 거짓말을 하고 벽서를 쓴 강채윤(장혁 분)마저 찾지 않는 목멱산 팔각정을 홀로 찾고, 그러고서도 아직 미련이 남아 가지 않겠다 하고서는 송죽정까지 찾아갔다가 곤란한 처지에 놓이고 만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조차 소이(신세경 분)의 눈에 보이는 것은 어린 시절 기억의 한 자락을 차지하고 있는 꺽쇠 뿐이다. 그리고 꺽쇠를 통해 돌복이 살아있음을 알게 된 순간 소이의 마음은 오로지 똘복에게만 향해 있다. "계언산 마의", 말잇기놀이 끝에 똘복이 말한 '주머니'에 대해 '니'로 시작되는 단어를 찾지 못해 패배를 인정해야 했던 기억. 그것은 오로지 똘복과 담이만이 알고 있고 기억하고 있는 그들의 비밀이다. 오로지 그들만이 알고 있다.

"오라버니, 꼭 와야 해!"

똘복이 그녀를 기억하고 있다면. 그녀와 함께 했던 그 시절의 기억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면. 차라리 여전히 그녀를 원망하더라도 반드시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 자기를 기억하고 자기와 함께 했던 시간들을 기억하고, 그래서 찾아와 자신을 탓하고 원망해 준다면 그것으로도 그녀에게는 구원일 것이다. 끝끝내 자신을 탓하고 자기를 원망하며 죽지 못해 견뎌내야 했던 시간들에 비하면 누군가 탓하고 원망해 줄 수 있는 타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더없는 구원인 것이다. 더구나 그토록 오랜동안 그리워하던 님이라면.

고문을 해서라도 "계언산 마의"에 대해 알아내야겠다는 윤평(이수혁 분)이 위협에조차 어디 한 번 해보라며 당당하게 맞받아치던 모습이 강인하기보다 오히려 애처롭게만 여겨지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그녀가 견뎌왔던 시간들을 안다. 살아온 시간들이 아니다. 죽고 싶은 것조차 아니었다. 죽이고 싶었다. 그런데도 살아왔다. 오로지 똘복을 다시 만나겠다는 일념 아래 절벽을 향해 내달릴 때 죽음조차 차라리 편안한 그녀의 아픔을 보았다. 자칫 잘못하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차라리 절벽을 뛰어내려 강으로 몸을 던질 수 있다.

강해서가 아니었다. 그녀가 용감하거나 의지가 강해서 그리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리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서. 도저히 그리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 운명이 그녀의 등을 떠민 것이다. 차라리 그녀가 더 약했다면 그녀의 말처럼 스스로 죽음으로 도피하는 방법도 선택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더 강했다면 그까짓것 지난일로 치부하고 무시해 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더구나 망각이라는 누구나 누리는 행운조차 누리지 못했다. 항상 기억하며 항상 깨달아야 한다. 자신의 죄를. 자신의 상처를. 자신의 슬픔을. 그리고 그리움을.

그래서 그것은 주문이었다. 똘복은 풀 수 있을 것이다. 똘벅이라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기억속 그 장소로 분명 나와줄 것이다.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아니었다면 그녀가 견딜 수 있을까? 아니 그렇기 때문에 힘을 내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그 말을 주문처럼 되뇌인다. 햇볕의 온기로 방향을 느끼고, 몸으로 느껴지는 진동에서 거리를 파악하고, 그리고 직접 걸어 이동하면서 그 거리를 기억하여 위치를 추측하고, 아마 최근 드라마속 탈출 가운데 가장 멋진 탈출이 아니었을까? 기적은 의지의 산물이다. 그녀는 그렇게밖에는 살 수 없다.

세종(한석규 분)의 소이에 대한 마음도 참으로 애처롭다. 비로소 후음을 표기할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 내고서는 자신을 도운 궁녀들과 정인지(박혁권 분), 성삼문(현우 분), 박팽년(김기범 분) 등 측근들 앞에서 자랑하듯 발표하는 가운데서도 세종의 눈은 오로지 소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이가 기뻐하지 않음에 세종 자신조차 새로운 글자에 대한 자부심과 기쁨이 사그라들고, 소이의 이름을 비로소 소리글자로 써서 표기할 수 있음에 과시하듯 직접 써서 보여주다가도 소이의 뜻밖에 시들한 태도에 왕의 표정마저 시들해진다. 소이가 말을 배우기 위해 가리온(윤제문 분)을 찾아가야겠다 거짓말을 했을 때 오히려 말을 배우려는 의지가 생겼다며 기뻐하는 모습이 역설적이었다. 그리 당뇨로 인해 충분한 휴식을 취할 것을 어의로부터 당부받았음에도 소이에게 말을 가르치기 위해 상궁의 재촉조차 무시한다. 과연 단지 훈민정음 창제에 중요한 역할을 한, 단지 과거의 인연이 특별한 상대이기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세종은 나이가 많다. 조선이 건국하고 5년째인 1397년에 태어났으니 훈민정음 창제가 발표되던 극중의 1443년이면 그의 나이 벌써 46살을 지나고 있다. 이미 당시 사람들의 평균수명을 넘겨 살고 있었던데다 당뇨마저 앓고 있어 건강에 대한 자신감은 날이 갈수록 떨어져가고 있었다. 의원에게 몇 년을 더 살 수 있겠느냐 물은 것이 그저 빈말은 아니었던 셈이다. 더구나 소이에게는 오랫동안 가슴에 품어 온 상대가 있다. 세종에게도 깊은 상처가 되었던, 소이로 하여금 말을 잃게 만든 그 사건의 당사자다. 자신의 첫백성이던 똘복에 대한 마음의 짐과 소이에 대한 미안함, 그녀가 말을 잃게 된 원인에 대한 것이기도 하며, 그녀를 사랑하게 된 자체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것도 미안하고 사랑하고 나서도 두렵다.

세종이 강채윤의 정체를 알면서도 그를 살려두는 이유일 것이다. 세종은 강채윤을 연민한다. 그러면서 그에게 어떤 부채의식을 갖는다. 하지만 그보다 소이로 인해 그를 질투하고 있다. 여인으로 인해 질투하면서도 오히려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그를 용납할 수 있다는 것은 한심함일까? 아니면 남자다운 대범함일까? 하지만 세종에게는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으니까. 다른 왕들처럼 임금으로서의 권리를 누리려 할 경우 그는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 그날 그가 아버지 태종과 대립해가며 지키려 했던 그의 가장 소중한 것이었다. 그는 너무 사람이 좋다.

마침내 세종이 강채윤과 소이를 만나려 한다. 강채윤과 소이를 따로 만나려는 것이 아니다. 그가 알고 있는 똘복이와 담이로서 더불어 진실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세종과 강채윤, 소이의 얽히고 섥힌 운명이 비로소 서로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순간일 것이다. 오해와 갈등이 풀어지고 새로운 국면이 만들어진다. 전환점이 될 것이다. 강채윤에게. 소이에게. 세종에게도. 훈민정음 창제가 역사적인 거대서사라면, 세종과 마주한 자리에서 강채윤과 소이가 듣게 될 것은 그들 자신의 역사일 것이다. 행복할 수 있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눈에 선하다. 역시나 드라마이기에 과장되게 밝은 달빛과 하얗게 백열하는 대지에서 서로 마주보지도 못하고 마주치는 두 남녀. 달은 밝고 빛은 창배하고 나무 그림자는 짙다. 애처로운 눈물이 과연 그가 똘복이인가 싶을 정도다. 소이는 놀라 떨리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아직 진정시키지 못한다. 감질나게 운명의 시간은 다가온다. 달빛은 그리 서럽게도 따뜻하게 세상을 적셔 온다. 이슬은 원래 달빛을 타고 땅으로 내려오는 모양이다.

"계언산 마의"라는 벽서를 보고 당장 계언산을 찾아가 답사부터 하라는 강채윤의 말에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가다 멈춰서서는 "계언산을 모른다" 말하던 초탁(김기방 분)의 모습이 참으로 천연덕스러웠다. 그 말을 듣고 그제서야 계언산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는 강채윤의 모습도 귀여웠다. 세종과 무휼(조진웅 분)의 대화는 왕과 신하라기보다는 오랜 친구와도 같다.

강채윤에게는 반가운 만남이지만 정기준에게는 위기다. 정도전의 뜻을 받드는 밀본을 움직이려는 이상 정도전의 유지가 땀긴 밀본지서는 밀본의 정체성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어느새 다른 생각을 품게 된 이신적(안석환 분)과 옛맹약을 지키려는 혜강 때문에라도 밀본지서는 필요하고, 강채윤은 그것을 노리고 있다. 벌써 11회, 시간은 빨리도 흘러간다. 시간이 너무도 더디다. 재미있다.

모바일에서 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