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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1.11.10 09:12

뿌리깊은 나무 "정기준, 세종이 뛰어난 왕이기에 더 위험하다!"

정기준이 집현전을 폐지하려는 이유...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드라마에서도 태평광의 서반 견적희(윤이나 분)이 명황실의 감찰기구인 창위의 첩형으로 나오고 있지만, 바로 이 창위야 말로 명황실의 왕권강화의 산물이자 또한 명이 세계최대의 부와 최강의 군사력을 지니고서도 멸망에 이를 수밖에 었었던 이유 자체라 할 수 있었다.

창위란 원래 동창과 금의위를 말하는 것이었다. 금의위는 홍무 15년 태조 주원장에 의해 자신을 거스르려는 자들을 색출하기 위한 감찰기구로써 출발했다. 그리고 동창은 다시 조카인 건문제를 몰아내고 힘으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영락제에 의해 건문제의 잔당을 쫓고 자신에 반하려는 이들을 찾아내기 위한 목적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 두 조직의 공통점은 하나였다. 아니 창위라 불리우는 자체가 동창의 첩형 이하 관직은 거의 금의위에서 차출된 인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사실상 동창의 우두머리인 제독태감이 금의위까지 감독하는 체제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목적은 하나였다. 만에 하나라도 황제에 거스르려는 불온한 무리들을 감시하고 색출해낸다. 황제의 권위를 강화시키기 위한 목적이었고, 따라서 홍무제는 금의위의 수장으로써 일족인 종친을, 그리고 영락제는 종친조차 믿지 못하여 홍무제의 유명을 어기고 가장 믿을 수 있는 친위세력이던 환관을 동창의 우두머리에 앉혔다.

물론 홍무제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영락제가 처음 동창을 만들고 선덕제가 환관들에 교육을 시키는 동안에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었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였다. 정통제가 즉위했을 때 그에게는 삼양이라는 훌륭한 신하들이 있었지만 그가 가장 신임했던 것은 어렸을 적부터 그를 보필해 왔던 환관 왕진이었다. 황제의 총애를 받는 환관이 황제의 뜻에 따라 관리들을 감시하고 처벌할 수 있는 감찰조직의 수장이 되었다. 그나마 왕진은 공정하지도 청렴하지도 유능하지도 못한 단지 탐욕스러운 무리에 불과했다. 어떻게 되었겠는가?

왕진만이 아니었다. 왕직도 그랬고, 유근도 그랬고, 위충현도 그랬다. 역대 황제들에게 있어 그들을 어렸을 적부터 가장 가까이에서 보필했던 것은 다름아닌 환관이었고, 황제가 즉위한 이후 환관들은 그러한 총애를 등에 업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 권력은 관리들을 감시하고 처벌하는 생사여탈권까지 움켜쥔 권력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환관의 권력은 황제의 주위에 사람의 장벽을 치고 황제가 보고 듣고 말하는 모두를 통제하도록 만들었다. 사실상 황제의 권위를 등에 업은 환관이 명의 국정을 농단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었다.

명이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 명의 조정에 청류가 나타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것이 바로 그래서였다. 방효유가 그의 십족과 더불어 영락제에 의해 몰살당하며 유림이 명황실로부터 등을 돌렸고, 더구나 관직에 나가더라도 환관의 눈치를 보지 않고는 당장의 목숨조차 유지하기 힘들었다. 조선에서처럼 품계가 높다 해서 환관을 무시하다가는 어느날 참혹한 시체가 되어 길거리에 나뒹굴 지 모르는 것이다. 황제의 무능과 환관의 탐욕을 견제하기에는 명의 관리들은 너무나 무력했고, 그 중심에 절대적인 황제의 권위를 뒷받침하던 창위가 있었던 것이었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친위조직이 어떻게 황제마저 우습게 보며 국정을 망칠 수 있는가 보여주는 예일 것이다.

조선 역시 마찬가지였다.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명의 성조 영락제 만큼이나 부족한 정통성으로 인해 보상이라도 하듯 왕권강화에 관심이 많았다. 오가작통법이나 호패제의 시행 역시 그러한 민간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려던 일환이거니와 공신들에 대해서도 항상 의심하고 감시하며 난폭하다 싶을 정도로 함부로 대하고 있었다. 그래도 공신들은 아뭇소리 못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왕으로써 부족한 정통성은 영락제가 환관에 의존하듯 세조로 하여금 공신들에 의존하도록 만들었다. 그들 훈구세력이 세종의 왕권을 옹위하는 친위세력으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세조의 친위세력은 세조가 죽고 아직 어린 예종과 성종이 즉위하는 사이 어느새 왕마저 함부로 할 수 없는 권력으로 성장하고 만다. 연산군마저 강화된 전제적 왕권으로 인해 폐정을 저지르다 쫓겨나고 나자 중종을 옹립한 공신들이 아예 국정을 농단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만다. 그나마 차이라면 세조가 찬탈한 뒤로도, 중종이 즉위한 이후에도 사림이라는 대안세력이 있어 꾸준히 그들을 견제해 왔다는 것이랄까?

흔히 조선의 마지막 개혁군주로 꼽는 정조에 대해서도 그래서 부정적인 평가가 뒤따른다. 그나마 노론과 소론, 남인이 서로 경쟁하던 때에는 서로간의 견제를 통해 균형이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영조와 정조에 의한 탕평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경쟁과 견제에 의한 균형이 무너지면서 결국 세도정치라는 기형적인 체제가 나타나는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실제 세도정치를 처음으로 시작한 장동 김씨의 김조순이 정조가 어린 순조를 보좌하도록 그의 후견인으로써 결혼을 통해 맺어준 외척이었다. 사실상 왕의 친위세력이었어야 했지만 왕이 그를 제어하지 못함으로써 김조순의 장동김씨는 권력화되어 왕마저 내려다 보는 위치에 서게 되었던 것이었다.

사실 조선의 왕들은 철종이 나타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세계사적으로도 드물 정도로 그다지 무능하다거나 난폭한 왕이 드문 편이었다. 그나마 폭군이라 할 만한 연산군조차 중국의 황제들에 비교하면 평균 수준은 된다 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 우리 역사이다 보니 현미경으로 들여다 봐서 그렇지 인격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그렇게 문제가 될 만한 경우는 그다지 없었다. 과연 조선의 왕들이 유독 유전적으로 뛰어나서 그랬던 것일까?

혹시 모른다. 세종이 죽고 문종에서 단종으로, 세조의 찬탈 없이 세종의 체제가 계속 이어졌을 경우 집현전이 어떻게 변질되었을지. 당장 세조가 찬탈하는 과정에서도 집현전은 중요하게 개입하고 있었다. 수양대군 시절 세조가 김종서를 죽이는 것을 지지했고, 신숙주와 정인지는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고 단종을 죽이는 과정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었다. 왕을 보위하라고 집현전의 신숙주에게 세종이나 문종이나 고명을 내린 것이었는데 도리어 단종을 쫓아내고 죽이는 일에 앞장서고 있었던 것이었다. 권력이란 그런 것이다. 단종이 약했으니 그를 죽이는데 앞장섰다면, 이후 왕이 충분히 강하지 못할 경우 집현전은 왕의 눈과 귀를 가리는 조직으로 변질될 수 있다. 왕권이 강하여 왕을 등에 업는다면 누가 집현전을 견제할 수 있겠는가?

전에도 말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부분이다. 신권이 아니다. 왕권과 신권이 대립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대부란 신분이 아닌 자질이다. 사(士)란 선비다. 지식인이며 유지다. 대부(大夫)란 관리다. 물러나서는 선비로써 스스로 학문을 닦고 지역의 백성을 이끌며 조정이 하는 일을 감시하고 견제하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관직에 나가서는 관리로써 왕을 받들어 국정을 책임진다. 선비가 아니면 사대부가 아니다. 그리고 선비란 단지 선비의 자식이라서가 아니라 선비로서의 학문적 도덕적 자격을 갖추어야 선비다. 그런 선비가 관리가 되어 나라를 다스리니 사대부인 것이다. 그것은 왕 이전에 사대부 자신의 자질에 대한 것이다. 그러한 자격을 갖춘 선비들이 세포가 되어 나라를 이끌고 국정을 책임진다. 왕을 받든다. 신하가 아니다. 그 이전에 기본이다.

즉 왕이 보는 사대부와 사대부가 보는 왕의 존재가 서로 달랐다. 왕이 보는 사대부는 왕의 신하였다. 그래서 신권이리 말한다. 그러나 사대부가 보는 왕이란 단지 그들을 대표하는 존재였다. 그러한 입장에서 왕이 왕 같다면 왕으로서 인정하고 섬기겠지만 왕이 왕같지 않다면 맹자의 말처럼 그는 단지 필부로써 어떠한 군신간의 의리도 남아있지 않게 된다. 정기준(윤제문 분)이 왕인 세종(한석규 분)에 대해 무엄하게도 이도라는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이유가 그것이다. 왕으로서 비로소 인정할 수 있을 때만이 세종은 정기준에게 왕이라 불리울 수 있다.

왕의 나라가 아니다. 사대부의 나라다. 조선이라는 나라의 모든 선비들이 나라의 주인이다. 그 선비들이 세운 나라이고, 그 선비들이 이끄는 나라다. 그리고 그러한 나라의 왕으로써 선비들은 이성계를 세웠다. 그리고 그 이성계의 후손들이 대대로 왕위를 이어간다. 그러나 단지 그것은 처음 조선을 세우면서 선비들과 이성계 사이에 이루어진 어떠한 약속에 의해 그리 이어지는 것일 뿐. 그래서 밀본지서의 내용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사대부는 뿌리이고, 왕은 단지 꽃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 결정적으로 태종과 정도전이 부딪히게 된 이유였다. 태종은 이씨의 나라이기를 원했으며, 정도전은 사대부의 나라를 원했다. 재상중심제란 바로 그러한 국정을 책임지고 주도하는 주체로써 사대부의 또다른 대표자를 말하는 것이었다. 왕은 혈연으로 이어지지만 재상은 능력과 명망으로 이어진다. 이를테면 요즘 식으로 말하는 군림하되 지배하지 않은 입헌군주제를 꿈꾸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대부는 조선식 입헌군주제 아래 시민이었다.

역시 오해하는 부분 가운데 하나다. 과연 마그나카르타에 존왕이 서명하던 당시 그 서명을 받은 주체는 누구였을까? 19세기까지 유럽의 의회를 장악하고 있던 것은 누구였는가? 19세기 유럽의 의회민주주의는 누구에 의한 민주주의였을까? 시민이란 도시의 상공인을 뜻하는 것이었다. 마그나카르타는 그 가운데서도 귀족과 대상인들에 의해 주도되어 그들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고, 부르주아의 성장 이후로는 도시의 상공인들이 그러한 특권의 대열에 합류하고 있었다. 합법적으로 부르주아들은 그렇게 노동자와 농민을 착취할 수 있는 기회를 누리고 있었다.

지식인이고 지주로서 사대부가 자신들을 위한 정치를 펼친다. 지극히 옳은 것이다. 그래서 그로부터 소외된 이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그러한 기득권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혁명이다. 정기준이 말한 세종이 오히려 뛰어난 군주이기에 위험하다는 말이 바로 그런 의미이다. 군주가 유능하고 자비로우면 굳이 사대부들도 그 군주와 싸우려 들지 않을 것이다. 연산군같은 폭군에 대해서는 하나가 되어 대항하겠지만, 세종과 같이 뛰어난 군주라면 사대부 역시 복종을 선택할 것이다. 조선의 체제가 무려 600년이나 이어지며 백성들의 적극적인 반발이나 저항이 없었던 것도 그런 점에서 성리학에 의한 도덕적인 지배가 조선의 백성들을 길들인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나라를 이루는 근본으로써 사대부가 그들의, 그들에 의한, 그들을 위한 정치를 한다. 왕의 신하로서가 아니라 사대부 자신으로서. 그것은 과연 왕을 거스르고 백성을 거스르는 것인가?

그러나 왕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이루어지고 있기에. 정기준의 말처럼 하필 왕이 세종이다. 누구보다 뛰어난 군주. 누구보다 백성을 생각했던 왕. 그래서 어쩐지 정기준의 밀본이 주장하는 바는 옳지 못한 듯하다. 오히려 사대부의 작은 이익만을 탐하려는 것 같고 세종이 생각하는 큰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세종은 옳고, 밀본은 그르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옳은가 하는 것이다. 한글창제는 분명 옳은 일이지만, 그러한 독단을 저지하려는 것이 틀린 것인가?

대동법이 처음 건의된 것이 선조 연간이었다. 그것이 전국적으로 실시된 것은 숙종연간이었다. 100여 년의 시간차이가 그 사이에는 있다. 너무 느리다. 비합리적이고 비효율적이다. 그러나 그 100여 년의 시간 동안 조선의 내부에서는 그 이해당사자인 지주들을 포함 많은 논의와 조율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혁명이다. 그러나 희생이 아닌 손해를 감수하도록 설득하는 것은 개혁이다. 느리지만 바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효율만을 생각할 것이라면 독재가 오히려 옳다. 민주주의란 착오와 무고한 희생을 줄이는 것이다.

여진과의 싸움 한 번을 하려 해도 조정이 들끓고. 일본의 침략이 가시화된 상황에서도 과연 어느 수준까지 전쟁준비를 할 것인가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한다. 무리해서라도 전쟁준비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그로 인해 백성들이 겪는 고통은 어찌할 것인가? 한심해 보인다. 어리석어 보인다. 그러나 그런 조정이기에 조선은 수많은 모순들에도 불구하고 600년이라는 시간을 큰 위기 없이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이었다. 오히려 그러한 균형이 무너지고 만 것은 정조로 인해 당파가 사라지고 왕의 친위세력이 국정을 지배하면서부터였다. 벌열이 모든 권력을 독점하면서 사대부가 정치로부터 소외되었다. 조선이 막장을 달리던 시점이다.

상당히 중요한 이야기인데. 매우 심오한 주제일 것이다. 조선이라고 하는 나라에 대해서. 그리고인류의 역사에 있어 정치가 발전되어 온 과정에 대해서. 무엇보다 현실에서 느끼고 깨닫는 정치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도다. 정치란 무엇인가? 권력이란? 그리고 주권이란?

왕이란 전제왕조에서 주권자였다. 사대부는 그것을 부정했다. 단지 왕은 사대부가 위임한 주권을 대신하고 있을 뿐이다. 감시하고 견제한다. 사대부가 바라는 대로 이끈다. 왕은 왕을 위해서, 사대부는 사대부를 위해서. 세종 역시 다르지 않다. 성삼문(현우 분)과 박팽년(김기범 분)이 자신의 뜻을 의심하자 그는 화부터 낸다. 자신을 믿고 따라와주지 않겠는가? 세종의 뜻은 옳지만 그럴 수 없기에 정기준은 집현전부터 철폐하자 말한다. 나라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사대부다.

아쉽다면 사대부에서 백성으로 넘어가지 못한 것이랄까? 동학은 기회였다. 천주교를 통해 받아들인 평등사상은 유교의 전통적인 대동사상을 일깨웠다. 동학은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향반과 잔반, 그리고 농민들을 규합했다. 역사상 가장 중요한 장면일 것이다. 아직은 왕을 믿을 수밖에 없다. 조선 후기와 조선 전기의 차이다. 아직은 사대부 - 아니 양인이 중심이다.

밀본지서를 둘러싼 쟁탈전. 결국 사람은 상징을 믿는다. 직접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실체만을 믿으려 든다. 정기준의 뜻보다 그것이 우선이다. 강채윤(장혁 분)이 그 밀본지서를 가지고 있다. 밀본지서 대신 정기준이 갖고 있는 복주머니는 소이(신세경 분)이 만든 것이다. 엇갈리며 뒤엉킨다. 극단으로 긴장과 갈등은 고조된다.

나흘 뒤. 정기준과 밀본은 밀본지서를 필요로 한다. 세종은 더욱 훈민정음 창제에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가 있다. 물론 안다. 정기준은 실패한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반포한다. 그러나 그 과정은 알지 못한다. 픽션이지만 극중의 사실이다. 집중하게 된다.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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