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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1.11.04 19:51

뿌리깊은 나무 "왕이라고 하는 존재와 의미에 대한 고찰"

성군 세종을 통해 왕의 존재와 의미를 드러내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왕이란 어떤 존재인가? 흔히 생각한다. 백성을 아끼고 위하고 나라를 바로 이끌고. 그러나 그것은 단지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가 갖는 가치다. 가장 백성을 사랑했던 왕 세종(한석규 분)의 가장 위대한 업적 한글창제를 통해 왕이 갖는 그 자격에 대해 이야기한다.

한 마디로 "결심"일 것이다. 그것은 자각이었다. 그는 왜 왕이 되려 하는가? 그는 어떤 왕이 되려 하는가? 끊임없이 되뇌인다. 아버지 태종(백윤식 분)처럼은 되지 않겠다. 태종과는 다른 왕이 되겠다. 태종의 조선과는 다른 조선을 만들겠다. 그가 왕인 이유였다. 왕으로서의 그의 의지다.

태종은 말한다. 그야말로 참혹할 것이라고. 사람의 길이 아닐 것이라고. 그대로였다. 두려워하고 또 두려워하며, 두려워하여 의심하고 또 의심한다. 불안을 안으로 감추고 겉으로는 독기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자신과 싸우는 치열함은 태종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의 조선이었다. 인내하는 조선. 화합하는 조선. 논리와 인의로 다스려지는 조선. 의심하지 않으며 죽이지 않는다. 모두가 함께 공존한다. 그래서 그는 순간 짐승의 모습을 하고 있던 것이었다. 두려움과 싸우며, 불안과 싸우며, 의심과 싸우며. 그런 세종에게 그 의미를 일깨워준 것이 바로 똘복이 강채윤(장혁 분)이었다. 결심이 없다면 자신은 자신이 아니다.

실존인가? 본질인가? 강채윤은 인간 강채윤이기 이전에 아버지 석삼의 아들이기를 선택했다. 아버지와 가까운 사람들의 복수를 위해 자신을 내던지고 그것만을 바라며 살아간다. 어떤 어려움도 고통도 감수해가며 그 한 가지만을 바라보며 오롯이 나아간다. 왕은 그 자체로서 본질이다. 이미 왕으로 즉위하고 난 뒤 누구도 그의 이름 이도를 부르지 않는다.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 그는 단지 왕으로써 세종으로서만 기억될 뿐이다. 그의 왕으로서의 이름이 그가 살았던 시대가 된다. 어떠한 왕으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결심이 그를 왕이게 할 것이다.

결심이 없다면 강채윤은 강채윤이 아니다. 왕으로서의 결심이 서지 않는다면 왕 또한 왕이 아니다. 자기 결심 없이 아버지 태종만을 따른다면 그를 왕이라 할 수 있을까? 세종이 왕인 이유는 아버지 태종과 다른 길을 가기 때문이다. 태종과 다른 길을 가며 다른 왕 다른 조선을 세운다. 그것은 외로운 길이다. 아버지로부터도, 신하들로부터도, 그 누구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하는. 그래서 똘복의 "지랄"이라는 말은 그에게 위로가 된다. 그것은 단지 "지랄"이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 그는 더욱 불안해고 두려워하며 의심하고 자기 안으로 웅크린다.

결심이란 누군가 인정해주어서가 아니다. 누군가 이해를 받고자 결심을 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다. 자기 자신을 납득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을 이해받지 못하면 그 뿐. 그것을 인정하지 않더라도 그것 뿐이다. 만일 그것이 문제가 있다면 그토록 애써 만든 한글이건만 기꺼이 버리겠다. 그러나 그것을 만들기까지의 의지는 오롯이 세종 자신의 것이다. 그래서 한글은 만들어진다. 누군가로부터 이해받거나 인정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신이 납득하기 위해서.

그게 왕이다. 독단. 독선.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의심을 하는 것이 군주라는 조말생(이재용 분)의 말도 틀리지 않다. 그러나 의심하기보다 그 의심을 이겨내고 믿는 것은 힘들지만 세종이 가고자 하는 왕으로서의 길이다. 강채윤으로부터 결심이라는 말을 듣자 이내 강채윤에게 밀본에 대해 알려 조사하게 하고, 성삼문(현우 분)과 박팽년(김기범 분)을 불러 훈민정음에 대해 알려 그것을 평가하도록 한 것은 그래서였다. 그것이 그가 추구하던 왕이었다. 그의 결심이었다. 아버지 태종과 맞서던 그날. 그가 세우기로 결심한 그의 조선이었다. 그는 더 이상 의심이 없다. 의심없이 왕으로서의 한 길을 걷는다.

그것은 사실 태종의 그것과 전혀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태종은 자기 이외의 것들과 싸웠다면, 세종은 자기 자신과 싸웠다는 점일 것이다. 태종은 자기 이외의 주위와 싸우느라 자기를 잃었고, 세종은 자신과 싸우느라 주위를 잊었다. 그것은 이기였다. 지독스러울 정도로 탐욕스러운 독단이며 독선이었다. 과연 조선이라는 나라를 누가 정의하는가? 조선의 왕을 누가 정의하는가? 오로지 왕이다. 오로지 왕만이 그것을 할 수 있다. 태종이 그러했듯 세종도 그러하다. 그것이 "결심"이다. 왕이고자 하는 의지.

그래서 세종은 아버지 태종과 대립했던 것이었다. 사적으로 보자면 말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태종은 그의 아버지였다. 아버지와 대립하며 그를 부정하는 말을 하다니. 그러나 그가 왕인 이상 태종은 더 이상 왕이 아닌 것이다. 조선이 그의 나라인 이상 조선은 더 이상 태종의 나라가 아니다. 그래야 한다. 그것은 왕으로서의 의지다. 결심이다. 다짐이다.

세종이 자기를 죽이려 하는 것을 알면서도 강채윤을 용납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오히려 세종은 그에게 자기 길을 가라 한다. 강채윤은 그의 첫백성이었다. 그가 지키고자 했으나 지키지 못한 이들 가운데 유일하게 그가 구해낸 백성이었다. 그는 세종의 의지를 상징한다. 세종이 처음 했던 결심 그 자체를 의미한다. 그래서 무휼도 이야기한다. 17년 전 그때와 닮아 있다고. 세종은 17년 전 똘복을 만났을 당시로 돌아가 있었다. 자기의 나라와 왕으로서의 자신을 "결심"하던 그 순간으로. 이후 세종의 말과 행동은 거침이 없다. 오히려 여유마저 느껴진다. 왕으로 돌아온 것이다.

왕은 왕이다. 왕은 왕으로서 존재한다. 왕은 왕으로서 행동한다. 그리고 그 위에 나라가 있다. 백성이 있다. 왕의 나라다. 왕의 백성이다. 왕도와 패도는 원래 통한다. 권도는 거짓이다. 왕도든 패도든 모두 하나같이 일관된 것이다. 왕이 곧 나라의 중심이며 나라의 주인이다. 나라의 모든 것의 규준이 된다. 그것이 밖으로 향하면 패도가 된다. 그것이 안으로 향하면 왕도가 된다. 둘 다 끊임없이 투쟁하며 지켜내는 것이다. 끊임없이 싸우며 쟁취해내는 것이다. 왕이란 그래서 가장 탐욕스럽고 가장 이기적이며 가장 독선적이고 독단적인 존재일 것이다. 왕의 도리는 보통 사람의 도리와 다르다. 왕은 오로지 왕으로서만 존재한다.

그것을 보여준다. 단지 백성을 사랑해서가 아니다. 백성을 아끼고 그를 위하려 해서가 아니다. 목적은 그것이 맞다. 그러나 그 동기는 그것이 아니다. 자신의 나라. 왕인 자신의 백성. 그는 절대군주다. 계몽군주이기도 하다. 봉건군주란 단지 봉건적 지배계급의 이야기만 들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절대군주란 백성들로부터도 왕으로 불리는 이일 것이다. 계몽군주란 백성들로부터도 충성을 받는다. 그는 욕심이 크다. 그 욕심이 결과적으로 백성을 위한다. 백성이란 그의 소유이므로. 나라의 모든 것이 자신의 소유다.

전국시대 여러 다이묘들에 의해 갈갈이 찢겨 있던 일본은 오히려 세포단위까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고 있었다. 중앙집권이 일찌감치 완성되었음에도 발전이 지지부진했던 조선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었다. 전국시대 다이묘들에게 자신의 영지는 온전히 자신의 소유였다. 그러나 조선의 지방관들에게 그들의 임지란 잠시 들렀다 가는 곳에 불과했다. 전국시대 다이묘들은 자기를 위해서라도 영지의 개발에 사활을 걸었고, 조선의 지방관들에게 행정이란 크게 문제만 일으키지 않으면 되는 것이었다. 오히려 오너에 의한 경영이 전문경영인에 의한 경영보다 더 길게 더 멀리 보며 일관되며 합리적인 전략을 갖춘 경우를 흔히 보게 되는 것이 그런 이유다. 자기의 나라가 아니니까 함부로 한다. 자기의 백성이 아니니까 굳이 의식하지 않는다.

전제왕조시대의 가치다. 지금과는 다르다. 지금의 민주화된 대한민국에서 국민은 누구의 소유도 아니다. 민주화된 대한민국에서 누군가 국가와 국민이 자기 소유라 한다면 그는 마땅히 끌어내려져야 한다. 그러나 왕조시대와 왕이란 그런 존재였다. 백성을 자기 몸처럼. 자기 소유라는 뜻이다. 나라를 자기 뜻처럼. 그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태종과 세종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세종 역시 그러한 자기와의 싸움을 위해 기꺼이 다른 신하들을 무시한다. 신하들을 무시하며 자기가 키운 측근인 집현전만을 가까이에 둔다. 측근정치다. 다만 그의 인내심이 그에 반대하는 관료들마저 방치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그의 의지다. 그는 가장 합리적이며 이성적인, 그러면서도 가장 강력했던 독재자였다.

어째서 시민혁명은 일어났는가? 그래서다. 왕의 소유다. 전적으로 왕의 것이다. 나라든. 백성이든. 그러므로 왕이 어떤 마음을 먹는가에 따라 그 운명이 결정된다. 왕이 백성인 나 자신을 결정한다. 그에 대한 저항이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귀족과 대지주, 대자본이었으며, 이후 도시상공인인 시민이, 그리고 노동자와 농민이 그 뒤를 이었다. 나의 주인은 나다. 그래서 시민이다.

국민이 아닌 시민인 것이다. 나라로부터도, 권력으로부터도 독립된 존재. 주체. 다만 조선의 경우는 온정적인 지배가 그것을 방해했다. 지금도 말하는 것이다. 백성을 위하는 왕, 백성을 위하려는 정부, 백성을 위한 지배계급. 온정으로써 다스리기를 바란다. 인정으로 베풀기를 바란다.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객체임을. 그렇게 길들인다. 자신들은 백성들을 위한다고. 자연스럽게 그들은 왕과 조정과 지배계급에 신민으로서 귀속된다. 사실 그게 계몽군주다. 아직까지도 그러한 왕을 기대한다는 것은 얼마나 우리 사회가 봉건사회에 가까이 머물러 있는가?

왕은 이기적인 것이다. 권력은 탐욕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세종의 치세가 가능했다. 태종의 치세도 가능했다. 연산군의 폐정이 일어난 것도, 광해군이 임진왜란의 전후복구와 후금의 위협이 당면한 상황에서 궁궐을 다시 짓느라 재정과 인력을 낭비하고 있는 것도, 인조의 잘못된 판단으로 나라가 망할 뻔한 것도. 일본제국주의가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상황에 조선의 개혁보다는 왕으로서 자신의 권력에 더 집중했던 고종으로 인해 조선은 끝내 나라의 문을 닫고 말았다. 개혁군주라 불리우는 정조가 왕권강화를 꾀한 이유가 무엇이던가? 조선을 위해서? 백성을 위해서?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명군도 성군도 인군도 암군도 폭군도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전제왕조의 한계다.

결코 미화해 보여주지 않는다. 이제까지의 세종과는 다르다. 이것이 왕이다. 이것이 실제의 왕이다. 물론 당시 실제 세종이 그리 말하거나 행동하지는 않았을 테지만 세종이라고 하는 절대군주의 본질에 대해 제대로 형상화하여 보여준다. 그것이 멋지다는 것은 세종이라는 왕 자체가 멋지다는 뜻일 것이다. 역사상 이보다 멋진 왕은 보지 못했다.

이미 아직 젊은 세종(송중기 분)이 아버지 태종과 대립하는 장면에서 드라마의 방향은 결정되었다 할 수 있다. 훈민정음의 창제에 대해서도 드라마는 그와 같이 정의하고 있다. 왕의 사람. 왕의 의지. 그리고 왕. 모든 것의 중심이다. 그는 가장 어려운 길을 가는 의지를 갖는 왕이다.

한석규의 연기는 그런 점에서 정말 대단하다. 인자하며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세종의 이면의 왕으로서의 이기와 탐욕을 그대로 보여준다. 광기와 그에 휘둘리며 마침내 그것일 이겨내가는 과정이 한석규라는 배우를 통해 구체화된다. 그가 곧 세종이다. 한석규라는 이름을 다시금 새기게 된다.

이런 드라마는 이제까지 없었다. 왕이라는 존재에 대해 묻는 드라마라니. 철저히 당시의 입장에서, 그러나 지금의 눈으로 왕의 존재를 본다. 밀본은 그를 위한 장치였을 것이다. 왕을 거스르는 존재를 통해 왕의 존재를 드러낸다. 왕이란? 그리고 왕의 존재란? 생각케 한다. 무척 깊다. 상당히 어렵다.

문득 생각한다. 세종이 자기를 죽이려는 강채윤을 오히려 용납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오로지 강채윤만이 그의 이름을 부른다. 이도라 부르며 "지랄"이라 말해준다. 왕이 아닌 개인 이도로 돌아간다. 강채윤은 그의 치부이며 긍지다. 세종이 이도로서 존재할 수 있는 장소다.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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