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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1.10.31 02:41

남자의 자격 "가을의 느즈막이 시인이던 시절의 순수를 떠올리다!"

사실보다는 진실이, 정보보다는 감동이 넘치던 기억을 떠올린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아직 눈은 어둡고 귀는 잘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세상은 감당할 수 없이 넓었다.
모든 것이 놀랍고 신기했다. 감동이 넘쳐났다.
그러나 말은 졸렬해서 그것을 모두 담아내지 못했다.

그것은 발버둥이었다.
어둡게 본 밝은 것을 전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희미하게 들은 큰 소리를 전하기 위한 안타까움이었다.
손짓 발짓에 말짓을 더해 그것을 전하려 했었다.

눈이 떠졌다. 귀가 트였다. 말이 생겨났다.
보았다. 들었다. 그리고 말로써 그것을 전했다.
진실이 지배하던 시절 말은 감동이었다.
사실이 지배하는 지금 말은 단지 수단일 뿐이었다.

그림을 그린다. 사진을 찍는다. 동영상을 본다.
말은 넘쳐나고 사실도 넘쳐난다.
누구도 진실따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실만으로도 세상은 너무도 급하다.

망량은 빛과 그림자 사이를 산다.
어느새 망량이 사라진 빛과 그림자 사이에 테두리가 그어진다.
누군가는 아날로그 TV의 뭉수리한 화면이 그립다 말한다.
HD 화면 너머의 아름다운 배우의 얼굴에는 뽀루지가 보인다.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되는 나이.
그림자의 경계 위에 테두리선은 더욱 짙고 두꺼워진다.
아름다운 배우의 얼굴에서 유난히 도드라진 뽀루지를 당연하게 여기게 되었다.
사실이 지배하는 시절, 시가 죽어가는 시절이다.

아직 눈이 어둡고 귀가 어둡던 시절이었다.
세상은 좁았고 아는 것이라고는 없었다.
그림자와 빛 사이에는 부옇게 망량이 살고 있었다.
시가 머무는 자리였다. 이제는 떠나버린.

가을에는 망량이 돌아온다.
여름의 태양과 겨울의 추위의 경계에서 망량이 다시 돌아온다.
남자들이 시를 읊는다. 부끄러워하며 쑥쓰러워하며.
사실이 지배하는 시절, 그러나 시는 어딘가 떠났어도 어느새 돌아와 있다.

 

문득 방송을 보다가 느껴지는 것이 있어 필자 역시 잠시 끄적여봤다.

아마 누구나 그런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괜히 감상적이 되어서 무언가 끄적여보던 때가. 스스로 써 놓은 글을 보고 감탄하여 하루종일 감격에 빠져 지내기도 했었다. 그 시절 필자는 이백이고 롱펠로우였으며 김춘수였다. 그렇게 여기고 그렇게 믿었다. 그렇게 자신했었다.

그러고 보면 더 이상 시를 쓰지도 읽지도 않게 된 것이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였을 것이다.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말은 풍부해지고, 사진과 동영상은 말이 하지 못하는 것을 대신할 수 있었다. 사실이 진실을 대신하고, 정보가 감동을 대신한다. 더 이상 시는 쓸모가 없었다. 명확한 사실과 그를 표현할 수단만이 존재한다.

세상이 신기했을 때. 모든 것이 놀랍고 감탄스러웠을 때. 그래서 넘치는 감정을 말에 담았었다. 부족한 말로 넘치는 감동을 담아내기 위해 발버둥을 쳤었다. 말은 진화했다. 가지를 뻗고 새끼를 쳤다. 지금은 말이 아니더라도 다른 수단들이 많다. 그래도 기억한다. 무언가를 담아내려 며칠을 고민하며 말을 가다듬던 순간을. 그리고 말들은 기억처럼 그것들을 담아내고 있었다.

김용택 시인이 말한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 시라고 하는 의미일 것이다. 어쩌면 놓치기 쉬운 것들. 어쩌면 흘려 지나가기 쉬운 순간들. 어쩌면 쉽게 잊혀질 그런 감동들이. 아니 그보다는 그런 것들을 흘리거나 놓치지 않는 본연의 감성이었을 것이다. 그것을 말에 담아 영원속에 남기게 된다. 말이 남아 있는 한 그것은 영원으로 남게 된다.

갑자기 감상적이 되었다. 바로 이것이 <남자의 자격>의 매력인 때문이다. 그들은 나다. 어느새 저물어가는 가을이 어울리게 된 나 자신이다. 어느새 시가 멀어지고 시적 표현들이 오그라든다 여겨지게 된 나 자신일 것이다. 가을이라고 모여 시를 쓰고 그것을 읊었을 때 필자 역시 그 자리에서 함께 시를 쓰고 시를 나누고 있었다.

정말 오랜만이지 않은가. 이런 것이 바로 <남자의 자격>이었을 것이다. 잠시 잊고 있던 것들. 잠시 흘려보내고 있던 것들. 영영 잃어버릴 수 있었던 것들을 다시 되돌리는 것. 지금에 와서 시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겠지만, 그러나 그들의 진심이 담긴 시는 분명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었다. 이윤석의 돌아가신 아버지를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어도, 김태원의 아들을 직접 만난 적이 전혀 없었음에도, 그러나 그들의 시를 듣는 순간 사람들은 분명 그들이 떠올리는 기억과 느끼고 있는 감정 그 한 가운데에 함께 있었다.

시의 힘이다. 정보가 아닌 시에 담긴 감동의 힘이다. 사실이 아닌 그 감동이 전하는 진실의 힘일 것이다. 사실이 넘치는 시대, 그러나 결국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진실이다. 진실은 오로지 진심을 통해서만이 전해진다. 말은 인간이 다른 누군가에게 자신이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전하기 위해 수백만년을 가다듬어온 수단이다. 말의 힘이다.

기억을 떠올린다. 참으로 부끄러운 기억이지만, 생일선물이라고 값비싼 노트에 자작시를 빼곡이 채워 전한 적이 있었다. 그 시를 적기 위해 아직 버리지 않고 있던 공책과 연습장, 교과서의 여백을 그리도 찾고 뒤지고 있었다. 그 시절 써 놓은 글들을 보면 아직도 그 시절 필자가 생각하고 느낀 것들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 허세어린 진심이. 설익은 순수가.

그때 필자는 시인이었다. 아니 누구나 한 때는 시인이었을 것이다. 아니 지금도 시를 쓰고자 하면 시인이 된다. 이경규의 '남자의 자격'은 간결하지만 함축된 <남자의 자격>과 멤버들에 대한 애정을 담아내고 있다. 짜장면과 짬뽕, 그리고 집에서 밥을 먹고 온 김국진, 결정적으로 하필 일곱 '놈'. 상스러움이란 아주 싫거나 아주 좋을 때 쓰는 표현일 것이다. 이경규가 얼마나 맏형으로써 프로그램과 멤버들을 사랑하고 있는가.

김국진의 사랑시도 의외였다. 어쩌면 김국진이 아직도 새로운 사랑을 찾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아니겠는가. 사춘기 소년의 그것처럼 너무나 해맑다. 순수하다. 그러나 마흔 일곱이라는 나이는 순수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현실적인 나이다. 어린 시절 일기장을 보는 듯한 순수함이 좋았다. 그런 사랑을 한 적이 있었구나. 그리고 누군가는 아직도 그런 사랑을 꿈꾸고 있구나.

양준혁과 윤형빈의 투박하지만 진정이 느껴지는 표현들도 좋았다. 하기는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스스로 순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전현무가 '이경규'를 낭독할 때 배경음악으로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깔아준 제작진의 센스는 감탄할 만하다. 시 자체의 느낌이 그래서일까? 어쩌면 전현무가 즐겨부르는 노래가 그것인지도 모른다. 사회성은 어떨지 몰라도 그 분위기만은 최고였다.

이윤석과 김태원은 사실 반칙이었다. 이윤석은 전공자다. 김태원은 전문가다. 이윤석은 국문학을 전공했고 전공은 다르지만 현직 교수의 신분이다. 김태원은 무수한 히트곡의 가사를 직접 써낸 작사가이기도 하다. 이들의 시는 클래스가 달랐다. 김태원만이 아니라 사실상 이윤석도 열외로 여겼어야 했을 정도로 그 수준의 차이가 드러났다. 눈물마저 찔끔거리고 있었다. 이윤석의 아버지 이야기에, 그리고 김태원의 이미 알고 있는 아들의 이야기에도.

김용택 시인의 경솔함이었을 것이다. 아마 그다지 크게 악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상식의 영역에 속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 나이가 되었어도 학교에 가지 못하고, 학교에 가게 되었어도 늦거나 해서 학년이 같지 못하고, 아마 그런 점이 <무릎팍도사>에서 김태원이 말한 그의 아내가 상처를 받고 필리핀으로 떠나간 이유일 것이다. 사소한 부분에서 당사자에게 큰 상처가 될 수도 있다. 잠시 멈칫거리며 바로잡는 김태원의 모습에서 전혀 그런 뜻이 아니었음에도 자칫 상처가 될 수 있음을 다시금 확인한다.

시는 아름다웠다. 피곤해 잠든 척 하는 자신과 그런 자신과 대화를 나누고자 묻던 아버지의 틀니 씹는 소리와. 아들을 친구라 부르며 아들의 시선 속에 서성이고 싶다고 하는 소박하지만 간절한 소망들. 이런 시를 일요일 저녁 황금시간대에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사치인가 말이다. 독하고 자극적인 것만이 넘치는 요즘 예능을 통해 시를 보고 들을 수 있다. 그것도 가을에. '뽀그작 빠그작'이라는 의성어 하나에 너무 많은 것을 담아내고 있었다. 아버지의 소리없는 마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다지 기대는 하지 않았었다. '청춘합창단'에서도 사소한 불만들이 쌓아고, 바로 이어진 '야구'편에서도 그다지 만족스런 내용은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회복이었다. 이래서 필자는 <남자의 자격>을 보았다. <남자의 자격>을 본다. 믿음이 돌아왔다.

재미있었다. 의미있었다. 무엇보다 감동과 공감이 있었다. 시집을 한 권 구입해야 할까? 시를 적던 노트를 한 권 다시 장만해야 할 것 같다. 시는 손으로 쓰는 것이다. 사각거리는 볼펜 긁는 소리를 다시 들어보고 싶어졌다. 가을과 남자에 어울리는 에피소드였을 것이다. 지금은 가을이고 필자는 남자다.

아무튼 그래서 다행스럽게 여기는 부분일 것이다. 때로 손발이 오그라든다는 말을 듣는다. 어색하고 민망한 표현들이 여전히 익숙하다. 아직까지는 그래도 감동이 넘치는 때문일 것이다. 감동이 말을 넘치니 그 미숙함이 그렇게 듣고 있기에 낯간지럽다. 아직은 어린 순수가 남아 있다는 뜻일까?

민망한 것은 없다. 솔직한 것만이 있을 뿐이다. 어색함도 오그라듬도 그 순간의 순수일 것이다. 진심이며 진실이다. 그것이 시일 것이다. 너무 오랜만이지만. 그리고 너무 즉석이지만. 즐긴다.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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