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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1.10.26 10:35

천일의 약속 "비극의 정석, 김수현의 힘을 느끼다!"

수애의 연기와 매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수애의 드라마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역시 김수현이다. 비극은 두 가지를 통해 심화된다. 하나는 비극의 적층이고, 다른 하나는 비극의 역설이다. 웃음에 웃음을 더한다고 더 큰 웃음이 되지는 않지만 비극에 비극을 더하면 그것은 운명이 된다. 운명에 비극을 더하면 그것은 절망이다. 역설은 절망을 극대화시킨다.

하필 이서연(수애 분)은 자기애가 강한 성격이다. 어쩔 수 없는 성장환경이 그렇게 만들었다. 그렇게라도 자신을 지키도록. 키가 닿지 않아 포도를 먹지 못하는 여우에게 유일하게 자신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아무렇지 않게 포기하는 것 뿐이다. 섣부른 집착은 자신을 하찮게 만들고 우습게 만들 뿐이다. 여유가 있다면 그럴 수 있겠지만 그녀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다.

그녀가 그토록 쉽게 박지형(김래원 분)을 떠나보낼 수 있었던 이유였다. 우스워지기 싫다. 초라해지기 싫다. 비참해지기 싫다. 그렇게라도 당당한 자신을 지키고 싶다. 어차피 손에 들어올 것이 아님을 알기에 그녀는 일찌감치 떠나보냄을 준비한다.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녀는 도저히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살아왔다.

그런 점에서 알츠하이머란 얼마나 그녀에게 가혹한 운명인가?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사람들을 여럿 보았었다. 과거의 그가 과연 어떤 사람이었던가 나는 알지 못한다. 아니 영원히 알지 못할 것이다. 자기란 없다. 자아란 없다. 기억도 인지도 자각도 없이 그 누구도 아닌 채 그는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어쩌면 차라리 처음 보는 사이이기에 어색함이 덜했는지 모르겠다. 만일 내가 아닌 누군가였다면 누구도 아닌 그가 무척이나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부모였던 이가 자식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 살을 맞대고 살아온 부부가 전혀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다. 이제까지의 모든 기억과 습관은 조금씩 지워져 사라진다. 다행히 아직까지 필자도 주위의 가까운 누군가로부터 그같은 절망을 느껴 본 적이 없다. 그렇더라도 그런 모습을 본다는 자체만으로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사람은 어디로부터 어디로 가는가? 사람이란 기억을 통해 와서 기억과 함께 사라진다. 알츠하이머란 그런 병이다. 인간의 존엄에 관련한 병이다.

어제까지의 내가 내가 아니다. 어제까지의 나에 대해서 나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이후의 나에 대해서 나조차 확신하지 못한다. 내가 나를 기억하지 못하고 내가 나를 통제하지 못할 때. 그러면서 조금씩 나라고 하는 인간이 사라지게 되었을 때. 그것을 과연 이서연과 같은 자존심 강한 사람이 견뎌낼 수 있겠는가? 강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이가 그같은 현실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로부터 버림받고, 겨우 굶어죽을 위기에서 고모로부터 구원받지만, 어려운 처지에 포기하지 못하고 겨우 붙잡은 사랑마저 그녀는 경험으로 놓아주어야 함을 안다. 홀로 힘겨워하고 있을 때 느닷없이 찾아온 질병, 그리고 그것은 그녀의 이제까지의 굳게 지켜온 자기 자신마저 잊어버리게 만든다. 비극은 중첩되고 역설로써 더 큰 충격으로 다가온다. 병을 인정하지 않으려, 어떻게든 그 운명을 이겨내려 애쓰는 모습이 그래서 더 애처롭다.

누군가 그리 표현했을 것이다. <천일의 약속>은 수애의 모노드라마다. 어쩔 수 없다. 모든 비극은 수애 자신에게 집중되고 있으니. 더구나 알츠하이머라고 하는 가혹한 운명은 그녀 혼자서 감당해야 할 부분일 것이다. 누가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점차 기억이 지워지고 자신이 지워져갈 때 그것을 온전히 감당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얼마나 수애가 그 비극을 잘 연기해내는가에 따라 주변 인물들의 비극 역시 결정된다. 그녀는 마지막까지도 무척 당당하고 강인할 것이다.

수애의 짐이 무겁다. 그러나 그 짐의 무게에도 그것을 충분히 감당하고도 남는 힘이 느껴진다. 다만 힘이 너무 넘치면 비극을 해칠 수 있다. 김수현의 대사만으로도 이미 힘은 충분히 넘치기에. 이런 종류의 독백톤의 드라마에서 김수현의 드라마는 빛을 발한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문어적 어휘들은 어쩌면 신춘문예 출신의 대필작가인 수애와 어울리는지 모르겠다. 풍부한 어휘와 다채로운 표현이 단지 말 한 가지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것을 보여줄 수 있는가를 깨닫게 한다.

아직 극의 중심은 수애다. 아직 충분히 비극은 더 깊어지지 못하고 있다. 그녀가 더욱 심연으로 들어가고, 그 심연으로 주위가 함께 빨려들어갈 때, 그리고 그 비극의 바닥에서 다시 희망으로 딛고 올라올 때, 그 바닥에 홀로 남은 그 모습은 비극을 넘어 정화에 이르리라. 그리고 김수현은 그것을 구현해내기에 넘치는 훌륭한 작가다. 다만 그 스타일에 대한 호불호는 있겠다. 고전적이다.

고전적인 것을 좋아한다. 너무 잦으면 그것도 진부해질 수 있겠지만, 그러나 오히려 최근 이와 같은 스타일의 고전적인 멜로가 드물었다는 점에서 그 가치는 더욱 빛을 발한다. 멜로는 어쩌면 배우의 매력을 극대화하여 보여줄 수 있는 장르일 것이다. 비극에 빠진 수애는 애처로우며 아름답고, 그것을 알아가는 주위 인물들의 선량함이 따뜻해져 온다. 톡 쏘는 자극이 없는 편안함이 오랜 그리움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서연의 고모(오미연 분)의 집은 그런 그리움의 한 가운데 있다. 아옹다옹거리면서도 잘 살고 있는 이서연의 사촌 장명희(문정희 분)와 차동철(정준 분) 부부의 모습이 정겹다. 가족이란 따뜻한 것이다.

박지형으로 하여금 이서연을 저버리게 만든 노향기(정유미 분) 역시 전혀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라는 점에서 흥미를 더한다. 귀엽고 사랑스럽다. 누구라도 사랑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캐릭터다. 그런 노향기를 외면하고 이서연만을 바라보는 박지형의 고민은 얼마나 깊을까? 전혀 거침없이 딸인 노향기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그녀의 어머니 오현아(이미숙 분)의 솔직당당함은 끊임없이 박지형을 자극하는 부분이다. 그는 노향기를 사랑해야 하지만 사랑할 수 없다. 사랑하지 않지만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노향기는 충분히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여성이다.

아직까지 이렇다 할 악역이 드러나지 않았다. 흥미를 자아낸다. 악역이 등장한다면 그렇지 않아도 비극의 나락에 빠진 이서연을 더욱 비극으로 내몰게 될 것이다. 악역이 없다면 역설은 이서연이 처한 비극을 더욱 강조하게 될 것이다. 어느 쪽이든 작가의 역량이다. 그리고 역시 그 중심에 있는 것은 이서연을 연기하는 수애다. 그녀의 연기와 그녀의 매력을 기대하게 된다.

기대하게 만드는 드라마일 것이다. 고전이 주는 편안함과 베테랑 작가에게서 느껴지는 치밀함, 그리고 복잡한 인간관계에서 오는 사람의 향기와 점층되는 비극에서 느껴지는 연민. 잘 만든 드라마일 텐데. 가장 흔하게 만들어지는 것이 가장 잘 팔리는 물건이다. 결과가 말해줄 것이다. 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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