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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사회
  • 입력 2011.10.10 21:37

영화 <도가니> "사회적 약자에 대한 성범죄에 대해서는 그 기준이 달라야 한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성범죄에는 친고죄도 공소시효도 성립할 수 없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몇 년 전이었다. 한 여학생이 자기 부모를 경찰에 고발한 적이 있었다. 이유인 즉, 자기가 성폭행을 당했는데 부모가 자기 의사와는 상관없이 합의를 했다. 그러니 자기 의사와 관계없이 이루어진 합의에 대해 무효로 해달라. 이후의 뉴스는 안타깝게도 찾아보지 못했다.

한때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밀양여중생성폭행사건의 경우에도 이미 이혼한 상태였음에도 친권자라는 이유로 아버지가 일방적으로 합의하여 그 돈을 친척들과 나누어쓰고 있었다. 정작 피해자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피해자에게는 어떠한 댓가도 돌아가지 않은 채.

묻고 싶은 것이다. 물론 미성년자이고 따라서 부모는 법적인 보호자다. 그러나 그렇다고 과연 자신의 자존과 존엄과 관련한 일들에 대해서마저 자의적으로 판단할 권리가 주어지는가? 어쩌면 그로 인해 앞으로의 인생이 결정될지도 모르는 중대한 사건에 있어서마저 부모라는 이유로 그에 대한 모든 판단의 권리가 주어지는가?

더구나 합의라는 게 무엇이던가? 밀양의 경우에도 피해자와 그 가족을 중심으로 돈을 노리고 신고했다는 어처구니 없는 합리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다. 과거 필자가 알던 사람 가운데 하나도 집단성폭행과 연루되어 결국 합의로 풀려나고 나자 여자 쪽에서 돈을 노리고 신고했다는 식으로 비난하고 다니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합의란 결국 가해자가 한 행위에 대해, 그리고 피해자가 입은 상처에 대해, 금전적 댓가를 받고 없었던 것으로 해주는 것이다. 자신이 당한 일을 돈을 받고 팔아넘긴다.

물론 성인이라면 자기가 결정할 권리가 있다. 가해자를 경찰에 고발해 재판을 통해 법의 처벌을 받도록 할 것인가. 굳이 재판까지 가지 않고 최소한의 금전적 보상이라도 받으려 할 것인가? 그러나 그것은 성인이기에 스스로 판단하여 그리 결정하는 것이고, 미성년자는 아직 그럴만한 능력이 되지 않는다 사회는 간주하고 있다. 그래서 현행법에서 성범죄를 친고죄로 분류하는 것이다. 가해자에 대한 처벌여부는 전적으로 피해자 개인이 결정한다.

그러나 과연 부모라 해서 피해자의 그러한 권리에 대해서까지 개입하여 전적으로 결정할 권리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딸이 입은 피해와 상처를 돈을 받고 없었던 것으로 무마한다? 아니 그 전에 경찰에 신고할 것인가의 여부조차 부모가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피해자 자신의 입장은? 그 자신이 입은 피해와 상처는? 고통은? 그렇다고 부모가 그 모든 고통마저 대신 겪어주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이번에 영화 <도가니>를 통해 화제가 되었던 인화학원의 성폭행사건만 하더라도 그 가운데 또 상당수가 부모의 합의에 의해 감형되거나 아예 무죄로 풀려난 경우마저 있었을 정도였다. 이 경우도 마찬가지다. 장애인이라면 아무래도 비장애인보다 판단이나 행동에 있어 제약이 많다. 그래서 부모가 법적대리인 역할을 한다. 그렇다고 해서 부모에게 장애인 자식에 대한 모든 권리가 주어지는가? 그들이 겪은 상처와 고통에 대해 그것을 금전으로 바꿀 수 있는 권리가 부모라 해서 당연하게 주어질 수 있는 것인가? 다행히 장애인에 대한 성범죄의 경우 친고죄 조항을 폐지하여 합의여부와는 상관없이 처벌하도록 바꾸려 하고 있다. 그래도 일단 합의를 했다고 하면 피해자의 탄원에 의해 감형사유가 발생하기는 할 테지만 말이다.

바로 그런 부분에 대한 것이다. 장애인과 아동에 대한 성폭력, 나아가 미성년자에 대한 성범죄에 대해서는 친고죄를 폐지하자 주장하는 것은. 친고죄란 결국 합의를 전제한다. 처벌여부에 대해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거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 거래의 당사자가 장애인이거나 미성년자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성범죄의 피해를 입고 고통을 당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피해자 당사자인 것이고, 그것을 부모라 해서 함부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어디까지나 피해자 자신이 입은 피해에 대해서는 당사자가 판단해야 한다.

물론 장애인이거나 미성년자인 피해자가 법적으로 완전한 권리를 행사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다. 온전한 한 개인으로써 적절한 판단을 내릴 수 없다 여기기에 법은 부모로 하여금 그들의 보호자이며 대리인으로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성범죄와 같이 당사자가 직접 피해를 입은 경우는 부모라 해서 그들이 입은 상처와 고통에 대해 개입하여 판단할 권리가 없다. 그렇다면 그 권리는 누구에게 속하는가?

여기에서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 - 아마 이러한 주장에 있어 가장 큰 쟁점이 될 것이다. - 과연 장애인과 미성년자를 보호해야 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하는 것일 게다. 이것은 장애인과 미성년자에 대한 성범죄에 대해 성인에 대한 그것에 비해 더 엄격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일각의 주장과도 통한다. 과연 부모이겠는가? 그렇다면 부모가 없는 장애인과 미성년자는 누가 보호해야 하는가? 부모조차도 사실상 장애인과 미성년자 등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사회적 책임의 일부를 친권자로써 대신하고 있다고 간주할 수 있는 것이다. 장애인과 미성년자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호책임은 사회 자신에 있다. 다시 말해 사회가 보호하는 장애인과 미성년자에 대한 성범죄는 피해자 개인에 대한 범죄가 아닌 그들을 보호할 책임이 있는 사회 전체에 대한 도전 - 즉 반사회적 범죄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성인의 경우는 하나의 독립적 인격으로 간주되기에 그에 대한 범죄는 피해자 개인에 대한 신체와 인격에 대한 침범이며 침해라 간주할 수 있다. 따라서 이것은 전적으로 피해자 개인에 의해 판단되고 결정될 것이다.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에 법적인 문제로써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애인과 미성년자의 경우는 아직 그만한 독립적인 인격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고 전제한다. 아직 스스로를 지킬만한 능력도 스스로에 대해 판단하고 결정할만한 준비도 되어 있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 도움을 주는 것은 그들이 속한 사회 전체일 것이다. 부모가 아니다. 다른 가족이나 친척 등 법적 보호자가 아니다. 그들 자신에 전적으로 속한 것이고, 그들이 그것을 온전히 행사할 수 없을 때 사회가 약자인 그들을 보호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에 대한 범죄가 발생했다. 그것을 단지 법적 보호자라는 이유로 그에 대한 판단을 대신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그에 대한 용서의 여부를 묻고자 한다면 피해자가 온전히 자기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된 다음 그 자신에게 묻는 것이 옳은 것이다. 미성년자의 경우는 성인이 될 때까지 기다리고, 지적장애인의 경우는 온전한 독립적 인격으로써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도록 그 재활과 치료를 가해자 자신이 돕고. 만일 영원히 그럴 수 없는 상태가 된다면 영원히 기다릴 밖에. 아니라면 재판을 통해 자신에게 가해진 법적인 처벌을 받아들이거나. 그것이 정상 아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라도 처벌 역시 피해자 자신이 범죄사실을 인지하고 그에 대한 처벌의지가 발생하는 그 시점까지 기다려주는 배려가 필요할 것이다. 말했듯 사회적 약자란 그같은 인지와 판단, 결정이 일반인과 사뭇 다르기에 사회적 약자인 것이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물론 장애인이나 미성년자에 대해 사회는 미성숙한 인격으로 간주한다. 한 사람의 완성된 인격이 아니라 아직 독립적인 주체로써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가 보호자로써 법적대리인이 된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부모가 자식에 대한 전적인 권리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과 같은 뜻이 되는가? 부모가 아니더라도 법적인 보호자라 해서 전적으로 자신의 피보호자에 대한 권리를 갖게 되는가? 그렇다면 그 보호의 의무는 어디에서 오는가? 보호자로서의 권리라는 것은?

아니 보호자로서의 권리라는 말 자체가 우스운 것이다. 보호는 의무지 권리가 아니다. 그 의무를 질 권리는 존재할지 모르지만, 그 의무에 따른 권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보호자와 피보호자와의 관계다. 그리고 그 보호의 권리란 다름아닌 사회적 약자에 대한 사회적 책임으로부터 비롯된다. 아무리 법적인 보호자라 해도 그 보호의 의무는 전적으로 사회적 보호의 규범에 따르도록 권장하고 강요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자식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다. 피보호자가 보호자의 전유물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부모라 해서 자식이 겪은 상처와 고통을 금전으로 바꾸어 거래할 권리가 주어질 수 있겠는가 말이다. 하물며 그 금전을 자식이 아닌 자신을 위해 쓰려 한다면 그것은 용납될 수 있는가.

설사 친고죄라 할지라도 그 신고의 여부에 대해서는 당연히 피해자 자신이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자신이 겪은 상처와 고통에 대해서 어떻게 판단하고 결정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당사자인 피해자 자신에게 그 권리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누구도 침범할 수 있는 개인의 권리다. 보호자란 단지 개인이 그것을 온전히 행사할 수 없다 판단되었을 때 사회적 의무를 대신해 그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그런데 그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보호의 책임을 보호의 권리라 착각한다면?

생각을 달리 할 필요가 있다. 아이는 부모의 전유물이 아니다. 피보호자란 보호자의 소유물이 아니다. 보호의 권리란 없다. 보호의 의무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의무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사회적 책임으로부터 나온다. 그 책임을 보호자는 단지 대신하여 행사하고 있을 뿐이다. 더구나 무엇보다 개인에 대한 권리는 전적으로 개인 당사자에 속하는 것이다. 보호자이고 법적대리인이라 하여 피보호자에 대해 마음대로 할 수 있고... 아니라는 것이다.

아니 단지 친고죄를 폐지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아직 미숙한 인격이기에 성범죄에 대한 피해사실을 인지하거나 그것에 대해 판단하는데 시간이 걸릴 것을 간주하여 사회적 약자에 대한 범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까지 폐지하는 것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피해당사자가 아직 범죄에 대해 인지하지도 못하고, 그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판단할 수도 없는 상태인데도 단지 사건이 일어난 시점만 생각해서 공소시효를 정한다면 그 또한 온전한 한 사람의 독립적인 인격으로서의 판단이 힘든 사회적 약자에 대한 사회적 보호의 책임을 등한히하는 결과가 될 테니까. 일반의 보편적 사회구성원들에 비해 그런 부분에서 부족하다 여기기에 그들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사회적 의무와 권리에서 조정이 가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사회적 약자다. 그런데 그런 부분에 대해서만 성인과 같이 대우한다면 공평하겠는가?

친고죄의 폐지와 공소시효의 폐지, 친고죄란 결국 피해자가 온전히 자신이 입은 피해에 대해 전적으로 옳게 자신을 위해 판단할 능력이 있다 간주함으로써 성립하는 것이다. 공소시효 역시 그것이 범죄임을 알고 처벌의지를 갖기까지의 일반적인 판단을 전제하여 성립한다. 그러나 사회적 약자는 그것이 온전하게 이루어지지 안기에 사회적 약자인 것이다.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은 말하지만 개인이 스스로를 판단하고 결정하지 못하는 약자들에 대한 사회적 책임이기도 하다.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친고죄 폐지는 옳다. 설사 보호자라 할지라도 단지 그들은 보호자일 뿐 당사자가 아니다. 보호의 의무 역시 약자에 대한 사회적 책임에 대해 단지 그 의무를 대신하고 있을 뿐이다. 법적인 판단을 대신할 권리란 그들에게는 없다. 더불어 공소시효에 대해서도 피해자 자신이 아직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다. 당사자이거나 아니면 주위에 의한 피해사실에 대한 판단이 이루어지고 나서야 그로부터 처벌에 대한 책임이 발생한다. 공소시효는 최소한 피해자가 피해사실을 인지하고 그에 대한 처벌의지를 갖기 시작한 시점에서 계산하는 것이 옳다. 당연한 것이다.

다시 고민할 때가 되었다. 영화 <도가니>를 통해 사회적 약자에 대한 성폭력이 이슈가 되고 있고, 그 결과 정부의 대책마저 나오게 되었다. 그 상당부분은 그동안 사회각계에서 제기되어 오던 문제였다. 그러나 더 보편적인, 일반적 관점에서의 해결노력도 필요하지 않을까?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호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보호자란 피보호자에 대한 권리를 가진 사람들인가? 보호자와 피보호자의 관계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도 역시. 그것은 모두의 책임이기도 한 것이다.

좋은 계기라 생각한다. 영화 한 편이 어쩌면 세상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공지영이라는 소설가가 쓴 소설 한 편에 의해 부조리한 문제들에 대한 해법이 나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주목한다. 아직은 우리 사회는 앞으로 나아가려 함을. 아주 작은 계기로도 세상은 바뀔 수 있다. 부디. 기대하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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