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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1.10.07 16:48

공주의 남자 "운명과 파토스, 행복하고자 하는 사람의 이야기..."

비극과 반전의 헤피엔드에 대해서...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어쩔 수 없다는 말을 그리 많이 쓴다. 다른 말로는 불가항력이라 한다. 감히 거역할 수 없다. 감히 대항할 수 없다. 달리 운명이라고도 한다.

비극이란 바로 여기에서 발생한다. 개인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현실. 그 자신에게 내재된 이유이기도 할 것이며, 보다 거대한 거부할 수 없는 힘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그렇게 인식한다.

"내가 망한 것은 내 용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하늘이 나를 망치려 함이다!"

항우가 회하에서 마지막으로 유방의 군대를 향해 돌격하며 절규하듯 내뱉은 말이다.

오이디푸스의 비극은 그에게 내려진 신탁에 의한 것이었다. 데이아네이라의 비극은 남편 헤라클레스를 너무 사랑했던 탓에 그가 오이칼리아를 멸망시키고 잡아온 포로 이올레를 질투한 것이었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사명에 불탔던 햄릿과 서로 원수지간인 가문으로 인해 죽음으로서난 사랑을 이룰 수 있었던 로미오와 줄리엣, 마녀의 예언에 응한 것은 맥베스의 숨어 있던 야심이었다. 리어왕을 비극적 상황으로 몰고 간 것은 그의 한 순간의 분노와 충동이었다.

파토스. 격정. 차라리 운명에 순응할 수 있었다면. 어쩔 수 없노라며 운명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면. 오이디푸스의 비극 역시 예언으로부터 그를 구하고자 했던 어머니이자 아내 이오카스테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여 그토록 사랑했던 테베의 저주가 되는 비극은 면했을지 모르겠다. 아니 처음부터 아예 예언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않았다면 그는 테베의 궁정에서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평범하게 자라났을 것이다. 운명에 대한 두려움과 자식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마침내 비극이 되어 돌아온다.

아이러니일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가장 용맹하고 지혜로우며 고결한 성품을 지닌 왕이었다. 햄릿은 누구라도 그를 아는 이라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젊은이였을 것이다. 마녀의 예언을 듣고 야심을 일깨우기 전 맥베스는 누구보다도 고결한 성품을 지닌 뛰어난 왕이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이 그저 한 순간 스치고 지나가는 불장난에 불과했다면. 그러나 그들은 목숨을 걸 정도로 서로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그들의 진실됨이 파토스라고 하는 격정의 파도를 타고 거대한 운명과 부딪히게 된다. 그 운명과 맞서 싸워 이긴다면 그들은 영웅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리하여 다시 '어쩔 수 없는' 현실을 깨닫게 된다면 그것은 비극이 된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비극의 법칙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카타르시스라는 것이다. 극중의 격정에 공감하며 그들이 맞이할 운명을 함께 두려워한다. 그들을 동정하고, 그들을 연민하며 그들이 겪어야 할 운명에 함께 절망을 느낀다. 그리고 납득하게 된다. 자기가 놓인 현실을. 그 절망을. 그 좌절을. 그 분노를. 그 원망을.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 하면서도, 그래서 눈물을 흘리며 함께 절규하면서도,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운명이다. 어쩌면 비극이 가져다 주는 낙관이랄까? 어쩔 수 없이 세상은 그렇게 굴러가고 있다.

<공주의 남자>에서 운명의 역할을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역사다. 그들이 살아가는 시대다. 관객은 안다. 그들이 살아가는 시대가 어떠한지. 그 시대가 그들에게 어떤 시련을 줄 것인지. 그리고 그런 시대에 그들은 한껏 자신의 파토스로서 부딪혀가게 된다. 그것도 가장 순수하며 가장 아름다운 사랑으로써. 누구나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그 피비린내나는 역사의 격랑과 부딪혀 부서져간다. 개인의 작지만 순수한 격정의 불꽃과 그들을 희생시키고 마는 역사라고 하는 거대한 힘. 수양대군(김영철 분)은 바로 그러한 역사라고 하는 운명의 중심에서 그들에게 시련을 주는 존재로써 나타난다. 그를 사랑하며 그를 원망하며 그를 증오하며 그러나 그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다. 눈이 멀어 더 이상 복수를 할 수 없게 된 김승유(박시후 분)에게서 오히려 구원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래서다. 그의 격정은 마침내 딸이라고 하는 결실과 함께 사랑하는 세령(문채원 분)과 함께 하는 평온으로 이어졌고, 그것은 수양대군이라는 운명과 단절됨으로써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가 수양대군을 의식하는 이상 얻을 수 없는 행복이었다.

세익스피어의 대표적인 비극 <햄릿>에서도 마침내 죽음을 맞는 햄릿에 대해 동정하기보다 오히려 죽음으로써 그가 얻게 될 평안에 대해 안도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어머니를 원망하고 원수를 증오하며 항상 복수를 위해 노심초사해야 했다. 그러나 과연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죽이며 그것을 통쾌해할 수 있는 인간인가? 원망과 증오는 결국 자기를 해치는 독과 같다. 차라리 죽음으로써 그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더구나 김승유는 살아서 비록 눈은 멀었지만 그로 인해 진정한 해방과 행복을 누릴 수 있었다. 이 또한 아이러니일까? 눈이 멀음으로써 그는 비로소 평범을 얻을 수 있었다.

드라마가 그토록 화제를 모으며 방영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역사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역사라고 하는 거대한 운명에 치이는 개인의 이야기였다. 살아하고 간절히 사랑하면서도 그로 인해 고통을 겪어야 했던 그다지 대단하지 않은 보통의 개인들의 이야기였다. 나도 저러하리라. 나 또한 저럴 수밖에 없으리라. 그들의 어리석은 선택에 반발하고, 그들의 무력함을 비난하고,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운명을 거스르려는 발버둥을 비웃으면서도, 그러나 그래서 그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동정하고 연민하며 그들이 겪는 감정에 공감한다. 그들의 비극이 처절할수록 현실을 살아가는 시청자의 비극 역시 간절해지며 마침내 감정의 정화에 이르게 된다. 오히려 단 한 번도 영웅이었던 적이 없었기에 마지막의 해피엔드는 그들을 위한 구원일 수 있는 것이다.

그동안 사극이라고 하면 대단하고 거창한 거대서사만을 의미했다. 역사교과서에 기록된 그대로 큰 줄기로서의 의미만을 따지려 했다. 왕권이 어떻고, 신권이 어떻고, 성리학적 가치가 어떻고, 조선이라고 하는 역사의 큰 맥락이 어떻고, 세조는 어떤 군주였으며, 세조의 찬탈은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가? 그러나 그 속을 살아가는 사람은 철저히 배제되어 있었다. 아니면 역사적인 맥락은 철저히 배제된 채 그 속을 살아가는 인물들에게만 현미경을 들이대고 있었다. 역사와 전혀 상관없이 살아가는 평범한 일상들만을 보여주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달랐다. 역사라고 하는 거대한 흐름과 그 속을 살아가는 개인의 디테일을 놓치지 않았다. 철저히 김승유와 세령이라고 하는 개인을 드라마의 중심에 놓으려 하면서도 그들을 둘러싼 역사에 대해서도 그들을 강제하는 운명으로써 놓치지 않고 그것을 큰 맥락으로 압축하여 그려내고 있었다. 계유정난에서 세조의 찬탈로 이어지는 역사와 그 중심에서 각각 김종서와 세조의 아들과 딸로써 살아가야 했던 가련한 연인들. 싸우고 쓰러지고 도전하고 무너지면서도 그들은 살아간다. 항상 울고 절규하고 분노하면서도 끝내 서로를 사랑하며 살아간다. 개인의 비극과 그 비극을 만들어내는 시대라고 하는 운명가 그로부터의 구원.

엔딩이 참으로 시의적절했다고 하는 이유일 것이다. 구원이었다. 모든 은원으로부터의 구원. 김종서의 아들이기에, 그리고 세조의 딸이기에, 그들로부터 비롯되지 않은 것들로부터 강요되어 온 타인의 삶으로부터의 구원. 비로소 그들은 운명을 극복하여 그들의 자리에서 오롯하게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모두가 바라는 것이 아닐까?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도 누구나 그 어쩔 수 없는 것들로부터 해방되고 싶어한다. 자유롭고 싶어한다. 구원이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어쩔 수 없는 것이 비극이 되지 않는 것. 어쩔 수 없다며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 그것은 신면(송종호 분)의 비극이기도 했다. 끝내 경혜공주(홍수현 분)가 어미로써 자식을 위해서라도 김승유를 설득하라 세령에게 이야기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그녀가 남편 정종(이민우 분)을 잃은 것은 역시 운명에 의한 것이었지만 진심은 그러지 않기를 바랬었다. 함께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랬었다.

비극이란 이런 것이다. 역사를 운명으로 비극의 정석을 철저히 밟으며 만들어진 드라마였다. 어째서 비극은 사람을 슬프게 만들고, 그러면서도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가? 다른 누군가의 안타까운 모습을 보면서 즐거워하는 악취미에 의한 것은 아닌 것이다. 본연의 선량함에서 비극은 출발한다. 행복하기를 바라며, 그를 위한 시련과 고통을 공감하며 연민한다. 바로 내 이야기처럼. 그러한 공감과 연민을 통해 자신의 현실을 위로할 수 있게 된다. 해피엔드가 좋은 것은 각박한 삶 속에 한 가닥 희망을 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도 행복할 수 있었다.

허술한 부분들이 분명 많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공중파 드라마의 한계였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끝까지 아쉬운 것은 지나치게 역사라고 하는 운명에 집착하지는 않았는가. 지나치게 김승유와 세령이라고 하는 허구의 인물들을 역사 속에 밀착시키느라 불필요하게 역사의 비극에 그들을 관계시키고 말았다. 계유정난 당시 김종서가 죽임을 당하는 과정에서도, 정종이 마침내 2차단종복위운동의 거사를 신면에게 들키는 과정에서도, 그리고 김승유가 끝내 홀로 불전에 앉아 있는 세조를 습격했을 때도, 그토록 오랜 고난과 비극 끝에 겨우 손에 넣은 기회에서조차 세령의 임신으로 인해 좌절하고 마는 모습은 얼마나 안타까웠는가?

비극에서의 공감은 그들이 충분히 자신을 이입할 수 있도록 선량하기에 발생한다. 그들을 이해할 수 있다. 납득할 수 있다. 공감함으로써 자신을 이입할 수 있다. 그런데 그들로 인해 비극이 발생하고, 때로 그들 자신이 비극의 원인이 되고 한다면 과연 자신을 이입할 수 있겠는가? 김승유가 세령의 임신사실을 알고 멈칫거리다 세조에게 잡혔을 때 세령이 임신한 것을 원망하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끊이지 않던 주인공들에 대한 민폐논란이 여기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역시 그렇게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 것이 보통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드라마에서 가장 큰 반전이 바로 김승유라고 하는 주인공의 캐릭터라는 것이다. 영웅이라 생각했다. 아버지의 복수와 단종 복위의 대의와 그리고 그 과정에서 희생된 친구 정종과 스승 이개에 대한 마음의 빚과, 그래서 사명을 가지고 세조에게 대적하는 것이라고. 그러나 그것은 단지 허상에 불과했다. 인간 김승유가 아닌 김종서의 아들이며, 정종의 친구이며, 이개의 제자라고 하는 그의 껍질이 그렇게 그를 강요한 것이었다. 실재하지 않는 허구의 인물로써 실재하는 시간과 공간에 머물며, 실재하지 않은 허구의 존재로써 주위의 강요로 인해 살아갔다. 시대는 그렇게 그를 떠밀었고 그는 예정된 비극 속을 발버둥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면 오이디푸스 역시 스스로의 눈을 멀게 함으로써 비로소 운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를 그토록 괴롭히던 운명으로부터 그가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의 눈을 찌르고 모든 것들로부터 격리된 뒤로부터였다.

물론 대작 드라마는 아니다. 역사왜곡도 상당하다. 하지만 역사란 그렇게 심각하고 진지해져야만 하는 것인가? 문득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아 즉위하던 무렵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무수한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살아갔을 것인가? 그 가운데서도 남녀는 있었을 것이고 청춘은 있었을 것이다. 핏빛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가운데서도 사랑하고자 하는 순수와 열정은 있었을 것이다. 학술로서의 역사는 사실에 대해 엄밀해야 할 테지만, 일상에서의 역사란 그러한 현실과 다른 시대의 그러나 현실의 연장에 존재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역사가 역사책에서 비로소 사람들의 일상으로 가까이 다가올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이와 같은 드라마가 더 많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인 것이다. 모호한 시대 구체적이지 못한 이야기보다, 분명한 역사적 사실과 구체적인 이야기들만을 들려주는 것보다, 역사라고 하는 구체적인 시대와 사실 속에서 그러나 관념의 팔을 뻗어 현실의 일상 속으로 끌어안게 된다. 역사가 한 결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 가까이 다가오게 된다.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은 역사책을 통해 알아가면 될 것이다. 역사란 그런 것이 전부는 아닌 것이다.

좋은 드라마였다. 영상도 아름다웠고, 배우들의 연기도 아름다웠다. 하지만 역시 시대라고 하는 운명을 격정 속에 부딪히며 부서져갔던 사람들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다. 드라마란 결국 작가놀음이라 하는 것일 게다. 불만도 있고 아쉬움도 있지만 그래서 동의한다. 이 드라마는 정말 멋지다.

어쩔 수 없는 운명과 그러고자 하는 파토스의 의지와 개인의 선택에 따른 결과들. 운명은 개인을 강요하고, 파토스는 선택을 강요하다. 둘이 하나로 일치한다면 상관은 없을 테지만, 그러나 둘이 항상 일치하는 것이 아니기에 모순은 발생한다. 아이러니라 하는 것이다. 차라리 주저앉을수라도 있다면 더 이상의 비극은 없을 테지만 그 의지가 강하고 순수하여 비극은 더 깊어진다.

비극의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비극에 맞서며 살아가는 사람이 아름다운 이유인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은 살아가게 된다. 찢기고 부서지면서도 끝내 행복하려 살아가게 된다. 김승유와 세령의 웃음에서. 그것을 보는 세조와 정희왕후의 웃음에서. 이 또한 역설일 것이다. 행복할 수 있음으로써 구원받을 수 있다. 오롯이 그것만은 개인의 의지에 속하는 것이다. 드라마의 메시지가 아닐까? 그같은 비극 속에서도 살아가려 하고 행복하려 하는 의지가 있어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다.

한동안 헤어나기 힘들 것 같다. 그렇게 김승유와 세령이 일상에 깊이 자리해 버렸다. 어디선가 스승님 하는 소리와 딸의 손을 잡고 가는 눈 먼 사내의 모습을 보게 되지 않을까? 아쉬움이 벅차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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