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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칼럼
  • 입력 2015.02.09 10:54

과잉복지논란, 선별적 복지와 보편적 복지에 대해..

인간의 존엄과 보편적 삶의 수준, 복지의 의미를 묻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최초의 복지는 자선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지배계급이 개인의 재산을 헐어 곤란한 처지에 있는 이들을 돕는다. 대개는 종교적이거나 이념적인 이유에서였다.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은 매우 도덕적인 행위이며, 따라서 그 같은 자선행위는 곧 지배계급의 도덕적 정당성을 확인하는 계기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현상이며 당위일 것이다.

비스마르크가 신생 독일제국에서 최초로 사회복지제도를 정착시킨 것은 그가 노동자계급을 동정하거나 염려해서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보다는 갈수록 세를 넓혀가며 독일제국의 지배를 위협하던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견제의 목적이 더 컸었다. 노동자를 비롯한 무산계급이야 말로 사회주의자들이 지향하는 바였고, 그들을 지탱해주는 기반이었다. 아직 대부분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무력한 처지에 있던 이들 무산계급들에 대해 국가가 직접 도움을 줌으로써 사회주의자들의 영향력 확대를 저지하고 이들의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고취하기 위한 의도였던 것이다. 물론 그 의도는 완전히 달성되지 못했다.

▲ 복지란 무엇인가. 먼저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스타데일리뉴스
영국의 구빈법은 비스마르크의 사회보장제도보다 더 노골적이었다. 가난한 이들은 장차 국가의 지배체제를 위협할 수 있는 잠재적 위협이었다. 관리하고 통제해야 한다. 더구나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와 부르주아 계급이 성장하면서 가난은 자유주의적인 도덕관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누구나 자유롭게 부를 축적할 수 있는데 가난한 것은 개인에게 어떤 필연적 문제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직접적인 도움을 주기보다 일자리와 함께 가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 중요하다. 최소한 법에 의해 도움을 받는 빈민이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는 가장 가난한 사람보다 더 나은 조건에 있어서는 안 된다. 19세기 아일랜드 대기근 당시 백만이 넘는 아일랜드인이 굶어 죽어가고 있음에도 영국정부가 수수방관하고 있던 이유였다. 당시 영국 지배층이 우려하던 바대로 그것은 곧 아일랜드인들의 영국에 대한 강한 적개심과 과격한 독립투쟁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반면 사회주의자들은 복지야 말로 인간이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로 인식하고 있었다. 일찍이 마르크스는 자신의 저서 '자본론'을 통해 노동자의 임금에 대해 재화로써 개인의 노동력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으로 정의하고 있었다. 노동자가 생존을 위해 먹고, 입고, 자는 것은 물론,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병원진료를 받고 문화생활 및 레저를 즐기는 모든 비용들이 이 임금에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 자신에 대한 비용이다. 최저임금에 대한 가장 중요한 논거 가운데 하나다. 러시아혁명 이후 소비에트에 의해 시작된 여러 사회복지제도와 1945년 기존의 구빈법을 대신해 시작된 영국의 새로운 복지제도는 바로 그러한 개념 위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모든 국민들로 하여금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최소한의 것들을 누리며 살 수 있도록 국가가 보조한다. 보편적 복지의 시작이다.

선별적 복지와 보편적 복지의 이론적 기반이다. 선별적 복지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돕는 것이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도움을 주는 것이다. 개인적인 동정심이거나, 혹은 종교나 이념에 근거한 도덕적 판단이거나, 그도 아니면 가난한 이들로 인한 사회적 동요와 불안을 최소화하려는 정치적 결정이거나. 어찌되었거나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일 것이다. 우리가 아닌 그 밖의 다른 누군가들일 것이다. 철저히 타자이며 대상이다. 하기는 같은 인간인데 누군가를 정의하고 판단하고 구분 지으려는 행위가 당연하게 이루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심판자와도 같다. 판단하는 주체에 의해 대상의 범위와 수준까지 결정되고 만다. 때로 그것은 한 개인, 한 가족의 운명까지도 결정지을 수 있다.

보편적 복지는 말 그대로 보편적 인간을 전제한다. 경제적이거나 혹은 사회적인 외적 요인을 배제한 오롯한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것들이다. 인간다운 삶이란 말로 정의할 수 있다.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들과 더불어 인간으로서 존엄함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풍요들. 사치가 아니다. 사회의 보편적 수준에 맞추기 위한 최소한의 요건들이다. 최소한의 교육과 최소한의 문화생활과 최소한의 사회활동과 최소한의 오락. 단지 굶주리지 않고 추위에 떨지 않는 것으로 인간다운 삶을 산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저 자식을 낳아 성인이 될 때까지 죽지 않고 살았으니 훌륭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자라났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보편적 복지는 따라서 평등과 인권의 성장과 비례하여 발전해오고 있었다.

끼니를 잇기 힘들도록 가난한 집 아이라서가 아니다. 나라의 도움이 없이는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중증 장애인이라 서도 아니다. 인간이라 서다. 재벌회장이기 이전에 이 나라의 국민이고, 유력정치인이기 이전에 이 사회를 이루는 구성원이다. 그래서 법이 정한 바에 의해 의무교육을 받고, 법이 정한 바에 따라 동등한 책임과 권리를 누리게 된다. 굳이 필요치 않아 누리려 하지 않더라도 법은 그렇게 모든 구성원에게 동등하게 적용되고 있다. 복지도 이와 같다. 대한민국의 국민이기에 최소한 이 정도는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가치란 얼마나 될까? 복지의 수준은 바로 그를 통해 결정된다.

복지에 대한 비용은 따라서 그를 위한 비용이어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최소한 어떠한 삶을 누려야 하는가? 그 이하의 삶에 대해서는 인간적인 모멸감과 분노마저 느끼게 된다.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한 몸 누일 곳조차 없이, 끼니마저 거르기를 밥 먹듯 하는 노숙자의 삶을 보는 느낌이 그럴 것이다. 최소한 인간이라면 저보다는 나은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은 지향이기도 하다. 열악한 현실에 대해 멸시하고 조롱하기보다 그것을 개선할 방향을 고민한다. 그 비용을 사회 전체가 부담한다. 무상이 아닌 비용인 것이다. 그 비용도 아깝다고 한다.

과잉복지라는 말은 따라서 국민의 삶의 수준이 과잉되었다는 말과 같은 뜻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가계부채가 사상최고치를 갱신해가는 지금 복지수준을 줄인다고 그 만큼 지출을 늘릴만한 여력이 있는 가계는 현실적으로 그리 많을 수 없다. 늘리는 만큼 다른 곳에서 줄여야 한다. 그런데도 복지지출을 줄이고 복지수준도 낮춰야 한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정규직이 지나치게 보호받고 있다. 노동자가 일하는 것에 비해 너무 많은 임금을 받고 있다. 이미 국민들은 너무 잘살고 있다. 아마도.

복지란 무엇인가. 먼저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어려운 이를 돕는 것인가. 나 아닌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나 - 아니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인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인간다운 삶을 누리기 위한 것인가. 국가가 복지를 위해 지출해야 하고, 사회가 그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이유란 과연 무엇인가. 물음도 없고 답도 없다. 아쉬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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