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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1.10.07 08:41

뿌리깊은 나무 "태종이 세종에게 보낸 빈찬합의 비밀"

왕과 권력과 나라에 대해 이야기하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내가 세운 조선이다! 내가 더러운 물에 손을 담그고 세운 나의 조선이야! 내가 온전히 모두 가져야 마땅할 권력이다! 그것이 나의 조선이고, 나 이방원의 대의이다! 나 이방원의 대의가 곧 조선의 대의인 것이다!"
"나의 조선은 다릅니다! 다를 것입니다!"
"어찌 다를 것인가? 어떻게 다르게 할 것인가? 답을 해 보거라! 너의 조선이라고 했다. 너의 조선이란 어떤 조선이냐? 답을 하고 답을 말해 보거라!"

태종(백윤식 분)이 아들 세종(송중기 분)에게 마지막으로 베풀려 한 가르침이었을 것이다. 왕이라는 것에 대해서. 왕이라고 하는 자리에 대해서.

권력이란 정의와 폭력의 합성어다. 정의가 없는 폭력은 무도함이다. 폭력이 사라진 정의란 넋두리에 불과하다. 온전히 이 두 가지가 합쳐졌을 때 그것은 권력으로써 완결된다. 그리고 정의란 바로 이유이며 목적이다. 왕이어야 하는 이유. 왕으로써 하고자 하는 목적. 그것을 다른 말로 권력의지라 부른다. 권력의지를 가지고서야 비로소 폭력이 따라오며 권력은 완성된다.

과연 그래서 태종은 묻고 있는 것이다. 세종에게 네 조선은 어떤 조선이냐고. 조선의 왕으로써 세종에게 어떤 나라를 만들고 싶은가를 묻는 것이다. 어떤 나라를 목표로 어떤 군주가 되어 다스리려 하는가? 그 구체적인 방법이나 계획은 세워져 있는가?

그저 왕위에 있기 때문이 아니다. 어쩌다 보니 왕의 아들로 태어나 왕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왕이라면 마땅히 자신의 나라에 대한 그림을 그릴 줄 알아야 한다. 그림을 그리고 그것을 채워나갈 줄 알아야 한다. 태종이 세종에게 빈 찬합을 보낸 것도 그와 같은 의도에서가 아니었을까? 왕이라면 마땅히 그 빈 찬합을 스스로 채워 돌려보낼 수 있어야 한다.

삼국지에서 순욱이 조조로부터 빈찬합을 받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그가 왕이 아닌 신하이기 때문이었다. 신하란 왕이 그린 그림을 채워나가는 존재이지 스스로 그림을 그리는 존재가 아니다. 신하로써 찬합을 채우려 한다면 그것은 반역이 된다. 그러나 왕이라면 빈 찬합을 빈 찬합인 채로 내버려두지 않아도 된다. 그것이 왕이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여 행동하고 그 책임까지 지는 것. 그래서 왕은 곧 국가인 것이다.

다행히 세종 또한 역사에 남을 영민한 군주이기에 아버지 태종의 그와 같은 뜻을 이내 알아차리고 만다. 찬합이 마방진과 비슷한 것에 착안하여 자신이라면 이 찬합을 아버지와는 달리 어떻게 채워나갈 것인가? 그리고 그 답을 구했을 때 그는 왕으로써 전혀 어떠한 두려움도 거리낌도 없다. 그래서 아버지 태종에게 죽임을 당한다면 그또한 받아들일 뿐이다. 판단도 결정도 실핸도 그 책임도 온전히 왕인 자신이 진다.

설사 태종과 다른 길을 가게 되더라도 세종의 선택이 태종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왕이기에 왕으로써 자신의 나라를 계획하고 그 계획을 완성시키는 존재로써 살아가겠다. 왕에게는 왕인 자신조차 수단이 된다.

태종이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죽인 것을 비난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목숨을 미끼로 호위무관인 무휼(조진웅 분)더러 태종을 죽이라 명령할 수 있는 것은 이미 그가 왕이기 때문이다. 왕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지키려 한다면 자기 자신마저 수단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하며, 친아버지마저 죽일 수 있어야 한다. 과연 자신의 조선이기에 방해가 된다면 누구라도 죽인다고 하는 태종의 모습과 그러한 세종의 모습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겠는가?

단지 사람이 다르니 그 나타나는 형태가 달라질 뿐인 것이다. 여전히 세종은 왕이며 조선은 세종 자신의 나라다. 조선이 어떤 나라가 되든, 세종 자신이 어떤 임금이 되든 전적으로 그의 판단과 선택에 달린다. 그것이 권력의 정점에 선 왕으로서의 세종의 의지다. 태종에게는 태종의 방식이 있다면 세종에게는 세종의 방식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본질은 같다.

상당히 높은 수준에서 왕과 권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고나 할까? 드라마를 통해 전개될 이야기들에 대한 기대가 높은 이유일 것이다. 과연 드라마는 세종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려 하는가? 굳이 도입부에서 이와 같은 높은 차원의 권력에 대한 담론을 전개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드라마가 그를 통해 묘사해 보여주려 하는 세종의 모습은 어떠한 것인가? 태종과의 대립을 통해 마침내 왕으로서의 자신을 깨닫게 된 세종이 왕으로써 만들어가는 조선과 조선의 왕이 된 모습은 어떠한 것일 것인가?

확실히 집중도가 높다. 그에 비하면 또다른 주인공 강채윤의 아역인 똘복(채상우 분)의 모습은 상당히 집중도를 떨어뜨리는 역할을 한다. 마치 거리에서 흔히 보게 되는 오기가 전부인 또래의 아이들을 보는 듯한 느낌일까? 괜히 허세를 부리며 강한 척 하지만 결국은 세상이 두렵고 겁나는 나약한 자아에 불과한 것이다. 두려우니 괜히 가시를 세워 상대를 위협하고, 겁이 나니까 으르렁거리며 가까이 다가오지 말라 도리어 겁도 주어 보고. 그래봐야 눈앞에 다가드는 어른의 칼 앞에 오줌을 지리고 마는 주제일 것이다.

상당히 성가신 것이다. 어느 정도 드라마에 이입도 하고 하려면 일단 드라마속의 인물에 동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공감하며 자신과 동일시해야 한다. 그런데 전혀 그러기에는 악으로만 똘똘 뭉친 것이 오히려 보기에 얄밉다는 생각부터 든다. 버르장머리 없고 경우마저 없다. 오로지 자기 멋대로다. 어린아이다운 아집에 사로잡혀 전혀 주위와 소통하려 하지 않는다. 처지는 억울한데 선의의 피해자라기보다는 그럴만하다는 생각이 든다고나 할까?

조금은 더 어린아이다운 순수한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반촌의 시장을 거닐며 신기해하는 모습은 확실히 어린아이다웠다. 그러나 어린아이다운 아집과 독기에 또한 어린아이다운 순수함을 동전이 앞뒷면처럼 일체화시켜 그 경계를 연기한다는 것은 아역연기자에게는 상당히 버거운 일이다. 성인연기자도 그같은 반전의 이중성을 연기하기가 쉽지 않다.

결국은 성인이 된 강채윤을 연기하는 장혁에게 많은 것을 기대해야 한다는 것인데, 다행히 장혁이란 신뢰할 수 있는 배우의 이름이라는 점에서 불안감은 그다지 크지 않다. 강채윤이라는 인물을 얼마나 매력적으로 설득력있게 보여줄 수 있느냐에 따라 드라마의 성패는 갈릴 것이다. 이미 모두가 아는 역사적 사건을 흥미로운 드라마로 만들어주는 것은 다름아닌 강채윤이라는 허구의 캐릭터다. 제작진의 의도와 장혁의 연기를 벌써부터 주목하는 이유다.

아무튼 재미있었다. 세종과 태종 사이에 오가는 한 나라의 권력의 정점에 어울리는 살벌함이라니. 유약한 듯 보이면서도 결정적인 순간 왕의 얼굴로 돌아오는 송중기의 연기는 상당히 인상깊었다. 왕이 왕이고자 한다면 어떤 순간에도 그는 왕일 것이다. 차라리 광기마저 느껴지는 태종과 그와 다르면서도 닮아 있는 세종. 과연... 그야말로 과연이라는 말밖에.

스케일과 디테일 모두가 탁월하다. 허술한 부분이 보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드라마를 위해 무시해도 좋을 정도다. 마치 그 시대 한가운데 있는 듯. 실제의 태종과 세종이 바로 옆에 있는 듯. 벌써부터 명품의 향기가 난다. 이대로만 계속 이어진다면. 다음주를 기다린다. 좋다. 좋은 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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