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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1.10.06 06:59

뿌리깊은 나무 "권력은 부자지간에도 나누지 않는다!"

새로운 태종과 세종을 그리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흥미로운 해석이었다. 바로 이런 것이 왕일 것이다. 아니 현실의 부자관계이기도 하다. 아들은 아버지를 이기고 홀로 서려 하고, 아버지는 여전히 아들을 품에 가두려 한다. 더구나 권력이라는 것이다. 부모자식 사이에도 나누지 않는다고 하는.

사실 태종(백윤식 분)이 세종에게 일찌감치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나 앉은 것은 모두 세종(송중기, 한석규 분)을 위해서였다. 정확히는 부족한 조선왕조의 정통성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였다. 태조에서 정종, 태종까지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거치며 정상적인 왕위계승이 없었다. 더구나 세종 자신조차 장남인 양녕대군을 제치고 3남으로써 세자에 책봉되어 왕위에 오른 터였다. 아직 확고히 체계가 잡히지 않은 건국초의 조선에 있어 그것은 자칫 왕인 세종에게 불안요인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세종이 자리를 잡기까지 태종이 상왕으로 있으면서 후견역할을 하려 했던 것이었다. 세종이 일찌감치 아들 문종을 집무에 참여시키며 나중에는 아예 섭정까지 맡긴 이유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겨우 문종에서 단종까지 장자계승이 이루어지며 정상적으로 왕위가 물려지고 있었는데... 그야말로 조선을 뿌리깊은 나무, 샘이 깊은 물로 만들려 했던 치열한 노력의 결과였다. 그 결론은 많이 안타깝지만 말이다.

참 공교롭다. 하필 경쟁방송사에서는 세종 사후에 대해 방송하고 있었다. <공주의 남자>에서 원래 경혜공주가 정종과 결혼한 것이 아직 세종이 살아있을 때였다. 세종이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손자가 단종이었으며, 이미 어려서부터 항상 함께 놀아주며 왕으로서의 수업을 시키고 있었다. 신숙주가 이때 세종으로부터 단종을 부탁하노라는 말을 들었었는데. 아마도 <뿌리깊은 나무>에 출연하는 신하들 가운데 신숙주와 정인지 등 몇을 제외하고는 <공주의 남자>에서 모두 세조의 아들 수양대군에게 죽임을 당하고 있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집안이 태종에 의해 절단났으니 소현왕후 심씨의 원한이 수양대군을 통해 조선왕실에 쏟아부어진 것도 같다. 소현왕후의 소생인 수양대군에 의해 세종의 후궁과 그 아들들마저 살아남지 못하고, 장자와 손자는 요절하거나 내쫓겨 죽임을 당했다. 이것도 인과응보라 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것은 나중의 일이고 아직까지는 성삼문도 신숙주도 나타나지 않았을 때다. 김종서 역시 조정에서 크게 두각을 나타내기 전이었다. 막 태종이 상왕으로 물러나고, 세종이 즉위하여 왕으로써 업무를 시작했을 때, 그러나 과연 상왕으로써 조정에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아버지에 대해 세종의 입장은 어떠했는가? 드라마는 바로 그 의문에서부터 시작하고 있었다. 당연히 아들 세종을 위해 일찌감치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아들 세종 역시 그같은 아버지의 뜻을 알고 효심으로 받들었다. 그러나 그 속은 아무도 모르는 것 아니던가? 과연 장인인 심온과 그 집안을 끝장내려 했을 때 세종의 속마음은 어떠했겠는가?

태종의 입장에서 조선은 바로 이씨의 나라였다. 왕의 나라였다. 왕이 곧 나라의 주인이었고 나라 자체였다. 제아무리 아끼는 공신이고 가까운 친척이라도 그와 같은 원칙에서 벗어났을 때 예외란 있을 수 없었다. 신하인가? 아니면 적인가? 설사 그럴 뜻이 전혀 없었다 하더라도 그럴만한 가능성이 있는 것만으로도 그는 적이 되었다. 적은 배제되어야 한다. 그를 위해 그는 아버지를 몰아냈고, 형을 밀어냈으며, 처가를 몰살시키고, 아들 양녕대군마저 쫓아냈다. 이제 아들 세종을 위해서 외척이 되는 심온을 제거할 차례다. 그런데 아들인 세종은 그러한 자신의 뜻을 알아주지 않는다. 왕으로써 유약하여 결단을 내리지 못하니 이를 어찌할 것인가?

그런데 또 세종 입장에서도 조선의 왕은 세종 자신이었다. 심온은 자신의 장인이었다. 죽이더라도 세종 자신이 죽여야 했다. 자신이 왕이니 죽여야 한다면 세종 자신의 손으로 죽이는 것이 옳았다. 그런데도 아직 조정의 실권은 태종에게 있어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 심온을 죽이는 것도, 심온을 살리는 것도, 도리어 심온을 살리려 한 그의 의도가 태종에게 역이용당하며 오히려 심온을 죽게 만드는 결과로 이어진다. 과연 조선의 왕은 세종 자신인가? 상왕 태종인가? 아버지 아들이기 이전에 권력을 쥔 입장에서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어디까지 가려는가는 모르겠다. 과연 전통적인 아버지와 아들 사이를 결국에는 회복하게 될 것인가? 그조차도 사실은 아들을 위한 것이었다. 굳이 방진을 풀고 있는 세종을 찾아와 왕의 길에 대해 설명한 것도 그를 위핸 배려가 아니었겠는가? 그리고 아들은 아버지를 끝내 이해하고 용서한다. 그렇지 않으면 태종은 세종조차도 조선과 왕조를 위한 수단으로써 여기게 될 것인가? 아들이기 이전에 조선의 왕조를 이어갈 존재로써 그 자격을 논하고 효용을 고려하게 될 것인가? 전자라면 자칫 평이하겠지만 후자라면 이야기는 상당히 비장하고 치열하게 전개될 수 있겠다. 개인적으로 가장 기대하는 부분이다. 이제까지 가운데 가장 흥미로우면서도 독창적인 태종과 세종의 관계가 아닐까?

"죄지은 자가 없어도 잘못된 것이 있으면 죄지은 자가 나와야 하는 것이 조정의 일 아닙니까?"

바로 그것이 권력이라 하는 것일 게다. 의지다. 목표한 것이 있으니 결론이 있고, 의도한 것이 있으니 결과가 있다. 왕이란 옳은 길을 가는 이를 뜻하지 않는다. 자신이 가는 길을 옳은 길로 만드는 것이다. 사슴이 있어 그것을 말이라 한다면 말이 되어야 한다. 사슴이 말이 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권력이 없다는 뜻이다. 사슴이 말이 되기를 기다리거나, 사슴을 말이라 부르도록 유도하거나, 아니면 사슴을 말이라 할 때까지 죽이거나. 우리나라에서도 아주 최근까지 정치란 그런 것을 의미했다. 집권자의 뜻이 있다면 결론은 그렇게 나온다. 피는 권력의 증거다. 

심온이 잘못해서가 아니다. 잘못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죄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런 가능성이 상왕 태종에게는 죄가 되는 것이다. 그러한 의도가 있는 한 없는 죄도 있어야 한다. 죄가 있어 그것을 밝히기 위한 고문이 아니라 왕으로써 당당하게 심온을 죽이기 위한 고문이다. 그에 대해 태종 자신도 그를 위해 일하는 조말생 이하 신하들도 조금의 거리낌도 부끄러움도 없다. 그것이 바로 왕을 위한 일인 때문이다. 나라를 위한 일인 때문이다. 누구의 피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그 피를 원하는가가 중요하다. 왕이 그의 피를 요구하기 때문에 심온은 죽어야 한다. 세종이 왕이라면 태종이 죽어야 할 것이다. 아마 태종이 말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었을 테지만. 세종은 과연 왕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아무튼 이 드라마의 바로 또 하나 흥미로운 부분일 것이다. 태종과 세종의 갈등 속에 정작 피해를 입는 것은 전혀 엉뚱한 심온의 노비 똘복이 강채윤(아역 채상우, 장혁 분)이었다. 태종과 세종은 각자 목적이 있고 의도가 있어 충돌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 사이에 끼어 아무것도 모르는 똘복이의 아버지 석삼이도 처참하게 목숨을 잃고 만다. 왕에게는 왕 나름의 사정이 있지만 거리가 멀수록 의지는 사라지고 행위만 남는다. 정작 아내인 소현왕후조차 아비 심온이 죽은 것으로 세종의 처지를 이해하려 하기보다 원망하는 것처럼. 성군이라 일컬어지는 세종에 원한을 품고 그를 죽이려는 이가 나온다. 역시 이제껏 한국 드라마에 없었던 설정일 것이다. 그것도 바로 권력이다.

과연... 진짜 과연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드라마일 것이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진행되려는지 지금 상태로는 도저히 감조차 잡지 못하겠다. 어떻게 어떤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려는가? 각 인물들은? 그 관계는? 그리고 세종이라고 하는 역사적 실체는? 어디가지가 허구이고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드라마가 추구하는,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러한 물음을 던지게 된 자체가 드라마의 의도가 충실히 전달된 증거라는 것이다. 벌써부터 드라마에 대한 흥미와 기대가 생겼다.

기대가 크다. 사실 시작부분은 조금 생뚱맞은 것이 있었다. 세종을 암살하려 이것저것 꾸미는데 너무 무모했다. 조금 더 치밀하게... 하지만 워낙 똘복이 자체가 그같은 치밀하고 냉정한 계산과는 거리가 멀다. 지레 흥분하여 오히려 도망치지 못하고 관군에 잡히는 장면에서도 아이는 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이답지 않은 아이가 넘쳐나는 사극에서 제대로 아이다운 아이였다고나 할까? 자라서도 그다지 성정이 바뀐 것 같지는 않고. 그런 맛이리라. 그런 분위기이지 않을까?

아직 드러난 것이 그다지 없어 판단하기는 이르다. 그러나 백윤식의 태종은 그 어떤 배우가 연기한 태종보다 광기에 번득이고 있었고, 송중기의 세종은 그러한 아버지에게 반항을 꿈꾸는 젊은 아들을 제대로 연기해 보이고 있었다. 그 밖에 여러 중견배우들과. 똘복이 역의 채성우는 진짜 이름 그대로였다. 어찌나 얄미운지. 오랜만에 공중파에 모습을 나타낸 한석규의 세종 또한 기대가 크다. 그는 또 어떤 세종을 시청자들에 연기해 보여줄까? 한석규라는 이름에 대한 신뢰와 기대일 것이다. 짧지만 존재감 있었다.

간만의 대작역사드라마일 것 같다. <공주의 남자>가 기존의 역사를 압축하여 가상의 인물들이 공존할 수 있게 살짝 비틀고 있다면, <뿌리깊은 나무>는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 허구의 인물과 사건들을 묻어버리려는 듯하다. 그러면서 허구의 이야기는 시대의 디테일로 파고들고 있고. 물론 결국은 마지막까지 처음의 기세를 이어가는 힘일 것이다. 아직은 지켜 볼 뿐이다. 시작은 분명 좋다.

재미있었다. 아버지와 아들조차 따로 없는 냉혹한 권력의 법칙과 치열한 기싸움, 그리고 그로 인해 희생되는 무고한 이들이 있다. 왕이란 바로 이런 존재라며. 왕의 의지란 이리도 크고 깊고 잔인하고 냉혹하다며. 과연 어떤 왕을 그리려 하는 것인가. 감탄하고 있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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