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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1.10.04 08:19

놀러와 "3대 기타리스트, 록의 전설들을 보다!"

가장 영광된 자리에 있어야 했을 전설들의 고난과 영락...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당시를 기억한다. 요즘에는 아이돌 팬덤이 서로 인터넷상에서 다투고 싸운다. 그런데 당시에는 록밴드 팬들이 공연장에서 서로 다투고 싸웠다. 공연장이 아니더라도 모이면 항상 화제가 그것이었다. 부활이 낫다, 시나위가 낫다, 백두산이 낫다. 그리고 각 팀의 상징과도 같이 3대 기타리스트의 이야기가 있었다.

물론 3대 기타리스트라고 해서 당시 가장 기타 잘 치는 세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었다. 당장 떠오르는 이름만도 이태원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이중산이 있었고, 그룹 '사랑과 평화'의 최이철, '시인과 촌장' 함춘호, 재야의 고수로 역시 이태원에 김광석이라는 분이 계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가수 김광석과는 다른 사람이다. '백두산'의 보컬이며 트로트 가수로 활동했던 유현상 역시 당시 최고의 인기밴드 '라스트찬스'에서 10대 시절부터 기타를 쳤던 유명한 기타리스트였다. 동시대 활동했던 기타리스트로 윤수일이 있었다. 그리고 그야말로 전설 '들국화'에서 기타를 쳤던 최구희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이밖에도 3대기타리스트 바로 전에도 김수철이 있었고, 그들과 동년배로 '작은하늘'의 이근형과 '블랙홀'의 주상균이 있었다. 김종서가 부활을 나가서 시나위에 가기 전 잠시 몸을 담았던 밴드가 바로 '작은 하늘'이었다. 이 '작은 하늘'의 2집에서 노래를 부른 보컬이 재미있게도 부활 3집에서 '사랑할수록'을 부른 김재기였다. 이근형은 이후 신성우와 함께 팀을 이루어 많은 히트곡을 만들어내고 있었고, 주상균의 '블랙홀'은 80년대 메탈밴드 가운데 '블랙신드롬'과 더불어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전설로 남아 있다. 스스로를 잉베이 맘스틴에 비교했던 '디오니서스'의 속주기타리스트 배재범과, '스트레인저'의 임덕규 역시 3대 기타리스트와 비교되던 - 사람에 따라서는 이들을 진정한 3대기타리스트로 꼽기도 했던 고수들이었다.

바로 그 뒷세대로 거론되던 것이 방송에도 나왔던 신대철의 동생 신윤철, 이미 고등학교 시절 신윤철, 이현석 등과 3대 기타리스트로 거론되며 부활의 공연세션까지 했었던 손무현, 역시 고등학교 시절부터 이름을 날렸던 화려한 속주기타의 이현석, 해외파로 90년대 'NEXT'에서 기타를 쳤던 김세황이 있었다. 아마 김세황은 3대 기타리스트의 시대가 끝나고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을 것이다. 하나같이 나이는 어리지만 누구도 앞서 언급한 김도균, 신대철, 김태원 세 사람의 3대 기타리스트보다 못하다 단정해 말할 수 있는 최고의 기타리스트들이었다. 신윤철은 최근 '서울전자음악단'이라는 밴드를 결성해 최고의 음악과 연주를 들려주고 있다.

다시 말해 3대 기타리스트가 3대 기타리스트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당시 대한민국에서 가장 기타를 잘 치는 세 사람의 기타리스트여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필자도 이름을 알지 못하거나 기억하지 못하는 무수한 기타의 고수가 당시에도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단지 그 가운데서도 록씬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인지도가 높던 대표밴드 셋, 시나위와 부활과 백두산의 기타리스트라는 상징성이 그들에게 3대 기타리스트라는 영광된 이름을 선사했던 것이었다. 한 마디로 당시 가장 화제성 높았던 기타리스트 세 사람이라 하는 쪽이 옳았을 것이다. 최소한 이들 세 사람이 한 무대에 서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화제가 되었으니 말이다. 실제 실력도 앞서 언급한 모든 기타리스트들과 충분히 견줄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하기도 했었다.

그러고 보면 당시는 기타리스트의 시대였다. 특히 밴드음악에 경도되어 있던 또래들은 대부분 보컬보다는 오히려 보컬보다 앞에서 화려한 연주를 들려주던 기타리스트에 더 관심을 가지고 열광하는 경우가 많았다. 디스토션 걸린 격렬한 기타음과 모든 것을 찢어발길 듯한 파괴적인 속주는 당시 답답하기만 하던 또래들의 일상을 부수는 카타르시스 그 자체였다. 요즘 아이들이 모이면 아이돌의 춤을 따라하듯 그래서 교실에서도 빗자루 들고 전날 보았던 기타리스트의 퍼포먼스를 그대로 따라하고 했었는데. 그래서 누가 더 낫네 누가 더 못하네 실제 싸움까지 했더란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 같지 않았다. 필자 역시 신대철의 팬으로써 계집아이들이나 듣는 음악을 하는 '부활'이나 노땅들에 양아치스러운 '백두산'과 그 팬들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물론 그들의 음악도 함께 듣고는 있었다. 허세였다.

하지만 결국 그것은 소수 마니아들만의 문화였다. 밴드가 언더그라운드를 나와 보다 보편적인 대중을 상대하는 메인스트림으로 올라왔을 때 정작 대중들이 열광하고 환호하는 것은 다름아닌 밴드의 가장 앞에 있던 프론트맨 보컬들이었다. 사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정작 밴드서바이벌을 표방하고 있는 <TOP밴드>를 보면서도 사람들은 밴드의 보컬에 대한 호불호부터 이야기한다. 싱어송라이터에게 보컬이란 자신의 노래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고, 밴드에게 있어 보컬이란 역시 밴드의 음악을 대중에 전달하기 위한 매개일 뿐일텐데도, 다른 모든 부분은 무시한 채 '가창력'이라는 이름으로 보컬만을 판단하려 든다.

당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언더그라운드에서는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던 기타리스트들은 점차 보컬에 밀려 가려지기 시작했다. 특히 그 가운데서도 대중적인 지지가 가장 높았던 부활에서 그같은 역전현상이 제일 심했다. 언더그라운드에서는 감히 비교조차 되지 않던 김태원과 이승철이지만 주류무대로 올라왔을 때는 김태원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과도 같았다. 오죽하면 이승철을 연호하느라 김태원이 무대에 서는 것마저 막아서고 있었다 하겠는가.

그리고 짧은 전성기에 이은 긴 록씬의 침묵이 시작되었다. 백두산의 해체에는 해외진출을 염두에 두고 영어가사로 앨범을 만들었는데 그것을 이유로 공연과 방송을 금지시킨 당시 심의기관의 판단의 탓이 가장 컸었다. 결국 신곡을 내놓고도 공연도 방송도 할 수 없게 되자 실망한 김도균이 먼저 영국으로 도망치듯 떠나 버리고, 유현상 역시 일본으로 떠나면서 백두산은 사실상 해체되고 만다. <놀러와>에서 신대철이 이태원에서 그를 보았더라는 이야기는 백두산이 해체되고서도 이후 임재범 등과 '아시아나'라고 하는 일본에서조차 인정했던 최고의 밴드를 결성하여 활동을 시작하려는 찰라 음반의 실패와 멤버들의 탈퇴, 특히 임재범의 솔로데뷔로 좌절하고 이태원으로 돌아간 이후의 일일 것이다. 유현상 없이 나머지 멤버들과 백두산 3집을 내 보기도 했지만 현실은 그다지 여의치 않았다.

김태원의 경우는 토크쇼에 나와 많이 이야기했으니 새로울 것도 없다. 1집의 성공 이후 그가 주도권을 쥐고 내놓은 2집은 각종 차트를 휩쓸며 평론가들의 평가마저 좋았지만 이내 대마초사건으로 사법당국에 잡혀 들어가며 크나큰 위기를 맞게 된다. 정작 리더임에도 그 책임을 물어 자기가 만든 밴드 '부활'로부터도 쫓겨나 다시는 그 이름을 쓸 수 없게 되었고, 더구나 이승철의 성공에 자극받아 심기일전하여 내놓은 'GAME'의 앨범은 처참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승철 없는 김태원은 더 이상 이전의 김태원이 아니었던 것이다.

더 이상 김태원의 재기란 없다. 그런 평가가 돌기 시작할 때 그를 찾아와 그를 재기시키고 부활시켜준 것이 3집의 보컬 고 김재기였다. 하지만 이후로도 김재기가 그렇게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거의 매번 앨범마다 보컬을 바꾸며 보컬만을 보려 하는 대중들에 부활이라는 밴드를 알리기 위한 그의 싸움은 힘겨웠었다. 여전히 김태원을 비롯 다른 멤버들은 부활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었지만, 눈에 익고 귀에 익은 보컬이 떠나간 부활은 더 이상 부활이 아니었다. 10집 이후 12집까지, 그리고 장차 13집에서도 보컬로 남아 있을 현재의 보컬은 그래서 얼마나 고마운가. 하지만 정작 부활을 알릴 수 있게 된 지금도 기타리스트 김태원으로서보다는 예능인 국민할매 김태원으로서라는 것이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일 것이다.

필자는 신대철이 어디선가 인터뷰했던 말을 기억한다. 기타를 치는 것이 고통이었다. 아무리 기타를 연습하고 더 훌륭한 연주를 할 수 있게 되었어도 그러나 정작 기타를 들려줄 무대가 없다. 그럼에도 기타리스트이기에 기타를 놓을 수도 연습을 멈출 수도 없다. 기약이 없다는 것이,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 주는 고통과 공포란 차마 상상할 수조차 없는 것이다. 음반세션을 하며 자기가 친 기타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충격이 되어 결국 돈이 되던 음반세션까지 그만두었던 신대철이었는데. 차라리 아버지로부터 기타를 배울 것이 아니라 보컬을 배웠어야 했다는 그의 넋두리는 그가 겪은 절망과 좌절을 대변하고 있었을 것이다. 어디 가서도 기타리스트 신대철보다는 가수 신대철로 소개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한국에서 대중음악을 한다는 것은 노래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방위복무를 마치고 야심차게 내놓은 시나위 4집이 당시 보컬이던 김종서와 베이스 서태지의 탈퇴로 활동도 제대로 못해 본 채 묻혀 버리고, 아마 김태원이 신대철을 보았을 오랜 방황기간 끝에 손성훈이 오히려 앞장서서 재결성한 시나위 5집도 정작 손성훈이 밴드를 탈퇴하며 바로 새로운 보컬을 맞아들여야 했고, 그러고 보면 손성훈의 탈퇴 덕분에 5.5집부터 맞아들인 김바다는 신대철에게는 운명과도 같았을 것이다. 필자 역시 김바다가 보컬이던 시절의 시나위를 가장 좋아한다. 김바다의 보컬은 신대철의 기타와 가장 잘 어울리고 있었다. 다만 문제라면 결국 경제적인 이유로 팀을 계속 끌어가지 못했다는 것.

음반을 팔아도 인세를 받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저작권이라는 개념조차 희박한 채, 공연을 한다고 지금처럼 수익을 바라고 비싼 값에 티켓을 팔 수 있던 시절도 아니었다. 돈이 들어올 구멍이 없었다. 음반이 수십만장 팔렸어도 그 돈은 모두 음반사로 갈 뿐 밴드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솔로가수들처럼 밤무대를 뛸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밤무대에서는 밤무대에 어울리는 음악만을 요구했다. 송골매와 같은 소프트한 록도 밤무대에서는 그다지 환영하지 않는데 명색이 부활이나 시나위나 백두산이나 메탈밴드였다. 그나마 백두산의 경우는 유현상이 음반회사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니 사정이 조금은 나았을까?

90년대에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아 여전히 보컬 중심의 밴드만이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록이 상당히 대중적으로 주목받던 시기이기는 하지만 그 주목의 대상은 여전히 보컬이었고 밴드는 소외되어 있었다. YB와 자우림, 그리고 크라잉넛과 노브레인의 차이였다. 신성우는 아예 이근형과 팀을 이루어서도 신성우 개인의 이름으로 활동했고, 델리스파이스나 노이즈가든, 언니네이발관 등 실력있는 밴드들도 보컬이 주목받지 못하면 비주류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연주자가 스타가 되는 그런 밴드는 없었다. 보컬만 주목받거나, 아니면 누구도 주목받지 못하거나. 그럼에도 당시처럼 밴드를 알아보는 사람들은 밴드 자체를 보기는 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과연 지금에도 당시와도 같은 연주자가 스타가 되는 밴드가 가능할까?

연주자들이 주목받지 않으니 밴드가 뜨면 가장 먼저 보컬부터 이탈하고 만다. 보컬이 이탈하지 않는 밴드는 보컬이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는 밴드다. 보컬이 주목받지 못하면 밴드도 주목받지 못한다. 양날의 칼이다. 보컬이 주목받으며 대중들에 인지도가 높아지는 대신 팀이 깨질 것을 감수하느냐? 아니면 대중들에 인지도를 높이지 못하더라도 조금 부족한 보컬로 끝까지 갈 것이냐? 그래서 오죽하면 밴드 보컬은 조금 노래를 못 하는 쪽이 오래 간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다. 그리고 보컬만 주목받는 가운데 남겨진 다른 멤버들은. 더구나 3대 기타리스트란 언더그라운드에서 이미 스타였으며, 밴드를 이끌던 리더였다. 차라리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더라면 좌절도 없었으련만.

바로 그런 의미일 것이다. 3대 기타리스트란. 유일하게 연주자가 스타가 될 수 있었던 시대. 3대 베이스스트니 3대 그러머니 연주자에게도 서열을 매기며 팬덤이 형성되던 대한민국 대중음악사상 유일무이했던 그 시절. 대중과의 최선두에서 주목받고 인정받았던 단 세 사람의 스타 기타리스트. 지금에서도 3대 기타리스트란 이들 세 사람을 일컫는 이름인 이유일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살아남아 그들은 한국의 밴드음악을 지탱하고 있다. 부활은 27년을 그 자리를 지켜왔고, 시나위도 다시 기지개를 켜고 있으며, 백두산도 다시 재결성하여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바로 그런 것을 전설이라 부르는 것일 게다. 지금도 가장 영광된 자리에 있었어야 했음에도 여전히 소외되어 있는. 그럼에도 여전히 밴드와 음악을 놓지 않고 있는 그들이.

화려했던 시절만큼이나 처절했던 절망의 순간들도 있었기에. 아니 짧은 영광에 비해 그 좌절의 시간들은 너무나 길었다. 그래서 애잔하기도 했다. 누구보다 큰 명예와 영광을 누렸어야 했을 최고의 재능과 실력을 가지고서도 보컬에 가려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채 소외된 길을 걸어왔어야 했을 때. 더구나 연주마저 컴퓨터로 만드는 지금의 시대에 연주자가 설 저리는 더욱 좁아지고 있다. 트랜드는 바뀌었고 예전에도 그들은 주인공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더욱 그들이 주인공이 될 수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여전히 당당할 수 있는 것은 그들 자신과 자신의 음악과 그에 대한 자부심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다른 누구도 아닌 그들 자신이 그들 자신을 증명한다. 그것이 진정 3대 기타리스트라는 의미일 것이다.

아무튼 정말 반가웠던 것이 바로 이들이 필자의 어린시절 피를 끓게 만들던 필자의 아이돌들이었다는 것이었다. 시나위가 낫다, 부활이 낫다, 백두산은 형편없다, 김도균이 더 훌륭하다, 신대철이 더 훌륭하다, 김태원은 너무 딸린다, 그 시절 왁자하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린다. 그들이 있어 필자의 어린시절은 풍요로울 수 있었다. 아직도 당시 들었던 그들의 기타리프나 그들이 쓰고 연주한 노래들이 귓가에 들리고 있는 것 같다. 그들 자신 만큼이나 필자에게도 화려하던 시절이었다.

오래전부터 기대해 오고 있었다. 김태원이 처음 <놀러와>에 출연하면서부터, 어느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김도균과 신대철마저 예능으로 끌어내겠다고 말한 것을 읽던 그 순간부터, 그리고 세시봉특집에서 확신을 가졌다. 역시 3대기타리스트가 출연할만한 예능이라면 <놀러와> 정도가 적당하지 않겠는가. 그런 것치고는 세 사람의 연주를 많이 듣지 못한 것이 아쉬울 따름이지만. 역시 세시봉과는 달리 연주만으로는 분량을 채우기가 어려운 것일까? 마지막 세 사람의 연주도 많이 잘려서 내보낸 듯 싶었다. 역시 현실일 것이다. 사람들은 지금도 노래를 듣지 연주는 잘 듣지 않는다.

처음 김태원이 예능에 출연한다 했을 때 많이 놀랐었다. 비난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감사하고 있다. 김태원의 말처럼 김태원을 시작으로 김도균과 신대철마저 예능에 모습을 비추고 있다. 부활에 이어 시나위와 백두산마저 재조명되고 있다. 그 시절만은 못하더라도 아직 그들을 기억하고 있는 이들이 이렇게 많지 않은가. 그저 고마운 것이다. 방송에서마저 스스로 다리가 되고 문이 되어 다른 두 사람을 대중에 알리려는 그 노력들이. 그는 훌륭히 약속을 지키고 있었다. 감사할 따름이다.

참고로 어째서 이하늘이 신대철의 눈치를 보며 쩔쩔매고 있는가? 김태원이 처음 예능에 출연한다 했을 때 필자가 놀란 것이 바로 그 점이었다. 박완규가 농담처럼 말하지 않는가. 김태원은 악마라고. 필자가 들은 김태원의 성격이 그랬다. 확실히 첫녹화에 물병에 술을 담아온 것은 김태원답다 하겠지만. 심지어 케이블토크쇼에서는 술을 마시며 녹화를 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신대철도 그와 비교해 결코 떨어지는 성격이 아니라. 상당히 직설적이고 상대하기 어려운 성격의 사람이었다. 그러고 보면 세월의 사람의 성격을 둥글게 바꾸어 놓는다고나 할까? 지금의 국민할매 김태원이나 수줍은 신대철을 과연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어쨌거나 고마운 방송이었다. 추억을 되살렸고, 영웅들을 다시 볼 수 있었다. 물론 다른 프로그램을 통해서 이들 세 사람을 지금도 자주 볼 수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렇게 한 자리에 모여 그 시절을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란 것이 그리 쉬운가? 아쉬운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그 자체로 고마운 것이다. 역시 <놀러와>였다. 오랫동안 남을 것 같다. 아직까지도 즐겁고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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