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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5.01.23 09:22

'하이드 지킬, 나' 2회, "지킬과 하이드, 구서진과 로빈은 둘이 아니다"

욕망에 가려진 인간의 선한 본성에 대한 바람

▲ SBS '하이드 지킬, 나' 포스터 ⓒSBS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1886년 출간된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소설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는 엄격한 도덕률이 지배하던 빅토리아시대 영국사회의 위선과 모순을 신랄하게 비판한 작품이었다. 겉으로는 근엄한 신사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뒤로는 오로지 탐욕과 쾌락만을 쫓는 추악과 타락을 감추고 있다. 어쩌면 '하이드'라고 하는 억압된 또다른 인격이야 말로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저명한 명사 '지킬박사'의 진실한 모습은 아니었을까. 그것이 바로 인간의 진정한 본성은 아니었을까. 잠시의 방심만으로도 어느새 하이드는 지킬박사 자신이 되어 버린다.

주인공 구서진(현빈 분)은 많은 사람들이 믿고 싶어하는 몰인격의 재벌가 후계자의 모습을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을 것이다. 자기 이외의 모든 사람을 단지 수단으로, 대상으로만 본다. 자신이 관리하는 테마파크 원더랜드에서 판매하는 풍선과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 전혀 어떤 차이도 느끼지 못한다. 자신의 권한 아래 있으므로 금지하고 싶으면 금지하고, 내쫓고 싶으면 내쫓을 뿐이다. 차라리 싫거나 미워서 내쫓는다면 그나마 인간적이다. 아무런 감정도 내비치지 않는다. 사과하라고 하니 기꺼이 사과도 해준다. 말 그대로 그냥이다. 내게 불편하고 불필요하니 이만 계약을 끝내겠다. 위약금도 지불하겠다. 하기는 구서진 자신 역시 아버지 구명한(이덕화 분) 앞에서는 또다른 수단이고 대상일 뿐이었다. 아버지와 아들이 아닌 기업의 지분과 경영권을 물려주고 물려받을 관계로서만 서로를 대한다.

욕망이 지배하고 자본이 지배한다. 구서진이 보이는 말이나 행동들은 그에게 주어지고 그가 누리고 있는 것들을 고려했을 때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것들일 수 있다. 실제 현실에서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은, 어쩌면 그 이상의 사례들도 심심치 않게 보도되고 있기도 하다. 욕망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개인이란 단지 욕망의 단위다. 자본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개인의 가치란 자본의 유무에 따라 결정된다. 그런 현실을 외면한 채 무모하게 구서진에게 덤벼드는 장하나(한지민 분)의 캐릭터는 그래서 그 자체로 판타지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구희애(신은정 분)가 실종된 당시 현장을 목격한 유일한 증인이 되기 전까지 장하나는 구서진에게 다가가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대화조차 나눌 수 없었다. 그런데 그 구서진에게 다른 인격이 있고, 심지어 원래의 구서진과는 전혀 다른 말과 행동들을 보인다.

지킬박사가 현실의 위선을 상징한다면 구서진은 현실의 위악을 대변한다. 구서진이 원래 나쁜 사람이어서 그같은 못된 행동들을 보이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단정하다. 태연히 다른 사람에게 상처주고 피해까지 입히면서도 그 행동 만큼은 냉정하고 침착하기 이를 데 없다. 어떤 악의가 있어서가 아니다. 다른 감춰진 계산이나 의도가 있어서 그리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자기에게 주어진 권리를 당연하게 행사하려는 것 뿐이다. 그것은 구서진의 잘못이라기보다 단지 자라온 환경과 주어진 조건들이 전혀 다르기 때문인 것이다. 구서진은 장하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장하나 역시 구서진을 이해하지 못한다. 악의는 없지만 단지 그럴만한 힘이 주어져 있기에 어떤 사람에게는 악행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구서진의 숨겨진 진짜 본모습은 어떤 것일까? 구희애가 실종되기 전 남긴 녹음이 단서가 된다.

어떤 사회에서는 악인에게도 선인의 가면을 쓰게 만든다. 그리고 어떤 사회에서는 거꾸로 선인에게도 악인의 가면을 쓰도록 만든다. 정확히 선인이 아니다. 악인이 아니다. 단지 본성과는 별개로 사회가 요구하는 또다른 자신의 모습이라 여기는 쪽이 옳을 것이다. 아버지 구명한의 입장에서 오히려 구서진이 정상이고 그의 또다른 인격 로빈은 비정상이다. 구서진이 옳고 로빈은 틀렸다. 구서진이 선택해야 하는 자신이었다. 구서진의 사촌형 류승연(한상진 분)이 보여주는 위선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선인으로서의 자신의 모습이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단지 수단에 불과하다. 서로 보여주고자 하는 대상이 다르다.

엄숙한 도덕률이 지배하는 사회이기에 그와 마주보고 있는 탐욕과 쾌락이야 말로 감춰진 진실한 모습일 수 있다. 욕망이 지배하는 사회라면 거꾸로 선과 정의, 도덕과 마주보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야 말로 가려진 자신의 참모습이다. 그래서 경고하려 한다. 그럼에도 믿고 싶어한다. 욕망에 굴복하지 말기를. 인간은 원래 선하다는 사실을. 거울은 항상 사물을 반대로 비춘다. 마치 그 거울처럼. 구서진과 로빈은 둘이 아니다. 구서진과 장하나가 사는 세상은 하나의 세상이다. 무엇이 그들을 구분짓도록 하는가.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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