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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1.09.19 07:37

남자의 자격 "어른의 눈물, 아이의 눈물, 그리고 노래와 파운드케익..."

아이의 잘못은 어른의 책임이다.

 

필자의 경우 인간이 저지르는 죄에 대해 관심이 많다. 죄란 악에서 비롯되는가? 아니면 어떤 다른 필연에 의해 존재하는가? 다시 말해 사람이 악해서 죄를 저지르는가? 아니면 세상이 그로 하여금 죄를 저지르게 만드는가? 한 마디로 어째서 인간은 죄를 저지르고 마는 것인가?

물론 그 답을 단정지어 내리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그리 쉬운 문제라면 종교는 어째서 생겨났고 철학이란 왜 있는 것이겠는가? 문학과 미술, 음악, 모든 예술이 추구하는 바도 궁극적으로 그에 대한 답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나와 남의 관계. 나와 주위의 유기적 구조. 혹은 구성.

다만 한 가지 그나마 분명한 답은 있다. 아이가 저지르는 죄는 바로 어른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 지능을 갖는 동물만의 특징이다. 아니 그래서 그것을 지능이라 부르는 것이다. 학습능력. 지능이 낮은 동물은 전적으로 본능에 의지해 살아가지만 지능이 높은 동물은 본능보다 학습에 더 많은 지배를 받으며 살아간다. 심지어 너무나 당연한 본능으로 여겨지는 모성본능조차 부모로부터 배우지 않으면 갖추지 못하는 경우마저 있을 정도다. 다른 동물의 예를 들 것도 없이 사람도 그렇다.

만일 인간의 본성이 본능과 같은 것이라면, 그렇다면 결국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는 것 역시 인간이 보고 듣고 배우고 익혀 온 학습한 바에 지배되어지는 바가 더 클 것이다. 그러면 그러한 학습은 누구를 통해 이루어지는가? 아이를 어른의 거울이라 부르는 이유다. 아이는 어른을 보고, 어른이 하는 것을 그대로 모방하며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방식을 배우게 된다. 그렇게 어른을 통해 장차 어른이 되어 살아가는 방법을 학습함으로써 아이는 한 사람의 당당한 어른이 되는 것이다.

그냥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다. 나이를 먹고 덩치가 커지면 개나 고양이가 그러하듯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자연스럽게 알아가게 되는 것이 아니다. 배워야 한다. 익혀야 한다. 그래야 번듯한 한 사람의 어른으로써 자기 몫을 할 수 있다. 그런데 만일 아이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다고 한다면 그 책임을 누구에게 돌려야 하겠는가? 실수가 아닌 잘못이다. 어른에게는 아이가 올바로 어른이 될 수 있도록 보살피고 가르치고 훈련시킬 책임과 의무가 있다.

소년범죄에 대해 개인의 일탈보다는 사회적 책임에 더 무게를 두는 시각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다. 어른은 어찌되었거나 이미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는 완성된 인격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아직 더 한 사람의 어른이 되기 위해 배우고 익혀야 하는 보호받아야 하는 대상이다. 그런 아이들이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 아이들을 그렇게 내몬 어른들의 탓이다. 대부분은 자기를 보호할 능력조차 없는 사회적으로 보면 한참 약자들이다. 아무리 또래들 사이에서 힘을 주고 위세를 부려도 정작 어른들의 세계로 나오게 되면 어디 가서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는 약자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더욱 아이들은 사소한 것을 위해 자기를 내던지고 망가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무엇이 더 중요하며 무엇을 더 소중히 지켜야 하는가를 가르쳐주는 것도 역시 어른의 몫이다.

물론 그럼에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무거운 범죄라는 것도 있다. 다시 돌이키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가 버린 경우다. 그런 때는 소년교도소로 보내진다. 소년교도소란 이미 이 아이를 이 사회의 규범질서로부터 벗어난 존재로써 격리시켜 교화시키는 곳이다. 그에 비하면 소년원은 - <남자의 자격>에서 나온 서울소년원(고봉중고등학교)는 아직은 그래도 가능성이 남아 있는 아이들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는 마지막 어른의 책임을 다 하는 장소라 할 수 있다. 아직까지는 어른들이 책임을 다하여 이 아이들을 올바로 가르치고 이끌 수 있다.

사실 소년교도소도 어쩌면 우리 사회의 어른들이 그동안 저질러 온 무책임과 무관심, 방치와 학대의 증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년원은 그보다 더욱 당연히 누려야 할 것들을 누리지 못했기에 정상적인 사회구성원으로써 자라나지 못한 또다른 죄의 증거일 것이다. 분명 죄를 짓고 죗값을 치르고 있는 중일 터임에도 그 아이들을 보는 어른들의 눈가에 촉촉히 눈물이 젖어드는 것은 그같은 같은 어른으로써의 깊은 죄의식과 또한 부모로써의 당연한 연민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굳이 청춘합창단만이 아니라 프로그램을 보는 시청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경우 사람의 죄는 증오스럽기보다는 애닲고 안타깝다. 아이들이 저지르는 죄의 경우가 그렇다.

그래서 더 의미깊었던 미션이었을 것이다. 어른들은 자신들이 지키지 못한 아이들을 보았다. 아이들은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어른을 느낄 수 있었다. 늙어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가지고도 자신들을 위해 정성껏 노래를 불러주는 어른들의 모습이란 아이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심지어 어른들은 자신들을 위해 최신 아이돌 노래까지 애써 연습해 불러주고 있었다. 어느새 흥겹게 따라부르는 아이들의 목소리와 몸짓에는 더 이상 거리란 느껴지지 않았다.

말은 필요없었을 것이다. 사랑한다. 믿는다. 올바로 살아라. 다시는 그런 잘못을, 실수를 저지르지 말거라. 그보다는 그 아이들을 위해 정성껏 마음을 담아 불러주는 노래로 족했을 것이다. 물론 모든 아이들에게 그 진심이 전달되지는 못했을 테지만, 그러나 다만 몇 명이라도 그 노래로부터 진심을 전해 듣고 비로소 어른을 느낄 수 있다면.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걱정하는, 자신을 보듬고 감싸주는 어른의 존재를 깨달을 수 있다면. 그래서 그런 어른으로 자라날 수 있다면.

아이들이 불러주는 답가에서. 그리고 정성들여 준비한 파운드케잌 선물과 편지를 통해서. 한 순간만이라도 그 아이들이 혼자가 아니고 외롭지 않으며 의지할 어른이 있음을 깨닫고 감사할 수 있었다면. 그 마음이 진실로 소년원을 나가 사회로 복귀할 때까지 이어질 수 있다면. 어른이 할 몫을 비로소 다 하는 것일 게다. 아이들을 위해 진심으로 눈물을 흘려주고, 손을 잡아주고, 안아주고, 웃어주고, 노래를 불러줌으로써. 그 진심이 전해졌다고 믿고 싶다.

정말 의외의 한 방이었다. 그저 합창단 미션으로 끝날 것이라 생각했다. 솔직히 조금 지나치다는 생각도 있다. <남자의 자격>만의 원래의 소소한 재미는 어디로 갔는가. <남자의 자격>의 "청춘합창단"인지 "청춘합창단"의 <남자의 자격>인지 주객이 전도된 느낌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멋지지 않은가 말이다. 그야말로 "청춘합창단"이기에 가능했던 미션이었을 것이다.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이 아니다. 조금 나이 많은 작년의 형뻘의 연예인들도 아니었다. 어쩌면 부모란 아이들에게 무섭기도 한 존재이기에, 그러나 할머니 할아버지란 누구에게나 그리운 이름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세상에 가장 그립고 가장 미안한 이름이 할머니 할아버지다. 마음놓고 응석부리고 말썽도 부려 볼 수 있는 포근한 의지처로써. 누군가는 아직 부모뻘이었을 테지만, 할머니 할아버지가 불러주는 노래였기에 더 의미가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또한 "청춘합창단" 멤버들 자신에게도 자신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을 것이다.

늙어서 서러운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서럽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서러운 것이 아니라 필요로 하는 곳이 없어서 서럽다. 그리 그분들의 음악을 소중히 듣고 감사하며 눈물을 흘려주는 아이들이 있지 않은가. 정성들여 노래를 준비하고, 정성들여 케잌 선물을 준비했다. 보람이란 이런 것일까? 비로소 청춘의 의미를 깨닫는다. 청춘이 청춘을 만나다. 청춘으로써 청춘을 되돌린다.

무거운 주제였다. 소년원이라니. 예능에서 다루기 힘든 주제였을 것이다. 아직 지난날 한 순간의 잘못이 낙인처럼 이후의 모든 삶을 정의하는 엄격한 한국사회에서. 죄를 저지르고 죄값을 치르는데 그를 동정하고 위로하다니. 안쓰러워하며 눈물을 흘리다니. 그것을 주말 황금시간대 모든 가족이 모여 보는 예능프로그램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부담이 작지 않았을 텐데. 그럼에도 그것을 밀어붙일 수 있었던 뚝심에 새삼 감탄한다. 어쩌면 다음주예고로 나간 군부대와 바꾼 것은 아닐런지.

그래서 한 가지 아쉬움으로 남는 것이다. 한 번이면 족했을 것을. 아니면 더 소외된 다른 이들을 찾아보는 것도 좋았을 것이다. 비슷한 또래지만 운이 따르지 않아 불우한 말년을 보내는 다른 노인들이거나, 혹은 다른 소외된 이들을 찾아 그들과 교감하는 모습도 좋았을 것이다. 하기는 결국은 그 분들도 자식을 군대보냈거나 보낸, 혹은 보내야 하는 부모일 테니까. 그래도 군부대 방문이라는 자체가 너무 식상한 소재인데다 나올만한 그림이 한정되어 있다 보니 우려가 생기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일단은 믿음을 가져보면서.

그리고 무엇보다, 것보라. 아이돌 노래 익혀두니 좋지 않은가? 합창곡 "사랑이라는 이름을 더하여"는 분명 눈물을 흘리게는 할 수 있었지만 아이들과 교감하는데는 그다지 어울리는 노래가 아니었다. 아이들이 기꺼워 따라 부르고 몸동작도 따라 하던 것은 바로 아이들 노래였다. 손주뻘이고 자식뻘이다. 단지 같은 노래를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세대의 벽은 한 순간에 무너져 버린다.

재미있다는 말로 족할까? 감동받았다는 말로도 부족할 것이다. 이것을 무엇이라 표현해야 할까? 희열? 다시 써먹게 된다. 사무사思無邪. 생각함에 삿됨이 없다. 그 순수와 진심에 대해서. 진심보다 더 훌륭한 음악성은 없다.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은 결국 진심일 것이다. 말을 잊게 만든다. 최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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