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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1.09.15 08:13

공주의 남자 "마침내 등장한 사육신, 예고된 비극에 극적 긴장은 고조된다!"

결말을 이미 알고 보는 역사드라마란 그 자체로 잔인한 것이다.

 
솔직히 보고 싶지 않았다. 여전히 세령(문채원 분)과 김승유(박시후 분)의 일이 어떻게 되는가 궁금하고 보고도 싶었지만 하필 성삼문이라는 이름을 보고 만 탓에. 김승유의 스승이 사육신의 한 사람인 이개(엄효섭 분)였다. 이개 또한 물론 삼족이 멸하여 후손이 없다.

역사란 과연 정의로운가? 사실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한 번 쯤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때로 역사에 너무 관심이 많아 정의라는 자체에 회의적인 경우도 나타나게 된다. 결국 자신의 군주를 지키고자 했던 성삼문은 그 일족마저 갓난아이조차 하나 남김없이 멸족당하고 말았고, 문종의 고명까지 들었음에도 오히려 단종을 죽이라 강하게 주장하던 신숙주는 온갖 영화를 누리고 그 후손마저 번창해 있다. 원래 세종이나 문종이나 아끼기로는 성삼문보다 신숙주를 아끼고 귀하게 대우하고 있었다.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 성삼문의 형제들인 성삼빙, 삼고, 삼성, 아들인 맹첨, 맹년, 맹종, 심지어 죽은 할아버지의 묘까지 파헤쳐지고, 그 아내 차산과 딸 효옥은 공신인 박종우의 집에 노비로 가게 되었다. 성종 때 잠시 풀려났다가 다시 박종우의 노비로 끌려가는 수모를 겪게 되었으니 죽으러 가는 아비를 울며 쫓아갔더라는 어린 딸 효옥은 이후 아무런 전하는 바가 없다. 그나마 출가한 딸은 연좌하지 않는 탓에 박경림에게 출가한 첫째딸에게서 낳은 외손 박호가 이후 성삼문의 제사를 지금껏 모셔오고 있을 뿐이었다. 둘째딸이 낳은 아들인 엄찬은 역시 후손이 없어 절손되고 말았다. 신숙주와 그 후손들이 누렸던 영화에 비한다면 충신의 말로로써는 너무 비참하지 않은가 말이다. 하긴 외손도 후손은 후손일 것이다.

유성원은 마침내 김질의 밀고로 거사가 발각되자 아내와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끓었고, 박팽년은 참혹한 고문을 받다가 옥중에서 자결하고 말았다. 그리고 끝까지 살아남았던 이들은 죽은 이들과 함께 거열형이라는 조선사회에서 행해지던 가장 참혹한 형벌을 받았다. 거열형이란 따로 능지처참이라고도 불리우는, 죄인의 몸을 각각 다섯 대의 수레에 나누어 묶어 다른 방향으로 끌게 함으로써 사지를 찢어 죽이는 말하기조차 끔찍한 형벌이다. 경혜공주(홍수현 분)의 남편인 정종(이민우 분)역시 그렇게 거열형으로 죽임을 당하게 된다. 그러고 보니 유성원의 일족인 유자미가 성삼문의 아들 맹년의 딸을 거두어 며느리로 삼았고, 박팽년의 둘째며느리가 임신하고 있던 아이가 여종의 기지로 살아남아 성종 때 일산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과연 동문수학한 고우 김승유와 그 일가족을 죽음으로 내몬 바 있는 신면(송종호 분)에게 스승 이개와 남은 한 친구 정종의 죽음은 어떤 의미로 다가올 것인가? 이제야 비로소 신면은 자신이 내린 선택의 결과를 자신의 영혼으로 체험하게 될 것이다. 김승유의 죽음이야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 스스로 자위할 수 있을 테지만, 왕위에서 쫓겨난 어린 왕의 목숨과 스승과 친구의 죽음마저 지켜보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을 때, 아니 지켜보는 정도가 아닌 그들을 스스로 죽음으로 내몰지 않으면 안 된다. 아버지와 가문을 위한다는, 그같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변명으로도 그것은 어떻게 가리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신면 또한 아버지를 닮아가게 될 것인가? 조선왕조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명재상 가운데 한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사관은 신숙주가 죽었을 때 그가 그다지 공정하지도 정의롭지도 못했다 기록하고 있었다. 뛰어난 능력 만큼 욕심도 컸던 때문이었다. 그러니 고명까지 받았으면서도 쫓겨난 어린 왕을 죽이라 세조에게 건의할 수 있었던 것일 것이다. 하긴 그나마 신면은 그가 그토록 바랐던 보상인 세령과의 결혼을 세령 자신으로부터 거부당하고 있었다.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는데 무엇 하나 얻지 못했다. 분노할 것인가? 아니면 회의할 것인가? 위악하려는가? 다시금 위선하려는가? 신면이 가련한 이유일 것이다. 그는 아버지 신숙주만큼 뻔뻔하지도 못하고, 친구 정종처럼 의기롭지도 못하다. 경계에 있는 가련한 영혼일 것이다.

사실 신숙주가 재상으로써 뛰어났다고 하는 것도 당시 세조 이후 성종까지의 조선의 내정과 크게 상관이 있었다. 한 마디로 다 죽여버렸다. 세종과 문종이 길러낸 당상관 이상의 관리들을 정인지를 비롯한 몇몇을 제외하고는 다 죽여 버렸다. 집현전 또한 신숙주를 포함, 정인지, 최항 등 몇몇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죽이거나 쫓아내 버렸다. 그렇다고 세조(김영철 분)의 측근에 있던 공신이라고 해봐야 한명회 말고는 권람이야 제 잇속이나 챙기는 무리였고, 홍윤성은 그야말로 무뢰배에 불과했으며, 양정은 세조에게 죽임을 당하고 있었다. 정인지는 늙었고, 그나마 정창손이 올곧았으나 그리 능력이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드라마에서도 오히려 청풍관 시절보다도 휑한 어전의 모습을 통해서 당시 세조 주위의 인재의 고갈을 묘사하고 있었다. 오죽하면 칠갑이나 막손 같은 무뢰배들에게까지 벼슬을 내리고 있었겠는가.

쓸만한 인재는 다 죽였으니 남은 신숙주와 한명회가 발벗고 나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세조와 문종이 길러낸 모든 인재를 죽여 버렸으니 이제 남은 신숙주와 한명회가 당면한 많은 문제들을 주도해 해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한 사람의 뛰어난 인재란 다른 말로 하면 그만큼 한 사람이 많은 일을 도맡아야 했을 정도로 인재가 없었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그 댓가로 한명회와 신숙주는 왕조차 함부로 할 수 없는 절대권력을 손에 넣게 된다. 직계혈손이라고는 남아 있지 않은 성삼문에 비해 얼마나 잘 풀린 인생인가? 셋째아들이 관인을 위조하다가 걸려서 그 처와 자식이 노비로 전락한 바 있다지만 그래도 그는 자신이 선택한 데 따른 보상을 받았다. 과연 신면도 그리 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몰랐으면 성공이라도 기원해주련만. 기왕에 역사대로 가지 않을 것 이번 한 번만 눈 딱 감고 세조와 그 무리들을 몰아내는 것으로 드라마에서라도 대리만족을 주면 좋지 않을까? 다행인 것은 그나마 이개를 제외하고는 사육신 대부분이 이번이 첫출연이라는 점일 것이다. 이입할 틈도 없이 죽어나가니 그것은 참으로 다행이라 할 수 있다. 그래도 역사를 알기에 저 비장한 충의가 처참한 최후로 이어지리라는 것에 도저히 집중해 보기가 힘들다. 몇 번이고 채널을 돌리려 했는지. 옳은 의기란 항상 그렇게 고난을 겪는 것인가.

참고로 성삼문의 할아버지 성달생이 성삼문이 태어났을 때 그에 대해 점을 쳐보았었다 한다. 그랬더니 나온 괘가 '충신'. 그 순간 성달생은 탄식하고 말았다.

"집안을 망칠 아이로구나."

역사상 좋은 뜻으로 좋은 일을 하고도 좋은 결말을 맞은 경우만 있다면야 무슨 문제가 있겠냐만. 당태종과 마주한 자리에서도 위징은 자신을 충신이 되게 하지 말고 능신이 되록 해달라고 말하고 있었다. 충신은 자신은 물론 주위마저 파멸하여 이름만 겨우 남게 되지만, 능신은 자기 몸도 편하고 주위도 행복하다. 그렇다고 불의한 찬탈이 벌어지고 있는데 선비 가운데 목숨을 걸고 그것을 바로잡으려는 이가 하나 없다면 그것도 슬픈 일 아니겠는가?

다만 드라마에서 한 가지 간과하고 지나간 것은, 정작 계유정난이 일어나고 수양대군이 정권을 잡았을 때 성삼문 등이 수양대군의 정난을 지지하는 상소를 올리고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양평대군의 아들 의춘군을 죽이라 한 것도 바로 성삼문이었다. 유사의 입장에서 어차피 황보인이나 김종서나 왕을 등에 업으려는 권신에 불과했을 테니 기왕에 정난이 일어난 것 수양대군에게 힘을 실어줌으로써 정국을 안정시키고 그로 하여금 주공의 예를 따르도록 유도하는 것이 최선이었던 때문이었다. 하긴 결국 수양대군이라는 공동의 적을 앞에 두고서 그같은 지난 이야기가 무슨 상관이겠냐만. 그러나 쉽지 않은 문제다.

아무튼 역사와는 별개로 김승유와 세령은 잘 풀려가고 있다. 비로소 솔직해질 수 있었다. 김승유가 담담히 세령에게 다시는 만나지 말자 말할 수 있었던 이유다. 비로소 김승유는 세령을 용서할 수 있는 이유를 찾아냈다. 더 이상 세령을 미워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 하나를 겨우 찾아낼 수 있었다. 아강이가 살아 있다. 형수가 살아 있다. 세령 때문이라 한다. 아강이와 형수가 살아 있는 것도 기쁘지만 그보다는 세령을 더 이상 미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기쁘다.

그래서 담담히 이별을 말할 수 있다. 미워서 헤어지는 것이 아니다. 원망하여 그녀를 내치려는 것이 아니다. 현실을 이야기하고자 함이다. 아무리 서로에 대한 마음이 진실된 것이고 간절한 것이라 할지라도 단지 그 진심만으로 모든 것이 허락되는 것은 아님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라는 것도 존재하는 것이다. 사랑하지만 현실이 그러하니 이대로 영영 헤어져 가슴아프게 다시 만나지 말자. 아강이와 형수를 만나러 가면서 달리는 말등에서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면서도 끝내 손을 내밀지 못했던 것처럼. 세령의 바람은 너무나 달콤하지만 김승유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김승유는 피의 복수를 그만둔다. 칠갑과 막손을 죽이는 것을 끝으로 비로소 이성이 돌아온 듯 형수와 스승 이개의 조언을 들어 성삼문 등과 정종의 거사에 동참하기로 한다. 들끓던 격정이 이제야 잔잔한 바다로 바뀌었다. 비좁게 끓어오르던 정념이 어느새 잔잔해지며 너른 세상과 만나게 되었다. 원래의 수양대군조차 탐내던 문무겸전의 김승유 그대로다. 결국 김승유의 이성을 가리고 있던 것은 세령에 대한 사랑과 그럼에도 그녀를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현실에 대한 원망과 증오였던 셈이다. 받아들이고 나니 편하다.

그런 점에서 조석주(김뢰하 분)는 김승유 자신조차 알지 못하는 그의 진심을 비춰주는 거울이라 할 수 있다. 조석주와 함께 하는 빙옥관은 김승유 자신이 놓인 현실이다. 아니 정확히는 김승유의 꿈일 것이다. 이미 죽어 사라진, 실체조차 얺는 허구의 김승유가 머무는 꿈의 자리. 그래서 조석주는 김승유의 속내를 정확히 꿰뚫고 마치 형제처럼 그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이 없는 것은 그것이 바로 꿈이니까. 그러나 언제고 김승유는 꿈에서 깨고 말리라. 조석주는 어떻게 바뀌게 될까?

긴장이 고조된다. 이미 비극은 오래전부터 예고되어 있다. 성삼문의 후손이 지금 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 역사적 사실을 드라마라고 뒤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비록 온녕군과 함귀는 그런 식으로 죽일 수 있었을 테지만, 그러나 세조의 찬탈과 이후 조선의 왕조가 그의 후손에 의해 이어지게 된다는 사실까지 손을 댈 수는 없는 것이다. 김승유의 세조에 대한 원한 또한 그렇게 역사에 기록된 대로 흘러가리라. 그러나 그러한 관찰자의 입장과는 상관없이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비장함과 절박함은 어찌할 것인가? 다가올 운명도 모른 채 품은 의기를 이루고자 목숨을 걸고 있는 저들은? 그리고 그들에 다가가고 있는 검은 암운은?

아마도 <공주의 남자> 가운데 가장 애잔한 명장면이었을 것이다. 불과 얼마 지나지 않은 오래전을 회상하며 경혜공주를 대신해 공주가 되어가던 세령 앞에 이개가 강론을 맡아 마주하게 된다. 서로 같은 공간에서 마주하고 있으되 그러나 정작 그들이 보는 것은 서로가 아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도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은 오래전 그 자리에 있었던 김승유다. 그리 오래지 않음에도 너무 오랜 시간이 흐른 것처럼. 그리움이란, 정이란, 사랑이란, 그렇게 그 빈 자리에서 더욱 깊이 간절히 느끼게 되는 까닭이다.

드디어 세령도 아버지 세조를 죽이려는 김승유 등의 모의를 알게 되고, 그러나 아버지와 사랑하는 정인, 나아가 아버지에 대한 혈육의 정과 불의한 찬탈을 바로 돌려놓겠다는 대의와의 경계에서 그녀는 다시 혼란스러워한다. 그리 굳게 다짐하고 마음을 다져 먹었건만 그녀 앞에 놓인 운명은 잔혹하기만 하다.

하기는 어디 세령 뿐일까? 김승유도, 정종도, 경혜공주도, 그리고 결코 함께 할 수 없는 신면 역시. 이개의 말처럼 결국 어른들이 잘못한 탓이다. 어른들의 탐욕이 젊은이들의 운명까지 갈라놓는다. 단지 사랑하고 사랑하고 있을 뿐이건만. 사랑하고자 할 뿐이건만. 단지 살려 할 뿐이건만 세상은 그러도록 내버려 놓아 두지 않는다. 세상 모든 비극의 이유일 것이다. 인간이 슬픈 이유다.

참으로 잔인한 것이다. 비극으로 끝날 것을 안다. 결말을 바꾸지 못하리라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희망을 갖는다. 본능인 까닭이다. 행복해지고자 하는. 행복함을 믿고 싶다. 모두가 행복하게 웃을 수 있음을. 그럴 수 없음을 알면서도. 미망이라는 것일 게다. 보고 싶지 않은 이유다. 보아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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