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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1.09.09 15:16

보스를 지켜라 "약점, 악역이 없다. 드라마가 없다."

'보스를 지켜라'의 장점이자 치명적인 한계에 대해서...

 
어쩌면 필자가 감탄하며 칭찬한 그 부분이야 말로 이 드라마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인지도 모르겠다. 보는 당시는 재미있다. 재미있어 눈을 뗄 수 없다. 그러나 정작 드라마가 끝았을 때 다시 보고 싶은가 하면 전혀 그런 것은 없다. 딱 보는 그 순간만 재미있다.

드라마란 결국 비극인 때문이다. 연속극은 그 그렇다. 아쉬움을 남겨야 한다. 미련을 남겨야 한다. 내일, 다음주, 그리고 마지막 회까지. 끊임없이 궁금하게 만들고 안타깝게 만들어야 한다. 어찌하나. 어떻게 될 것인가. 코미디라 해서 예외는 아니다. 찰리 채플린이 말하지 않았던가. 가까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 떨어져서 보면 희극이다. 둘은 금본적으로 같다.

처음 차지헌(지성 분)이 공황장애라 할 때 그 부분이 마음이 갔다. 사촌인 차무원(김재중 분)에게 항상 비교당하면서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는 분위기라 더욱 그랬다. 노은설(최강희 분)을 사랑하게 되고서는 과연 그 사랑이 이루어질 것인가. 아버지 차봉만 회장(박영규 분)이 눈물까지 흘려가며 안타까워했기에 또 그것이 궁금했다. 하지만 그 뿐. 너무 쉽게 모든 것이 풀리지 않았는가.

공황장애는 별 어려움 없이 극복하는 것 같고. 아니 그 자체가 크게 장애가 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초반 잠깐만 곤란해 하는 장면이 나왔고 이후로는 노은설과의 공황장애를 극복해가는 내용이 주다. 차봉만 회장의 반대 역시 오히려 차지헌의 공황장애가 이유가 되어 너무나 쉽게 넘어가고 있었고. 이제는 아예 차봉만 회장이 옷도 사주고 차지헌에 어울리도록 교육도 시키지 않는가.

결국은 차지헌과 노은설, 나아가 차무원과 서나윤(왕지혜 분)에 대해서도 그들을 곤란한 상황에 빠뜨리는 주체가 존재하지 않은 때문이다. 한 마디로 악역이 없다. 처음에는 차무원이 차지헌과 노은설 사이에 악역으로 존재하려는 줄 알았다. 서나윤 역시 딱 차지헌과 노은설 사이에서 훼방놓는 악녀로써 딱이었다. 그렇다고 신숙희(차화연 분)나 황관장(김청 분)이 그런 역할인가 하면 이들은 또 차무원과 서나윤에게 약점이 잡혀 있다. 노은설의 말마따나 덕분에 그들은 갑을 가운데 을의 위치에 있다. 차무원은 생각보다 순수했고 서나윤도 그저 마냥 사랑스러운 아가씨였다.

즉 공황장애가 있어도 처음 도입부에서 차무원이 그랬던 것처럼 그것을 이용하려는 사람이 없으면 그저 공황장애 극복기만 이어질 뿐이다. 차무원이나 서나윤이 삼각관계, 나아가 사각관계에서 전혀 아무런 악의도 집착도 보이지 않는다면 일방적인 실연에 위로받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서나윤의 실연이나 차무원의 실연이나 그래서 딱 차이고 위로받는 그 순간까지만 의미가 있었다. 혹시나 노은설에 대한 미련으로 차지헌과 적대하지는 않을까. 차무원이 차인 것으로 서나윤이 노은설에 시비를 걸어 보지만 전혀 아무런 악의가 느껴지지 않는 그같은 심술은 그저 귀여울 뿐이다. 보면 귀엽고 재미있다. 단, 그 다음이 궁금하지는 않다.

너무 해맑다. 너무 순수하다. 모두가 너무 착하다. 악역이어야 할 차봉만, 신숙희, 황관장마저도 때로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천진한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보는 당시는 좋다. 하지만 그로 인한 비극적 상황이 벌어지지 않으니 드라마가 끝나도 아쉬움이나 안타까움 같은 것은 없다.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어떤 반전이 이루어질 것인가. 여기에서는 이렇게 되지 않을까. 상상이 곧 기대다. 그리고 기다림이다. 그저 오는대로 맞이하여 즐길 뿐이다.

한 바탕의 코미디일까? <개그콘서트>의 경우 각 코너를 기대하며 기다려 보지는 않는다. 각 코너는 독립되어 있고 단절되어 있다. 그냥 맞이하면 웃는 것이다. 그 웃음을 기대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간절하지는 않다. 보지 못해서 지나가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물론 그럼에도 시청률은 높다. <보스를 지켜라>도 <공주의 남자>에 밀려서 그렇지 시청률 자체는 낮은 편이 아니다. 그러나 그 위로 치고 올라가는 데 있어서는 한계가 있지 않은가.

드라마의 가장 큰 재미라면 캐릭터 보는 재미있을 것이다. 차봉만 회장의 엉뚱과격함이나, 서나윤의 마치 아이와도 같이 천연스러운 모습이라든가, 서로 만나면 아이가 되어 버리는 앙숙 차지헌과 차무원이 있다. 차무원은 쓸데없이 어른스럽고 차지헌은 자라지 못한 아이와 같다. 차봉만 회장과 신숙희 사장이 아옹다옹하는 것은 어떤가. 황관장과 서나윤 사이의 신경전은 철없는 엄마와 사춘기 딸과의 신경전을 연상케 한다. 여기에 노은설과 차지헌, 노은설과 차무원, 차무원과 서나윤으로 이어지는 복잡한 애정전선까지. 그래서 그런 부분에서 기대하며 보게 하는 것은 있다. 그러나 말했듯 그 뿐. 과연 끝까지 단 한 번이라도 빠뜨리고 지나갔을 때 아쉬우며 안타까울 것인가.

지금이라도 누군가 사건을 만드는 주체가 필요하다. 사건을 일으키고 등장인물들을 끌어들인다. 곤란하게 만들고 절박하게 만든다. 그럼으로써 보다 인물들의 캐릭터를 부각시킨다. 아쉽고 안타까워서 끝나는 그 순간이 미치도록 화가 나고, 어서 빨리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 그 끝을 볼 수 있도록. 그러고 보면 초반의 설정 이후 더 이상의 캐릭터에 깊이나 넓이가 더해진 것이 없다. 노은설조차 단지 일진 출신의 가끔 과격해지는 비서 이상은 아니다. 아니 지금은 과연 저기 보이고 있는 것이 노은설인가? 최강희인가? 보다 더 캐릭터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여전히 맨숭하게 표면만 노닐고 있으니 그것이 안 되는 까닭이다. 차지헌도 차무원도 모두 평면적이다. 그나마 서나윤 정도만 복잡한 사정에 얽히며 다양한 얼굴을 보여준다. 가장 비극적 상황에 있으니.

악역이 있어야 한다. 욕하며 보는 악역이다. 더불어 주위의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악역이다. <공주의 남자>에서의 수양대군일 것이며 <내사랑 내곁에>의 배정자일 것이다. 보다 깊이 들어가고 보다 적극적으로 다가서야 한다. 아무리 그래도 드라마의 인물들이 펑펑 우는 것도 없고 크게 소리내어 웃는 것다면 너무 심심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성취감이라는 것도 있다. 과연 이 드라마가 마지막에 보여주려 하는 것은 무엇인가. 차지헌과 노은설의 사랑이라면 남은 건 결혼 뿐이다. 그 과정에서의 어려움이야 있겠지만 역시 노은설의 성장기 이상은 안 된다. 그러나 누군가 나서서 노은설을 괴롭혀 주는 사람이 있다면. 노은설이 웃게 만들고 울게 만들 누군가가.

항상 재미있게 보고 있는 것과는 달리 지나고 나면 기억에 없다. 항상 그렇게 감탄하며 보고 있는 것과는 달리 정작 끝나고 나면 더 이상 아쉬움이나 미련이 없다. 끝나는 것이 안타깝지도 않다. 또 끝나는구나. 노은설을 대하는 차무원의 자세처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적당히 좋아하고 적당히 아쉬워하며 적당히 잊고. 차지헌처럼 조금 더 집요하게 집착하고 해야 다음이 궁금하기도 하다.

드라마를 두고 드라마틱하다고 한다. 극이기에 극적이라고도 한다. 격정이다. 모든 감정이 극적으로 표출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하긴 그래서 극적이다. 그 감정의 격랑이 시청자를 끌어들여야 한다. 그 일이 자기 일인 것처럼 느껴야 한다. 그래서 다음을 기다리도록. 그 다음을 아쉬워하며 기대하도록. 어쩌면 드라마로서의 본질을 잃은 것은 아닌가. 보기에 좋은 것만으로는 드라마가 아니다.

그럼에도 분명 좋은 드라마일 것이다. 보는 내내 이렇게 즐거울 수 있는 드라마도 드물다. 피곤해 있던 몸과 마음이 그를 통해 쉬고 있는 느낌이다. 몸도 마음도 편하게 이완되어 그 자체를 즐기게 된다. 장점이지만 그래서 단점이지 않은가. 평가에 비해 여전히 약간씩 부족하다. 아쉽다.

노은설이 마침내 차봉만 회장의 비리를 알게 된 것을 계기로 삼았으면 한다. 그 유쾌함 뒤에 숨은 악의를 드러낼 수 있다면. 그렇다면 더 극적이지 않을까? 신숙희와 황관장까지 뛰어들이 진흙탕이 왼다면. 차지헌과 차무원과 서나윤과. 흥미를 잡아끄는 이유다. 이건 재미있겠다.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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