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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4.11.26 07:30

라이어게임 종영 "마지막 남는 것, 믿음이라는 용기와 의지"

믿음과 선택, 가식과 기만의 현실에 믿는다는 의미를 묻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진정 지켜야 할 믿음이란 과연 무엇일까? 고아원을 지키기 위해 독지가로부터 후원을 받고 있다. 고아원에는 자신을 어머니라 부르며 따르는 수많은 아이들이 있다. 하나는 자기에게 댓가로써 믿음을 요구하고, 다른 하나는 자기에게 댓가로써 믿음을 보내고 있다. 그것이 하우진(이상윤 분)의 어머니(김영애 분)가 저지른 죄였다. 믿은 것이 아니라 믿음을 지키지 못한 것. 고아원은 지켰을지 몰라도 그녀를 어머니라 따르던 두 아들을 잃고 말았다.

그래서 강도영(신성록 분)은 남다정을 시험하고 있었을 것이다. 진정 믿어야 하는 것은 누구인가? 과연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가? 누구를 무엇때문에 믿어야만 하는 것인가? 이미 남다정은 하우진을 믿는다 말하고 있었다. 하우진 역시 남다정에게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믿어달라 말하고 있었다. 그 믿음을 흔든다. 남다정의 아버지(엄효섭 분)가 빚쟁이들에게 쫓기게 된 것이 모두 하우진 때문이라 말한다. 어머니의 복수가 아닌 원래 하우진과 강도영은 서로 아는 사이였다. 남다정의 아버지를 납치하여 하우진을 협박한다. 게임 도중 남다정을 쏘라. 조작된 동영상과 실제 자신을 향해 총을 겨누는 하우진의 모습에 남다정 역시 흔들리고 만다. 자신도 역시 하우진을 향해 총을 쏜다. 하지만 깨닫는다. 그렇더라도 자신은 하우진을 믿으려 한다.

사람이 사람을 믿는 것이 잘못인가? 하지만 남다정 자신도 강도영이 하는 말에 대해 말처럼 그렇게 전적인 신뢰까지는 보여주지 않고 있었다. 하기는 게임 도중 하우진이 누군가를 의심하는데 남다정이 그런 하우진의 의견에 동의하고 지지를 보낸다는 자체가 누군가를 의심하는 행위 자체를 인정하는 것과 같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누군가를 의심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세우고, 그것들을 직접 행동으로 옮긴다. 결국 마지막 순간 자신을 향해 총구를 겨눈 하우진이 아닌 강도영을 향해 총구를 돌린 자체가 강도영이 하는 말을 믿을 수 없다는 강력한 의사표현인 것이다. 하우진을 믿기에 강도영이 들려준 모든 주장과 제안을 거부하겠다. 하우진에게 묻는다. 강도영이 하는 말이 사실인가?

▲ 라이어게임 포스터 ⓒtvN

우물 위에 세 아이가 있다. 서로 동시에 손을 내밀면 서로에게 의지해 우물 위에 떨어지지 않고 버티고 설 수 있다. 동시에 손을 뗀다면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 그런데 누군가 옆에서 말한다. 불가능하다. 그런 것이 가능할 리 없다. 떨어지고 말 것이다. 혹은 다른 두 아이를 비난하는 아이들도 있을 것이다. 분명 약속을 지키지 않고 혼자서만 뒤로 빠질 것이다. 다른 두 아이를 우물에 빠뜨리려 못된 장난을 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자신만 어리석게 속아 우물에 빠지고 말 것이다. 결국 우물 위에서 세 아이가 서로에게 의지한 채 버티고 서 있다면 다른 이야기는 모두 무시하고 오로지 서로만을 믿고자 한 결과였을 것이다. 누구보다 오로지 서로만을 믿었다. 만일 더 소중한 누군가가 있다면 걱정을 끼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먼저 우물에서 내려와야 했을 것이다. 다른 두 아이와의 놀이보다 어린 하우진에게는 엄마가 자신을 찾는 목소리가 더 중요했다. 그러니까 믿음이란 과연 무엇인가?

하우진의 어머니가 남다정과 다른 점이다. 강도영이 남다정에게 기대한 것이기도 하다. 어머니와는 다르기를 바랐다. 다른 결말을 보여줄 수 있기를 기대했다. 남다정은 강도영의 기대에 충실히 응했다. 남다정의 자리에 갖다 놓은 실탄은 강도영의 바람과 기대대로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지쳐 있었을 것이다. 어느새 자기가 아니게 되어 버린 자신에게. 마치 꼭두각시 인형마냥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말하고 생각하고 움직이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인지. 내가 말하는 것인지. 내가 한 행동들인지. 그럼에도 스스로 멈출 수는 없다. 누군가 멈춰주기만을 바란다. 그것이 하우진이고 남다정이기를. 그의 삶에서 마지막 행복했던 순간들이었다. 다시 돌아가고 싶었던 두 사람이었다. 못다한 놀이를 끝내며 그토록 가고파 했던 그곳에서 고단한 자신의 삶까지 마무리하려 한다. 버림받은 것은 자신이었다.

결국 강도영의 의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남다정으로 하여금 하우진을 배신케 하고 싶었다. 그래서 먼저 하우진으로 하여금 남다정을 배신케 했다. 남다정이 쏜 총에 맞아 죽고 싶었다. 못된 장난이었다. 과연 하우진이 구하려 한 것은 남다정이었을까? 아니면 강도영 자신이었을까? 그때 끝내지 못한 놀이의 뒤늦은 결론이었을 것이다. 누구도 강도영 혼자 떨어지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누구를 선택했든 누군가는 그를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썼을 것이다. 그때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에 새삼 바라지도 않는다. 어차피 그때 누구도 자신을 구하지는 못했다. 버려졌다.

선이란 어떤 인성이나 행위 자체를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다. 믿음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은 목적이다. 선하고자 하기에 선한 것이다. 믿고자 하기에 믿는 것이다. 선하고자 하는 의지가 선하게 만들고, 믿고자 하는 의지가 믿게끔 해준다. 두려움마저 이길 수 있도록 해주는 그것이 바로 용기다. 선하다는 것은 강한 것이다. 믿는다는 것은 용기있는 것이다. 비겁하고 나약한 이 시대의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라이어게임'이 남긴 것이다. 가장 비열하고 추악한 게임에서 마지막 승리한 것은 한결같이 믿고자 했던 강인함과 용기였다. 흔들리면서도, 때로 속고 유혹에 넘어가면서도 끝끝내 남다정의 자신의 의지를 지켜냈다.

'라이어게임'을 만든, 지금의 강도영을 만든 그들이 의도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어린아이들을 대상으로 잔인한 심리실험을 했다고 했었다. 인간의 적나라한 욕망을 미디어를 통해 노골적으로 드러내 보인다. 과연 그런 것들이 게임에 참가한 개인이나 그것을 지켜보는 대중들 자신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오히려 만화원작에서 내세운 목적보다 더 명쾌하고 설득력있다. 미디어를 활용한 실험의 결과는 여러 분야에서 매우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고도화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쓸모있는 대상이며 수단이다. 다만 그밖에도 강도영을 두렵게 만드는 다른 이유가 숨겨져 있지는 않을까. 강도영의 탈출은 더 크고 더 깊은 새로운 이야기를 기대케 한다. 이대로 끝내기에는 너무 아쉽다.

문득 일본 만화 '몬스터'와 '20세기 소년'을 떠올렸다. 하필 두 작품 다 일본의 유명만화가 '우라사와 나오키'가 그린 것들이다. '몬스터'에서는 강도영이 받았던 심리실험이, 그리고 '20세기 소년'에서는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는 어린 시절의 왜곡된 기억과 감정들이, 여기에 '라이어게임'의 적나라한 인간의 모습이 더해진다. 고도화된 미디어가 그것들을 하나로 묶는다. 인간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래도 세상은 아직 아름답다.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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