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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사회
  • 입력 2011.09.03 08:16

심형래와 영구아트, 집단의 폭력과 침묵에 대해서...

이미 오래전부터 들어 알고 있던 이야기였다!

 

사실 새삼스런 이야기는 아니었다. 벌써 여러 해 되었을 것이다. 당시 아직까지 심형래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이 남아 있던 시절 어쩌다 보니 영구아트에서 영화 <용가리>의 스탭으로 참여했다는 사람과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다지 영구아트 시절에 대해 말하는 것을 싫어했던 그 사람이 그 가운데서도 가장 싫어했던 단어가 바로 꿈과 열정이었다. 그 다음이 심형래. 현실이 뻔한 상황임에도 가장 견뎌하지 못한 것이 임금체불이었다. 한 달만 임금이 밀려도 더 이상 일 못한다는 말이 바로 나오곤 했었다. 당시도 영구아트에서 임금이 체불된 상태에서 그만두고 나왔던 터였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에 대해 이미 들어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영구아트 출신이 필자가 알고 있는 그 한 사람만이 아니었을 테니까. 알음알음으로 영구아트에 대해 들려오는 이야기들이 있었다. 그러나 어쩐지 그에 대해 말을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영구아트와 심형래 대표에 대해 조금이라도 불리한 내용을 이야기하려 하면 바로 음해세력으로 몰렸던 때문이었다.

신지식인, 그리고 헐리우드에 도전하는 한국 SFX영화의 개척자, 더불어 한국영화계의 주류로부터 소외당하는 아웃사이더, 황우석에 이어 다시 한 번 심형래는 한국영화계의 미래를 밝혀 줄 선지자이자 순교자로 여겨지게 되었다. 한 마디로 구원자다. 그를 비판한다는 것은 다름아닌 신성모독이었다. 당시도 영구아트 출신으로 그 실체를 밝히려던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섣부르게 끼어들었던 필자와 마찬가지로 거의가 집단의 견제와 감시, 비판 속에 소리없이 스러지고 말았다.

문득 생각한다. 과연 당시 영구아트 출신자들의 쌓이고 맺힌 억울함에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귀를 기울여 주었다면 일이 이 지경에까지 왔을까? 심형래라고 하는 이미지가 아닌 그 이면의 진실에 대해, 그에 대한 비판에 대해 진심으로 귀를 기울이고 들으려 했다면 지금의 영구아트의 폐업이라는 처참한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을까? 수많은 직원들이 임금마저 체불된 채 갈 곳 없이 회사를 나오게 되었다. 심형래 대표에게는 더 이상 그들의 임금을 변제할 경제적 여력이 없다.

그래서 말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문제는 잘못을 저지르는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감시하지도 비판하지도 못하는 현실이다. 원래는 정치의 부패에 대한 것이었지만 사회의 부패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과도한 집단주의가 갖는 폐단이다. 모두가 옳다고 하면 옳다.

반론은 허락되지 않는다. 어떤 다른 의견도 용납되지 않는다. 이미 모두가 그리 정했다면 모두가 따라야 한다. 그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매우 불순하고 이해되어질 수 없는 행동이다. 이를테면 작년 타진요 파동 당시 타진요의 주장의 헛점을 지적하며 타블로에 우호적인 주장을 펼친 어떤 사람들일 것이다. 그 가운데는 실제 스탠포드를 나온 사람들도 있었을 테지만 철저히 타블로에 대해 '실드'를 치려는 불순한 의도로 매도되고 있을 뿐이었다.

이를테면 대중독재일까? 집단의 독재일 것이다. 국가, 민족, 혹은 사회의 정의, 아니면 보다 솔직하게 단지 개인의 호불호에 따라서. 그러나 그것이 집단이라는 힘을 얻게 되었을 때 그와 반대편에 있는 사람은 마땅히 배제하거나 교정해야 할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집단의 힘에 의해 개인의 주장은 철저히 통제된다.

하기는 사실 영구아트 직원들의 책임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 그러한 외부의 비판에 대해 영구아트 직원들은 내부의 당사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들 자신을 위해서도 영구아트의 체질을 보다 건전하게 바꾸고 발전시킬 의무가 그들에게는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영구아트를 사랑했을 뿐이었고, 그들의 직장을 잃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문제가 쌓이고 쌓이는 동안 안에서만 삭이다 결국 영구아트의 폐업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맞고 말았다.

그런 예 또한 사실 그다지 드문 것이 아니었다. 우리라고 하는 집착이, 그래서 우리끼리라고 하는 안이함이, 만의 하나 내부고발자라도 나타나게 되면 그는 조직의 배신자로서 따돌림의 대상이 된다. 비판을 하더라도 안에서. 개혁을 하더라도 자신들끼리. 그렇게 견디고 견디고 또 견디다 보면 더 이상 견디지 못하는 때가 오게 된다. 더 이상 어찌하지 못하는 막다른 골목이다. 그러나 그 순간에조차 믿고 만다. 낙천적으로 우리들끼리 어떻게 할 수 있겠거니. 외부에 알려서는 안 된다. 이제 와서 그것을 떠든다고 무슨 소용이 되겠는가.

우리사회의 어떤 모순들을 극명하게 드러내 보인 한 바탕의 헤프닝이었을 것이다. 단지 이미지였다. 그러나 그 이미지에 쉽게 현혹되고 간단히 휘둘리고 말았다. 국가와 민족, 순교자이며 선지자인 그가 바로 구원자인 때문이다. 그가 모든 것을 다 해 줄 것이다. 바로 직전 또한 한 바탕 휩쓸로 지나갔던 황우석이 그런 예였다. 그렇게 비판조차 허락지 않는 신성한 존재로써.

더구나 우리들끼리라는 것이 있다. 외국인이 한국을 비판해서는 안 된다. 한국국적을 갖지 않은 사람이 한국사회에 대고 무어라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무얼 안다고. 비판을 해도 우리가 하고, 바꾸려 해도 우리가 알아서 한다. 무엇보다 조직을 지키는 것이 모든 것에 우선한다. 따라서 그같은 내부의 사정을 외부에 알리는 사람은 단지 비겁한 배신자일 뿐이다. 어째서 영구아트의 직원들은 심형래 대표의 부당한 지시와 불합리한 경영에 대해 집단적으로 행동에 나서지 않았는가. 영구아트를 지키고 싶었다는 그들의 대답이 그같은 정황을 말해주고 있다 할 것이다.

어쩌다 일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는가? 그러나 과연 심형래 한 사람에게만 전적으로 그 책임을 모두 돌릴 수 있을까? 필자의 경우만도 정작 당사자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이미 상당한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몰랐던 것이 아니라 애써 모른 체 하려 했던 것이었다. 어째서? 그것이 바로 영구아트를 그 지경으로 몰고 간 우리 사회의 어두운 한 일면일 것이다. 과연 영구아트만의 경우이겠는가?

충분히 심형래 대표의 행동을 말릴 기회가 있었다. 말리지 못한다면 그의 독단과 독선에 의해 영구아트가 그 지경에까지 이르기 전에 그로부터 영구아트를 구해낼 기회가 있었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던 전문경영인에 의한 합리적인 경영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회를 무산시켜버린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니라는 것이다. 단지 심형래 대표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하려는 것에 반대하는 이유다.

누군가는 침묵했고, 누군가는 의도적으로 방관했다. 그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철저히 눈을 감고 귀를 막았으며, 비판자를 도리어 응징하려 들었다. 현실의 존재하는 모순보다 그 모순을 방치할 수밖에 없는 그같은 집단의 카르텔이 지금의 최악의 상황에까지 이르게 만든 것이었다. 누구의 탓이겠는가? 바로 심형래 대표를 처음부터 감시하지도 견제하지도 비판하지도 바로잡지도 못한 그 모든 심리적 구조의 문제였다. 집단의 무의식이었다. 한국사회 특유의 문화이며 정서였다.

과연 영구아트 뿐인가? 심형래 대표 말고는 다른 곳에서는 이같은 문제가 없는가? 단지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주위의 묵인 아래. 당사자끼리의 연대 위에. 아마 이와 같이 크게 일이 불거지기 전까지는 그 또한 철저히 침묵속에 묻히게 되리라. 안타깝기보다 차라리 그런 것이 두려워지는 이유일 것이다. 지금은 남의 일이지만 언제고 그것은 나의 일이 될 수 있다.

필자 역시 가끔 두려움을 느낄 때가 있다. 과연 이런 말을 해도 좋은가. 분위기도 그런데 이런 말을 해서 뒷탈은 없겠는가. 하지만 그런 소란스러움이 있기 때문에 조직에도 피가 돌고 숨이 쉬어지는 것이다. 노폐물이 빠져나가고 신선한 공기와 영양분이 구석구석으로 미치게 된다. 단지 죽은 사람만이 완벽하게 조용할 수 있다. 죽어서도 조용하지만 조용하기에 죽어 있는 것이기도 하다.

새삼 깨닫는 것이다. 말을 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들어준다는 것. 바로 소통일 것이다. 소통이 바로 살아가는 호흡이고 몸을 도는 피다. 소통을 두려워해서는 생명은 유지될 수 없다. 이번 일의 교훈일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말하는 자체를 두렵게 만드는 것에 대해서. 아직 말을 할 수 있기에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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