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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1.08.29 06:22

내사랑 내곁에 "조윤정의 임신과 도미솔의 낙인..."

죄가 아닌 죄가 되어 다시 낙인으로 돌아오다!

 
필자가 이 드라마를 보기 시작한 이유일 것이다. 시작은 호기심이었다. 새로운 드라마가 시작한다기에 과연 어떤 드라마인가? 그러다가 첫 회에서 미성년자의 임신이라는 첨예한 문제를 직설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서 시쳇말로 꽂히고 말았다. 이것 참 재미있겠다. 그리고 재미있었다.

아마 의도적인 설정이었을 것이다. 고등학교 동창인 남자친구와의 우연한 하룻밤으로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된 고등학생 도미솔(이소연 분)과 역시 고등학교 동창인 남자친구와 충동적인 하룻밤으로 인해 의도하지 않은 임신을 하게 된 유부녀 조윤정(전혜빈 분)의 대비라는 것은.

물론 도미솔은 당시 아직 미숙한 미성년자였다. 그러나 조윤정은 어떤가? 그녀는 성인이었다. 이미 결혼까지 한 유부녀였다. 성과 임신에 대해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한 순간의 충동을 이기지 못했고, 그 충동으로 인한 임신을 미리 인지하지도 통제하지도 못했다. 하기는 그래서 전혀 예정에 없던 임신으로 말미암아 산부인과를 찾는 기혼여성들이 적지 않았다.

그렇게 임신은 한순간에 찾아 온다. 성이라는 것도 인간이 성에 대한 욕구를 본능으로 가지고 있는 한 언제 어느때든 충동적으로 우연에 의해 일어날 수 있는 일상의 사건에 불과하다. 누구도 모르는 것이다. 내가 지금 이 순간 어떤 행동을 하게 되리라는 것은. 그래서 임신을 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과연 부도덕한 것인가? 죄인 것인가?

도미솔의 과거 담임이기도 했던 이소룡(이재윤 분)의 어머니 최은희(김미경 분)는 자신의 제자였던 도미솔에게 그렇게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넌 애 엄마잖아? 양심이 있으면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양심이란 도덕적 판단을 할 수 있는 이성을 이야기한다. 과연 아이엄마로써 한 남자를 사랑하는 것이 자신의 도덕적 판단에 비추어 타당한가? 그래서 이미 최은희는 도미솔을 만난 자리에서 당당하게 선언하고 있기도 했다.

"아무리 그래도 아닌 건 아니다."

그것은 곧 당위다. 자식을 둔 부모로써 아이를 둔, 그것도 미성년자로써 임신을 하고 아이까지 낳은 여성과 자기 자식이 사귀는 것을 용납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다. 당연히 반대해야 하고 거부해야 한다. 이 역시 도덕적 판단이 들어간다. 그것이 부모로써의 당연한 의무다.

사실 드라마를 보면서도 많이 답답했었다. 도미솔이나 그 엄마 봉선아(김미숙 분)이나 왜 이리 사람들이 답답한가. 답답하게 자꾸 움츠러 드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당연히 해야 하고, 해야 하는 말이나 행동이 있으면 또한 그리 해야 한다. 그런데 심지어 엄한 사람에게 피해를 입혀가면서도 그들은 말을 하기보다는 침묵을 택한다. 행동을 하기보다는 움츠러들어 숨기를 선택한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고등학교 시절 모두가 그녀를 따돌리고 외면하는 가운데서도 유일하게 편을 들어주던 선생님이었다. 학교를 그만두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을 때도 유일하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주던 고마운 담임선생님이었다. 오랜만에 만났을 때는 방송국에 취직도 했다며 자기 일처럼 기뻐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선생님조차 자기 자식의 일이 되니 표정이 바뀐다.

결국 남의 일이었던 것이다. 남의 일이기에 그녀는 그토록 오지랖넓게 사람 좋은 연기를 해 보일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랬기에 그녀의 그러한 위선은 정작 자기 자식의 일이 되어 입장을 달리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을 때 그 책임을 도미솔 자신에게 돌린다. 네가 잘못인 거다. 네가 잘못한 거다. 네가 감히 내 자식과 사귀려는 자체가 잘못이다.

낙인이다. 이미 영웅이를 임신한 순간 도미솔에게는 '임신했던 여자'라는 낙인 찍힌 뒤였다. 영웅이를 낳고 나서는 '미혼모'라는 낙인이 찍힌다. 흔히 미혼모가 낳은 아이를 사생아라 부른다. 그 또한 아이에게 씌워지는 낙인이며 굴레일 것이다. 더구나 도미솔은 고등학생이었다. 미성년자이기에 그 낙이는 더욱 크고 깊고 흉측하다. 한때의 동정으로 가엾게 여길 수는 있어도 동등한 인간으로 함께 할 수는 없다. 그는 부정하고 불쾌한 죄의 증거일 것이므로.

그렇게 도미솔과 그 가족에게 패악을 부리던 배정자(이휘향 분)가 오히려 당당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지금에 와서도 뻔뻔스럽게 봉영웅을 자기의 손자라, 그리고 심지어 도미솔을 아들 고석빈(온주완 분)과 이어줄 것이라 말할 수 있는 이유였다. 단지 도미솔에 대해 알리는 것만으로도 도미솔은 이소룡과 헤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도미솔은 최소한 사회적 의미에서 인간이 아니었으니까. 그녀에게 인간으로서의 존엄이란 이미 인정되지 않을 테니까.

그것은 도미솔의 엄마 봉선아 역시 동의했던 것이었다. 도미솔의 친구가 임신을 했다 했을 때 봉선아 역시 도미솔더러 그 친구와 어울리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었다. 그리고 도미솔이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자 그 아이를 자기 호적에 올리고 있었다. 그녀 역시 알고 있는 것이다. 봉영웅이 도미솔의 아이라는 것이 알려졌을 때 도미솔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그녀 역시 공범이었으므로.

결국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하게 됨으로써 그것이 알려지면서 설 자리를 잃어가는 조윤정의 모습이야 말로 지금의 도미솔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차라리 고석빈은 조윤정의 남편이었다. 배정자는 고석빈의 어머니였다. 그리고 조윤정은 고석빈의 아내였으며, 그러나 조윤정이 임신한 아이는 고석빈의 아이가 아니었다. 고석빈이 분노할 이유로 충분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도미솔의 임신에 분노하며 증오를 퍼붓고 그녀가 있을 자리를 빼앗는 최은희의 태도는 무엇인가? 단지 남편이 아니었지만 당시 도미솔은 누구의 아내도 아니었다. 누구도 배신하지 않았다.

조윤정의 자궁에는 분명 고석빈의 지분도 상당히 있다. 결혼이란 여성의 자궁에 대한 계약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최은희에게는 도미솔에 대해 어떤 지분이 있겠는가? 이소룡을 만나기 전의 일을 가지고 그녀에게 책임을 묻는다. 도덕적 책임을 덧씌운다. 성이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고, 임신 역시 마찬가지일 터이지만, 그러나 그 전후사정과 상관없이 - 역시 고석빈 역시 조윤정의 부정에 대해 굳이 묻지 않고 있었다. - 그 자체로써 단죄하려 드는 것이다.

미혼모 문제의 근본적 원인일 것이다. 하기는 미혼모에 대해 인식이 좋은 사회란 매우 드물다.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어느 사회에서나 크든 적든 좋지 않은 눈으로 보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 정도에 있어 분명한 차이가 있다. 성과 임신에 대해 여성 개인의 문제로 보는가, 아니면 집단의 어떤 것으로 보는가. 여성을 모성으로써 대하는 시각과도 통해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낙태를 반대하면서 그를 통해 갈수록 낮아지는 출산율을 해결해보려는 어떤 시도와 같은 것이다. 여성의 자궁이란 공공재다. 사회의 것이다. 관리되어야 하는 것이다.

아무튼 그런 현실에서 도미솔이 얼마나 당당할 수 있겠는가? 자기가 임신을 했었고, 아이까지 낳았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장차 어떤 결과로 돌아오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을 텐데. 봉선아는 더욱 그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만큼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녀는 이미 죄인 아닌 죄인이므로. 그러고자 해서 부정을 저지르고 임신을 하게 된 것도 아니었음에도 단지 임신했다는 이유로 죄인이 되어야 했던 조윤정처럼 그녀 역시 이 사회에서 죄인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지금에 와서는 그래서 도미솔의 이소룡에 대한 감정조차 진심인가 의심하게 된다. 그것은 단지 궁지에 몰린 죄수의 동정하는 따뜻함에 대한 집착이고 의지가 아니었을까. 실제 이소룡은 줄곧 위축되어 있는 도미솔에게 기댈 수 있는 존재로써 다가가고 있기도 했다. 아버지 대신이었을까?

미혼모가 늘고 있으니 미혼모에 대한 인식도 나아질 것이다. 과연 단지 미성년자가 성행위를 하는 자체를 부정적으로 여기는 사회에서 그게 가당키나 한 말일까? 임신을 했다는 자체만으로도 되돌릴 수 없는 죄의 낙인이 되어야 하는 현실에 마치 꿈길을 헤매는 소리와 같은 것이다.

분명 생명은 소중하다. 태아도 생명이다. 하지만 산모도 생명이다. 생명이란 단지 숨을 쉬기에 생명이 아니다. 사회 속에서 자기라고 하는 존재로써 인정받고 살아갈 수 있을 때 생명이 된다. 과연 무작정 아이를 낳는 것만이 생명을 보호하는 것인가. 그나마 도미솔이 봉영웅을 엄마의 아이가 아닌 자기의 아이라 해서 기르게 되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낳게 할 것이면 사회적인 인식부터 먼저 바꾸려 들던가. 그로 인한 사회적 경제적 부담을 사회 스스로가 흡수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학교도 그만두어야 하고, 사회생활에도 제약이 있고, 행복을 추구하는데도 지장이 있다면. 그래서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없다면.

하기는 기억한다. 드라마 초반 사람들의 반응이 무척 뜨거웠었다. 미성년자의 성과 임신을 옹호하는가? 그것을 미화하려 드는가? 미화가 아니다. 현실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나마 도미솔은 매우 운이 좋은 편이다. 드라마 주인공답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운이 좋을 수 있다면. 많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더 깊은 절망 속에 살아가는 것에 비한다면.

어쨌거나 욕망은 욕망을 잡아먹으며 덩치를 키워간다. 처음에는 어떤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아들을 위해서. 아들이 잘 되는 것을 지켜보기 위해서. 그런 모습에서 보람을 찾기 위해서. 그러나 이제는 욕망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렸다. 오로지 강정혜(정혜선 분)의 지성기업을 물려받는 그것만이 배정자에게는 전부가 되어 버렸다. 며느리의 부정을 알면서도 그 부정으로 인한 아이가 필요하기에 아들의 앞을 막아서는 그 모습처럼. 참으라. 인내하라. 더 큰 더 중요한 목표를 위해서. 그 목적을 위해서.

물론 그녀도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어느새 진성기업의 사장이 되어 여유로운 웃음을 짓고 있는 아들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을. 그런 아들의 옆에서 그녀 또한 흐뭇한 웃음을 짓고 있을 것이다.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다. 그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못할까?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쓴다고 했다.

그러나 과연 지금 그녀는 행복한가? 그녀가 그토록 위하고 있는 그녀의 아들은 행복한가? 설사 모든 원하는 것을 손에 넣는다 해서 지금 이대로 그녀와 그녀의 아들은 행복할 수 있는가? 때로 그녀가 가련해지는 이유일 것이다. 자기 집에서마저 혹시나 들킬 까 초라하게 식탁 밑에 숨는 모습에서. 무엇에 화를 내야 하는지도 모르고 화를 내며 원망을 내뱉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인간은 원래 악한 것이 아니라 약한 것이다. 배정자 그녀가 그랬고 고석빈이 그랬다. 그녀는 단지 바랄 뿐이었고, 고석빈은 단지 도망칠 뿐이었다. 그러면 조윤정은? 곁에 아무도 없이 혼자서 모든 것을 감당해야 했던 조윤정에 비하면 엄마라도 곁에 있었던 도미솔은 행운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기는 사실 도미솔과 같은 운이 좋은 경우는 현실에서도 얼마 없다. 오히려 조윤정에 더 가깝다. 아무도 모르게 누구에게 말조차 못하고 임신하고는 혼자서 낳아 어딘가에 버리고 마는. 아니 아예 자기 손으로 갓태어난 아이를 죽이기도 한다. 아니면 조윤정처럼 누군가와 거래를 하거나. 궁지로 내몰린 짐승은 물어뜯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자기이든 다른 누구이든. 슬픈 것이다.

사실 조금은 늦었다. 혹시 앞으로 미혼모로써 도미솔이 겪는 현실적 고통 같은 것을 상당히 사실적으로 디테일하게 묘사하지 않겠는가. 어른이 되고 나면 더 힘든 현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그것을 과연 드라마는 어떻게 묘사하려 들겠는가. 그동안 보여진 것들이 있기에. 드라마에 대한 신뢰가 앞으로 펼쳐진 이야기들을 기대하게 했다. 하지만 그동안은 마냥 드라마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 동안의 그다지 큰 어려움없이 지나온 일상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비극이 더욱 극단적으로 다가오지 않겠는가. 애써 잊으려 해도 한 번 찍힌 낙인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한 번 씌워진 굴레는 언제고 다시 그녀를 옭죌 뿐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던 시간들은 착각일 뿐이었다. 그렇게 극적으로 분위기는 전환된다. 그녀의 표정이 마치 원죄처럼 절망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한다. 그것을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 돌고 돌아 결국은 다시 돌아오고 말리라. 그녀가 치러야 할 죄의 댓가로써.

정말 인상적이었다. 어느새 고립무원이 되어 죽음마저 생각하게 되는 조윤정과 그토록 고맙고 의지하던 담임선생님의 바뀐 모습을 떠올리며 서럽게 울던 도미솔과. 그에 비해 이제 와서 속 편하게 봉영웅을 자기 아들이라 말하는 고석빈의 뻔뻔함이란. 여성이고 남성일 테니 말이다. 여성은 죄인이 되어 책임을 지고 남성은 영웅이 되어 권리를 갖는다. 부조리한 현실일 것이다.

오랜만에 - 더구나 그 며칠 전 그와 관련한 기사를 보았던 탓에 더욱 의미깊었던 회차였다. 여성작가가 보는 눈이 이러한가. 또한 배우고 깨달으며. 우리의 현실일 것이기에. 드라마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이야기였을 것이다. 하늘 아래 누군가 지금 그러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드라마인 것이다.

배우들의 연기야 말할 것도 없다. 특히 드라마를 지탱하는 두 축, 악역을 담당하는 배정자 역의 이휘향과 고석빈 역의 온주완일 것이다. 자칫 막장으로 치달을 수 있는 이야기인데도 너무나 설득력있게 디테일한 인물의 감정을 잘 묘사해 보여주는 탓에 어느새 그 개연성에 설득당하게 된다. 납득하게 된다. 악역이 악행을 해야 드라마가 굴러가는데 그 악행이 이해가 된다.

갈수록 더 재미있어진다. 잠시 숨을 고르더니만 갈등이 증폭되며 더욱 이야기가 꼬이기 시작한다. 주제 또한 더욱 첨예하게 드러나며 기대가 커진다. 흥미롭다. 좋다. 생각케 된다.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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