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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4.10.22 07:27

내일도 칸타빌레 4회 "무엇도 아닌 애매함, 방향과 정체성을 잃다"

코미디도 아닌, 정극도 아닌, 웃음도 감동도 항상 한 발 늦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마치 서툴게 정교한 그림을 보는 것 같다. 보이는 모든 것을 그려넣으려 하다 보니 정작 무엇도 보이지 않게 된다. 가까울수록 더 커지고 선명해지며 멀어지면 더 작아지고 흐려진다. 주제가 있다면 나머지는 그를 위해 배열되고 구성되어야 한다. 생략과 과장은 그를 위한 효과적인 수단 가운데 하나다. 무엇을 선택하는가가 곧 작가의 의도이기도 한 것이다.

세세한 에피소드들을 다 등장시킬 필요는 없다. 대사가 굳이 더 디테일할 필요도 없다. 굳이 등장인물의 목소리를 빌어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도 없다. 드라마든 영화든 결국 보여줄 것이 없을 때 말이 많아지고 만다. 정극의 리얼리티를 추구하려 했다면 보다 디테일한 연출과 연기를 통해 굳이 말이 필요없을 정도로 구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으면 되었을 것이다. 더구나 코미디를 지향한다면 형식이나 수단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음악만으로 드라마가 의도한 바를 충분히 전달할 수 없다면 시각적인 수단을 통해 그것을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코미디인데 화면에 음표가 날아다니면 또 어떤가.

마치 만화에서처럼 설내일(심은경 분)의 연주를 듣는 도강재(이병준 분) 교수의 주위로 꽃이 피어오른다. 꽃들이 일제히 설내일이 있는 곳을 가리킨다. 설내일이 연주를 끝낸 순간 꽃도 꽃들이 가리키던 방향도 모두 사라져 버린다. 유일락(고경표 분)이 A오케스트라의 정시원(배민정 분)과 바이올린으로 승부를 겨룰 때도 배경을 이용하여 승부의 긴장감과 승패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구성한다. 모든 시청자가 단지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 드라마가 의도한대로 음악이나 연주의 수준을 알아차릴 정도로 훈련이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결국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나중에 그 사실을 들어야 한다. 감동도 이해도 결국 항상 한 발 늦을 수밖에 없다.

▲ 내일도 칸타빌레 포스터 ⓒ그룹에이트

어차피 연기인 것을 모두가 알고 있기에 연주에서의 리얼리티를 포기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표정과 몸짓을 보다 과장되게 드라마가 의도한 바를 연기자의 연기를 통해 시각적으로 확인하도록 만든다. 모두가 일상적인 표정으로 열심히 연주만 하고 있는데 그 연주가 우울한지 축 쳐져 있는지 알아볼 도리가 없다. 꼭 음악만을 사용해서 전달해야겠다 싶으면 아예 한 번에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도록 편곡에 변화를 주는 것도 선택의 하나일 것이다. 실제 음대에 진학할 정도로 훈련을 쌓은 연주자가 그렇게까지 연주할 리는 없지만 그러나 문외한이 듣기에는 그쪽이 더 직접적으로 와닿게 된다. 한 템포 늦게 등장인물들의 설명을 듣고서야 이해할 수 있는 드라마가 과연 재미있을 수 있을까?

차유진(주원 분)의 독선과 독단을 보여주기에도 걸어나오면서 우는 모습보다는 얼굴을 가린 채 뛰쳐나오는 모습이 더 직접적으로 와닿았을 것이다. S오케스트라 멤버 전원이 나란히 앉아 그저 눈물만 흘리고 있다. 가장 강해 보이는 한 사람이 엉엉 소리내어 통곡을 하면 효과는 더욱 극대화될 것이다. 연습이 계속될수록 연주자들의 표정은 어두워지고 우울해지며 수렁으로 빠져든다. 차유진에게도 더 많은 다양한 표정들이 요구된다.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실망하고 분노하며 좌절하는 과정들이 전혀 표정으로 읽히지 않는다. 결국 그 한 걸음이다. 조금만 더 뻔뻔해지고 당당해지면 오히려 시청자는 드라마에 설득당하고 말 것이다. 정극도 코미디도 아닌 그 애매함과 비겁함이 드라마를 무엇도 아니게 만들고 있다.

경쟁도 장난스럽게. 지나치게 심각해져서는 곤란하다. 그래서 원작에서도 슈트레제만(백윤식 분)이 특유의 기행으로 무거워질 수 있는 분위기를 한 바탕 유쾌한 헤프닝으로 바꿔주고 있었던 것이다. A오케스트라와 S오케스트라의 경쟁 자체가 슈트레제만의 변덕이자 기행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런데 드라마에서는 슈트레제만조차 너무 무겁다. 어쩌면 미스캐스팅이었을 것이다. 괴상하기는 한데 지는 쪽 오케스트라가 해체된다는 가혹한 조건마저 웃음으로 바꾸기에는 역시 지나치게 진지하고 무겁게 여겨진다. 모두가 진지하고 무거우면 혼자서 웃기려 하는 설내일은 어색하게 겉돌 뿐이다. 코미디인데 코미디가 전혀 어울리지 못한다. 연기자의 책임이라기보다는 드라마가 지향하는 바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제작진의 잘못이 아니었을까. 코미디인가, 아니면 정극인가. 정체성조차 확실하게 정하지 못했다.

드라마를 보고 있는데 너무 휑하다. 듬성듬성한 빈 자리들이 너무 크게 느껴진다. 줄기는 있는데 가지가 없다. 가지는 있는데 잎이 없다. 꽃도 열매도 없다. 나무라는 것은 알겠다. 그런데 지나치게 굵은 가지들에 무엇이 줄기이고 가지인지도 모르겠다. 무엇을 의도하는지.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지. 그냥 흘러간다. 드라마가 아니다. 드라마틱이라는 단어의 뜻을 다시 생각해 본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시청률이 항상 드라마의 완성도를 말해주지는 않지만 최소한 드라마에 대한 시청자의 평가를 가늠하는 기준은 되어 줄 수 있다. 아쉽다는 말도 미안하다.

스스로 만든 벽을 부수고 뛰어넘어야 한다. 한 걸음 더 과감히 내딛을 수 있어야 한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두 마리 새를 다 잡지 못할 것이면 한 마리 새라도 노려서 잡을 수 있어야 한다. 매번 반복하는 말이다. 정극인가, 아니면 코미디인가. 둘 다는 곤란하다. 팔도 닿지 않고 손도 너무 작다. 무엇보다 재미가 너무 없다. 반성이 필요하다.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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