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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사회
  • 입력 2011.08.24 15:57

무상급식 "그 쟁점, 보편적 복지냐? 선별적 복지냐?"

장차 대한민국의 중요한 패러다임을 결정한다!

드디어 8월 24일 오늘 무상급식을 둘러싼 주민투표가 실시되었다. 하지만 사실 이 투표 자체가 크게 의미를 두기 애매하다는 것이 이미 서울시 교육청에 의해 중랑, 서초, 송파, 강남 네 곳을 제외한 서울시내 21개 자치구에서 초등학교 4학년 이하를 대상으로 무상급식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투표의 찬반여부는 단지 서울시교육청의 안대로 전면무상급식을 추진할 경우 서울시의 예산지원이 있을 것인가에 대한 것만을 결정할 뿐이다. 바로 오세훈 서울시장이 시교육청과 시의회의 예산지원 결정에 대해 반발하며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도대체 무상급식이 무엇이기에 오세훈 서울시장은 물론 한나라당과 보수진영 전체가 들고 일어나 쌍수를 들고 반대하고 있는 것인가. 아예 이야기만 들어 보면 나라가 망하기라도 할 것 같다. 그렇게까지 심각한 사안인가.

물론 심각하다. 바로 복지에 대한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 사건인 때문이다. 무상급식을 둘러싸고 양측의, 특히 찬성측의 주장이 이리저리 꼬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름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선별적 복지와 보편적 복지. 필요한 곳에 복지가 있다. 혹은 모든 국민을 최소한의 복지를 누릴 권리를 갖는다. 나라에서 베푸는 복지와 국민 스스로 누릴 권리를 찾는 복지. 그리고 한국사회에서는 아직까지 복지란 전자를 의미한다.

어째서 부자아이들 먹이는 것을 걱정하는가.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부자아이들 먹일 돈으로 가난한 아이들에게 조금 더 쓰자는 선의의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한 마디로 부자아이들은 복지의 대사이 아니다. 그러면 무엇일까? 바로 여기에서 충돌이 일어나는 것이다. 부자아이들은 복지의 대상이 아닌가? 나아가 부자아이들이나 가난한 아이들이나 동등한가?

보편적 복지의 입장에서 둘은 같다. 가난한 아이이고 부자 아이이고 구분을 둘 수 없다. 같은 국가의 구성원이며 마찬가지로 국가로부터 최소한의 삶을 보장받는 대상이어야 한다. 그런데 선별적 복지의 입장에서 이 둘은 다르다. 가난한 아이는 국가적으로 사회적으로 도움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고 부자 아이는 그럴 대상이 아니다. 이른바 논란의 한 쟁점이 되고 있는 낙인효과가 여기에서 비롯된다 할 수 있다. 국가로부터 사회로부터 도움을 받아 생활하는 아이와 그런 것 없이도 잘 살아가는 아이. 하나는 종속적이고 피동적인 객체이며 하나는 독립적이고 능동적인 주체다. 차별이 가해질 수밖에 없다. 저들과 나는 다르다.

부유층 가운데 적선을 해도 세금은 더 못내겠다는 입장이 그래서 나타나게 된다. 얼마든지 어려운 이들에게 개인적인 온정은 베풀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을 위해 국가에서 세금을 쓰는 것은 못마땅하다. 국가는 세금을 내는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는 가난뱅이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들은 경멸하면서 그 가난뱅이들을 돕는다.

그래서 사실 선별적 복지냐 보편적 복지냐 하는 논란은 현대의 국가관과도 이어진다. 마찬가지다. 국가란 더 많은 세금을 내는 이들을 위해 존재하는가? 그와는 상관없이 국가를 구성하고 있는 보편적 구성원들을 위해 존재하는가? 국민은 국가의 구성원으로써 동등한가? 아니면 그 안에서도 차등이 주어지는가? 지금 무상급식을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인 셈이다. 이를테면 이것은 계급의 문제이며 국가의 패러다임에 대한 문제다.

물론 그렇다고 입장이 딱 나뉘어지는가? 그렇지는 않다. 말했듯 무상급식 찬성쪽의 논리가 꼬이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선별적 복지의 입장에서 무상급식을 설명하려 하는 까닭이다. 가난한 아이들에게만 먹이려는데 낙인효과가 문제가 된다. 그래서 지금 당장도 가장 양쪽이 첨예하게 부딪히는 지점이 바로 이 낙인효과다. 오죽하면 무상급식을 반대하면서 그 대안이라고 내놓은 것이 낙인효과를 없애기 위한 낙인감방지법이다. 그에 대한 비판 역시 그것으로는 낙인효과를 완전히 근절할 수 없다. 하지만 과연 무상급식을 하게 되면 아이들 개인의 경제수준이 감춰지고 그로 인한 낙인효과가 완전히 사라질 수 있는가.

이미 전면적인 무상급식을 시행하고 있는 합천군 등 다른 자치단체의 조언에 귀를 기울여 볼 필요가 있다. 아니 정작 경기도교육감인 김상곤 교육감과 서울시교육청의 교육감 곽노현 교육감이 무상급식을 추진하며 내세운 이유들에 대해서 보다 집중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교육적 목적에서라고 했다. 아이들 먹이는 것도 교육의 일환이다.

최소한 먹는 것에는 구분이 없다. 가난하든 부유하든 최소한 학교에서 밥을 먹는데 있어서는 어떤 구별도 차별도 없다. 동등하다. 아이들에게 먹는 것을 통해 그것을 가르쳐준다. 학교 안에서만큼은 그들은 평등하다. 그것은 장차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사회에 나왔을 때 서로에 대한 인식과 판단에 있어 적잖이 영향을 주게 될 것이다.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도 확대된다면.

한솥밥을 먹는다고 한다. 주인은 양반이고 노비는 천민이다. 하지만 같은 솥에 밥을 지어 나누어 먹음으로써 서로 다른 신분 아래서도 어떤 동질감이 생겨난다. 상전이 먼저 상을 차려 밥을 먹고, 그 남은 밥과 반찬으로 아랫사람이 먹는 상물림의 전통에서도 최소한 먹는 것을 같은 것을 먹는다는 인식이 있었다. 하물며 똑같은 조건에서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식단으로 함께 밥을 먹는다. 그 차이는 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보편적 복지다. 너와 내가 다르지 않다. 부유한 집안 아이나 가난한 집안 아이나 다르지 않다. 국가의 구성원으로써 먹는 것은 같이 누린다. 학교를 나서면 - 아니 학교 안에서도 매점에서 더 맛난 비싼 것을 개인적으로 구입해 먹을 수는 있지만 그래도 최소한 기본적으로 먹는 것은 같다. 국민이고 같은 사회의 구성원이다.

그러면 그렇게 좋은 것인데 왜 문제가 되는가? 바로 그 최소한 때문이다. 부유한 집안 입장에서 보았을 때 그 최소한이라는 것은 상당히 자기들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가난한 이들이 누리는데는 너무 넘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에 대한 비용을 그들이 내는 세금에서 충당한다. 다시 말해서 최소한의 기준을 너무 낮추면 그들이 손해를 보고, 최소한의 기준을 높이면 세금을 더 내야 한다. 앞서 말한 차라리 적선을 하지 세금을 더 내지는 못하겠다는 것과도 통한다. 내가 먹을 것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 저들 것까지 책임지지는 못하겠다.

그래서 이리 시끄러운 것이다. 결국은 무상급식의 시행을 통해 보편적 복지의 주장이 확산될 경우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최소한의 보편적 삶의 기준을 위해 국가는 더 많은 예산을 필요로 할 것이고, 자기들이 누리는 수준에 턱없이 못미치는 그것을 위해 부유층은 세금을 더 내야 한다. 차라리 적선을 하라면 하겠지만 세금도 내가 더 내는데 왜 그 세금이 가난한 이들을 위해 쓰여야 하는가. 일종의 특권의식이다. 더 많은 것을 가진 만큼 특별하게 취급되어지고 싶다.

물론 말한 것처럼 과연 무상급식이 전면적으로 시행된다고 보편적 복지에 대한 논의는 더 확산될 수 있을 것인가. 회의적인 것은 정작 보편적 복지의 관점에서 보아야 할 무상급식에 대해서마저 선별적 복지의 일환으로써 접근하는 찬성론자의 존재일 것이다. 선별적 복지와 보편적 복지는 그 근본적 입장에서 차이가 있다. 베푸는가? 아니면 당연히 누리는 것인가?

이해를 돕자면 어느 밴드부를 가정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밴드부이지만 누군가는 더 좋은 악기를 살 수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아예 악기를 살 돈도 없을 것이다. 자연상태에서는 악기를 살 수 있는 사람만 밴드부에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밴드부에 대한 애정이 있다면 조금 여유가 되는 사람이 없는 사람에게 악기를 사거나 빌려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밴드부가 어느 정도 정착되었을 때는 아예 부원들이 부비를 모아 악기를 구입하여 밴드부에 가입한 모든 사람들이 악기 걱정 없이 악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할 것이다. 차라리 악기가 없는 사람 있으면 내가 사주거나 빌려주지 굳이 회비를 더 내지는 못하겠다. 그냥 모두가 악기 좀 싼 것 쓰고 밴드부 차원에서 악기를 구비해 누구나 쓸 수 있도록 해주자. 바로 무상급식을 둘러싼 양쪽의 주된 입장인 것이다. 과연 밴드부를 위해서는 어떤 선택이 더 좋을까?

덧붙이자면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편적 복지란 곧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로써 인권의 개념 안에 수렴하고 있다. 다시 말해 위의 밴드부의 예에서 사람으로써 악기를 다루고 연주하는 것을 베우는 것 역시 인간으로써 자신의 가치와 존엄을 지키는 일환으로 보는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최소한의 문화생활을 해야 하고 악기를 연주하는 것은 그 한부분일 것이다. 따라서 누군가 밴드부에 들려 할 때는 그에 대한 제한이 없어야 한다.

최소한의 먹을 것과 최소한의 입을 것, 최소한의 몸을 누일 장소, 그리고 남들에 너무 뒤쳐지지 않을 정도의 최소한의 문화생활. 남들 다 인터넷 하는데 혼자서만 돈이 없어 인터넷을 하지 못한다면 그는 사회로부터 뒤쳐지기 시작한다. 남들 다 같이 영화를 보고 연극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데 혼자서만 가난을 이유로 대화에 끼어들지 못하면 소외당하게 된다. 소외당한 사람은 사회 속에서 자신의 존엄을 확인할 수 없다. 인간이 존엄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남들과 같은 수준의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보장되어야 한다. 먼 이야기지만.

또 하나 덧붙이자면 김대중 정부 당시 저소득층에 정보화시대에 뒤쳐지지 않도록 저가의 컴퓨터를 국가의 보조 아래 보급하고자 했던 국민PC사업은 이후 한국이 IT강국으로 발돋움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었다. 기본적인 국민PC 수요에, 이미 컴퓨터가 보급되어 있는 보다 큰 시장. 오죽하면 당시 어지간히 경제규모에서 차이가 있던 나라들보다도 당시 한국의 정보화환경이 훨씬 나았을 정도였다. 초보적인 수준에서 거의 맨땅에 헤딩하다시피 시행착오를 겪으며 그 시장에 의지해 한국의 정보화산업은 지금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었다.

복지란 또한 가장 큰 소비이며 따라서 막대한 이익을 기대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산업이고 시장이기도 하다. 시교육청에서 일괄적으로 무상급식을 추진하며 각 학교의 급식을 관리할 수 있게 되면 어떻게 될까? 개별사업자보다 보다 큰 단위에서의 계약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고 그로 인해 현재의 급식산업은 한 차례 구조조정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새로운 시장과 고용이 창출될 여지가 생겨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급식 역시 개선딜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을 자유시장경제라 부른다. 마냥 퍼주기만 하는 복지가 아니라 복지의 수준이 높아질수록 복지를 이용한 새로운 수요와 고용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고민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최근의 추세는 더 이상 돈을 쓰는 복지가 아닌 돈을 버는 복지다.

어찌되었거나 주민투표는 시작되었고, 결국 시장직까지 내걸었던 오세훈 서울시장의 패배는 지금 시점에서 기정사실이 되어 있는 듯하다. 오세훈 시장의 패인은 분명했다. 어차피 현대사회에서 일반 시민들의 정치에 대한 관심은 그다지 높지 않다. 정치가 부패할수록 시민의 정치에 대한 관심은 떨어진다. 대선이나 총선과 같은 큰 이슈가 있을 때는 의무감에라도 투표에 참여하지만 보궐선거만 되어도 시민의 투표참여율은 극단적으로 떨어진다. 그런데 괜하게 무상급식을 첨예한 정치쟁점으로 만들고 시장직까지 내걸며 시민들의 정치적 피로도만 높여 놓았으니. 벌써부터 다수의 시민들이 논쟁에 지쳐 버렸다.

주민투표를 두고서도 사람들이 그런다. 또 싸운다. 왜 이렇게 시끄러운가. 그 놈이 그 놈. 아예 무상급식이라는 이슈 자체를 외면해버리는 것이다. 주민투표는 뭐 하는 짓인가 싶고. 그동안 보궐선거 등에서 나타난 투표율로 비추어 볼 때 과연 이번 무상급식을 둘러싼 주민투표에서 투표결과가 유효해지는 기준인 33.3%의 투표율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자면 오히려 투표에 대해 크게 이슈로 키우지 말았어야 했을 것이니 서로 모순되고 만다. 첫단추를 잘못 꿴 탓에 스스로 수렁으로 걸어들어간 셈이라고나 할까? 한나라당 출신의 서울시장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한나라당 역시 그에 휘말린 탓이 크고. 오히려 선별적 복지냐 보편적 복지냐 하는 근본적 논의는 아쉽게도 그런 정치적 이유들에 가려진 모양새가 강하다.

아무튼 현 시점에서 중요하게 이해되어야 할 부분이라 할 것이다. 어째서 무상급식인가? 어째서 전면무상급식이고 제한적 무한급식인 것인가? 어째서 그런 사소한 문제로 각 정당이, 정치인들이 저리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가? 어째서 그에 대해서는 그렇게 사람들마다 입장이 갈리는가? 단순히 아이들 먹이는 문제만이 아닌 보다 근본적인 사회적 담론이 그 안에 있다는 것이다. 국가에 대한. 개인에 대한. 인간에 대한. 그것은 장차 우리 사회가 운영되는 원리이기도 하다. 신중한 선택과 판단이, 그 이전에 충분한 고민이 필요한 이유인 것이다. 중대한 기로에 서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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