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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4.10.12 08:54

나쁜 녀석들 2회 "짐승이 짐승을, 살인자가 살인자를 쫓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봐! 짐승이 사람으로 돌아오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맹수의 습성은 맹수가 안다. 살인자의 습성은 누구보다 살인자가 더 잘 안다. 그래서 아마 코난 도일의 소설 '셜록 홈즈'에서도 주인공 홈즈는 친구인 와트슨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을 것이다. 만일 자신이 탐정이 되지 않았다면 유럽최대의 범죄자가 되었을 것이다. 범죄자를 쫓다가 어느새 범죄자를 닮아가는 수사관의 이야기도 제법 흔하다.

오히려 경찰보다 더 살인자의 눈으로 살인자에 대해 빠르고 정확하게 파악해낸다. 살인자가 사용한 칼의 종류와 수법, 과정 그리고 그를 근거로 살인자에 대한 대강의 정보까지 읽어낸다. 살인자의 심리와 행동패턴을 꿰뚫고 그 동기와 목적과 아직 알려지지 않은 이전의 연쇄살인까지 유추해낸다. 아니 무엇보다 범죄자의 입장에서 가장 수월하게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조건을 본능적으로 찾아내는 장면에서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다. 설마 박웅철(마동석 분)이 초반 찾아가 다그치던 그 철물점 주인이 실제 연쇄살인범이었을 줄이야.

▲ 나쁜녀석들 포스터 ⓒOCN

섬뜩하도록 피가 흐르지 않던 액션에 비로소 온기라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지켜야 할 것이 있다. 간절히 응징하고 싶은 대상이 있다. 그들에게 폭력은 습관이었다. 살인 역시 이미 익숙한 일상에 불과했었다. 아무 이유도 목적도 없이 폭력을 휘두르고 누군가를 다치게 한다. 연출과 배우의 절제된 연기의 힘이었을 것이다. 그저 기계처럼 무심히 폭력을 휘두르던 정태수(조동혁 분)가 지켜야 할 여자 앞에서 냉정을 잃고 자신을 드러내고 만다. 비로소 폭력이, 범죄가 자신의 일이 되어 버리고 만다. 가해자에서 피해자의 절실함을 직접 맛보게 된다. 하기는 벌써 오래전 그는 자신이 저지른 행위의 결과를 직접 눈으로 확인한 바 있었을 것이다. 아직 아무도 알지 못하던 자신의 죄를 스스로 자백하고 처벌받으려 한 이유였다.

결국 그렇게 한 마리의 맹수가 다시 한 사람의 인간으로 돌아왔다. 물론 오래된 저주다. 사람을 짐승으로 바꾸어 놓는 저주가 그렇게 쉽게 한 번에 풀릴 리 없다. 또 한 마리의 맹수가 다시 인간이었던 자신의 일부를 드러내고 만다. 차라리 경찰인 오구탁(김상중 분)이 피도 눈물도 없는 괴물로 보일 정도다. 무고한 민간인을 범인을 유혹할 미끼로 삼아 위험에 노출시키는 비윤리적인 계획을 경찰청장인 남구현(강신일 분) 역시 범인을 잡겠다는 목적 하나로 용인하고 만다. 짐승은 사람의 모습을 찾아가는데 사람은 자꾸 짐승을 닮으려 한다. 그래도 사람을 22명이나 죽인 흉악한 연쇄살인범은 사람이 아닐 것이니 상관없는 것일까? 사람은 사람이 잡고, 짐승은 짐승이 잡는다. 괴물은 괴물이 잡는다.

치밀한 추리같은 것은 없다. 정교한 구조나 장치같은 것도 없다. 구성은 매우 단순하고 직선적이다. 그 나머지를 채우는 것이 스타일이다. 영상과 인물들의 심리와 그들이 보여주는 표정과 액션이다. 몇몇 대사들은 아주 의미심장하지만 드라마에서 그다지 큰 비중은 없는 것 같다. 그보다는 매우 거칠면서도 세련되게 감각적으로 보여지는 어떤 감정의 선이 드라마의 매력을 더한다. 드라마는 눈으로 보는 것이다. 반추하는 것이라 그 순간에 느끼는 것이다. 적당한 긴장감과 감정의 공조, 그리고 무엇보다 감각적인 쾌감에 주력한다. 주제나 내용보다 더 중요한 부분이다. 정작 쓸 말은 그다지 많지 않다.

아마 범인을 하필 사이코패스로 설정한 이유일 것이다. 다른 구구한 사연따위 필요없다. 범죄자의 과거나 현재의 심리 따위 결코 중요하지 않다. 살인자는 살인자다. 범죄자는 범죄자다. 아주 작은 여지조차 남겨두지 않는다. 수없이 많은 사람을 살해한 냉혹한 연쇄살인마가 고작 정태수의 폭력에 굴복해 살려달라 애원하고 있다. 대상을 최소화함으로써 드라마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보다 명확히 한다. 누가 주인공이고, 누가 드라마의 주역인가. 많은 수사물들이 쉽게 빠져들곤 하던 함정이었다. 차라리 범죄자가 주인공인 것 같다. 하기는 드라마에서 범인을 쫓는 자신들이 원래 형을 살던 범죄자였을 것이다. 범죄자는 그들만 있으면 된다.

다시 그들은 원래 있던 교도소로 돌아가게 된다. 도끼를 사냥했으면 사냥개는 삶는 법이다. 더 이상 쓸모가 없으면 요긴한 사냥개도 솥에 넣어 함께 삶게 된다. 감옥에 있어야 할 범죄자가 거리를 마음대로 활보해서는 안된다. 아무리 경찰에 협력하여 범죄자를 쫓는다고 원래 그들이 있어야 할 곳마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더욱 절박한 상황으로 몰아넣는다. 한 번 나와봤기에 그 안은 더 답답하고 숨이 막힌다. 겨우 잡았던 희망도 놓기 싫어진다. 분노는 한순간이다. 희망이란 인간에게 가장 잔인하고 지독한 구속일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어디 다른 나라의 근사한 드라마 시리즈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미 케이블드라마는 공중파 드라마와는 또다른 한국대중문화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공중파에서는 불가능한, 그러면서도 공중파에서도 보기 힘든 완성도의 드라마가 속속 제작되어 방영되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단연 백미라 할 만하다. 짜릿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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