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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칼럼
  • 입력 2014.08.25 07:59

대중권력과 왕따, 국민과 세월호 유가족의 고립에 대해

딸을 잃은 아빠에게 아빠로서의 자격을 묻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근대 이전, 아니 지금도 문명의 수용이 더딘 일부 지역에서는 법과 공권력 대신 지역사회의 공감과 관습에 의지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잘 알지도 못하고 멀게만 느껴지는 법이나 공권력보다는 매일 얼굴을 마주하고 함께 일을 도우며 시시콜콜한 일등까지 모두 알고 있는 이웃이 더 익숙하고 편리한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한국사회의 인정이라는 것이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따로 명문화된 객관적 규범이나 규준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권한과 책임이 명확하게 정의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구성원 개인의 판단에 의해 모든 것은 결정되고 집행된다. 더욱 집단내 구성원과의 관계가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내가 베푸는 선의 만큼 내게도 선의로써 돌아오기를 바란다. 보편적 규준에 따른 도덕적 판단이 아닌 관계의 보상을 노린 계산된 선의다. 그것이 도덕적으로 강제되기도 한다. 집단에서 관계의 개선은 구성원의 의무이기도 하다.

뒷담화란 바로 그같은 집단의 권력을 확인하고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구성원 다수가 모여 집단 안팎의 대상들에 대한 판단과 평가를 수집한다. 그리고 모두의 의견으로 결론을 내리게 된다. 어려운 이들을 돕고, 선한 이들을 상주고, 부적절한 이들에 대해서는 벌을 내리고. 그 벌이란 명백한 과오가 확인된 경우가 아니라면 대개는 따돌림이었다. 전통사회에서, 더구나 노동집약적인 1차산업이 주를 이루던 향촌사회에서 집단으로부터 따돌려진다는 것은 바로 생존의 위협으로 이어졌다. 농사를 지으려 해도, 물고기를 잡으려 해도, 하다못해 삯일을 하려 해도 이웃의 인정과 동의가 있어야 가능했다.

집단으로부터 배척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개인은 집단과 구성원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항상 거스르지 않도록 눈치를 살피고, 집단내 구성원들이 원하는 말과 행동들만을 보여주어야 했다. 집단을 거스르거나 집단을 불편케 하는 다른 집단이나 개인들에 대해서는 마찬가지로 함께 적의를 드러내며 말과 행동을 같이 해야만 했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이 말이 곧 어떤 명제에 대해 그 정합성을 판단하는 당위처럼 여겨지는 것은 그 주체가 바로 판단의 주체인 '모두'이기 때문인 것이다. 모두가 그렇게 여기고 있으므로 따라야 한다. 모두의 판단을 따르지 않는다면 모두를 거스르는 것이다. 모두가 그를 응징할 것이다. 하기는 누군가 굳이 그렇게 말하지 않더라도 무의식중에 먼저 그렇게 자신의 생각을 맞춰가고 있을 것이다. 누구도 집단으로부터 유리되거나 고립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바로 왕따가 발생하는 이유일 것이다. 말 그대로다. 왕따야 말로 집단이 개인을 응징하기 위한 가장 1차원적인 응징수단 가운데 하나였다. 누구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고 누구도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는다. 조금의 도움도 주거나 받지 않는다. 전통사회에서였다면 당사자는 생존의 위협을 느껴야 했을 것이다. 다만 여기서도 두 가지 선택이 있을 텐데, 한 가지는 원래의 의도대로 상대가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한다면 충분히 응징을 가했다 여겨질 경우 용서하고 다시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그럼에도 본보기를 위해서라도 끝을 보려는 것이다. 왕따로 인해 때로 극단적인 결과로 이어지곤 하는 것은 역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집단이란 또한 권력이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권력의 속성이다. 권력은 대상을 필요로 한다. 확인하고 과시하고 싶어한다. 권력이 여기에 있음을 알리고 싶어 한다. 권력의 크기를, 가치를, 무게를, 그 무서움을. 그리고 권력에 이끌린다. 중독이다. 놓치고 싶지 않고 반드시 가지고 싶다. 권력의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권력에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어째서 평범하고 선량한 사람들이 그토록 쉽게 왕따에 동참하거나 최소한 방관하는 모습을 보이는가. 왕따당한 피해자를 비난하고 가해자들을 동정하고 연민한다. 왕따의 피해자가 오히려 가해자가 되는 경우도 결국 이유는 같다. 역설적이게도 자신에게 가해진 폭력을 통해 저항할 수 없는 권력의 힘에 매료되어 버린 것이다. 승자의 편에 서고 싶다. 강자의 편에 서고 싶다. 권력을 가지고 싶다.

조금 더 범위를 넓혀 보자면 노조가 국민이 될 수 없는 것은 바로 그래서일 것이다. 장애인도 그래서 국민이 될 수 없는 것이었다. 최소한의 생존을 위해 파업하는 노동자들에게 국민을 앞세운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 거리로 나선 사람들에게도 국민의 삶과 권리를 내세우며 윽박지른다. 그리고 동참한다. 그로 인해 내가 성가시다. 시끄럽다. 불편하다. 피해가 온다. 철저히 저들과 국민인 자신을 분리하려 한다. 최소한 국민이란 최고 권력자마저 눈치를 보아야 하는 대단한 존재일 것이다. 국민이 아닌 다른 대상을 판단할 수 있고, 평가할 수 있으며, 윽박지를 수 있다. 마음대로 할 수 있다. 판단의 주체가 되어야지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대한민국이란, 대한민국의 국민이란 항상 나보다 더 크고 가치있는 대단한 존재일 것이다.

세월호 희생자와 유가족에 대한 동정이 그들의 요구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국민의 삶을 살피기 위해 시장을 찾는다. 그러나 그 국민에 세월호 희생자와 유족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 희생하고 양보하라는데 유가족을 위해서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 결국 유가족의 의지를 꺾기 위해서도 국민의 이름이 동원된다. 국민 역시 그러한 의도에 상당부분 동의하고 있는 중이다. 세월호 희생자와 유가족을 동정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내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여야 한다. 타자다. 남이다. 타인과는 어떤 이익도 손해도 공유할 수 없다. 내가 낸 세금과 내가 가지지 못한 기회로써 상처를 보상해야 한다면 그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왕따의 논리와 같다. 그를 위해 조그만 꼬투리라도 찾으려 한다. 하다못해 이혼경력과 노조가입까지도 그를 비난할 이유가 된다. 순결하지 않다면 그 어떤 주장도 요구도 인정할 수 없다.

어째서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순수성과 진정성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이토록 많은 것인가. 대상이기 때문이다. 주체가 아니다. 바로 국민인 자신들에게 평가되고 판단되어야 할 객체다. 채점자의 입장에서 20문제를 풀어 90점을 맞았다면 18문제를 맞춘 것이 아니라 2문제를 틀린 것이다. 객관과 중립을 앞세운다는 것이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세월호 참사의 당사자들일 텐데도 그들에게는 타자일 국민들에게 그 슬픔과 아픔까지 계량되어야 한다. 듣는 것조차 그같은 판단이 내려진 나중의 일이다. 그것을 강요한다. TV드라마를 보면서도 허구의 인물들에 이입하여 울고 웃으며 공감하는 것이 바로 사람일 것이다. 어디까지 철저히 남이 되어야 이처럼 사람을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을까. 그들과 자신들은 전혀 다른 존재일 것이다. 그와 같은 불행한 일이 나에게 일어날 리 없다. 그것은 오로지 그들만의 일에 불과하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세월호 유가족들의 요구에 동의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일반인 유가족 가운데 단원고 유가족들과 입장을 달리하여 성명을 내놓은 이들도 있었다. 다를 수밖에 없다. 아니 달라야 한다. 모든 인간은 다르다. 모든 개인은 각자가 독립된 단위다. 인간이 존엄한 이유다. 다만 그렇기 때문에 설득하고 납득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 세월호 유가족들의 요구가 잘못되었다면 왜 그런지. 세월호 유가족들의 요구가 지나치다면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지.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그것은 하나의 사회를 이루고 있는 구성원으로서 당연한 의무이기도 할 것이다. 그들을 같은 '국민'으로 여기고 있다면. 대상이 아닌 주체로써 존중하고 있다면. 다른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국민'들 자신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국민을 내세워 외면하고, 국민의 이름을 앞세워 억압하고, 국민들 자신이 그들을 윽박지르고 있다. 국민을 위해서. 국가를 위해서. 그리고 국민과 국가라는 말에 취해 유가족 역시 자신들과 같은 국민임을 잊고 만다. 국민의 자격으로 일방적으로 평가하고 판단하고 단정짓고 단죄한다. 국민의 권리다. 어디서 이런 모순들은 비롯되었을까? 의도도 저열하지만 그에 넘어가는 개인들 역시 비루하기 이를 데 없다. 국민이란 무엇일까? '우리'란?

부대를 위해서, 내무반을 위해서, 같이 복무하는 모두를 위해서. 하지만 그 안에는 왕따의 피해자 역시 구성원으로서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자의로 부대를 벗어난 것이 탈영이라면 피해자 역시 같은 부대원인 것이다. 전우를 공격한 것이 죄가 된다면 그를 따돌린 부대원들 역시 전우를 따돌린 것이다. 그래서 분노한다. 그런데 어째서 왕따에 동참하거나 방관했던 사람들은 그러한 사실에 분노하지 않았는가. 그것을 막지 않았는가.

분리한다. 격리한다. 고립시킨다. 자신은 항상 유리한 곳에 위치한다. 모두라는 이름. 우리라는 이름. 그리고 그것이 가지는 힘. 권력. 폭력. 인터넷은 항상 뜨겁다. 그 '모두'와 '우리'가 쉽게 결집하는 곳이 바로 인터넷인 까닭이다. 왕따라는 이름조차 없이 누군가를 집단으로 공격하고 상처준다. 때로 국가와 국민의 이름까지 빈다. '국민'이란 이름에 대해서. '국민'을 위해 과연 무엇을 해야 하고, '국민'은 과연 무엇을 해 줄 수 있는가.

사실상 고립되었다. 국민으로부터 격리되어 있다. 일방적으로 평가받고 판단되며 자격을 묻는다. 국민의 자격이 아니다. 대상으로서의 자격이다. 유민아빠 김용오씨의 개인사로 온통 시끄러운 이유다. 세월호 유가족으로서의 자격을 묻는다. 딸을 잃은 아빠에게 아빠로서의 자격을 물으려 한다. 세상이 참 잔인하다. 인간이 참 잔인하다. 생각하게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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