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1.08.03 09:12

스파이명월 "시청자의 몰입을 거부하는 드라마!"

배우만이 아닌 시청자도 몰입은 필요하다!

 

배우들만 몰입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시청자에게도 몰입은 필요하다.

드라마란 허구다. 만들어진 이야기다. 등장인물들 역시 작가의 상상의 산물들이다. 하지만 많은 경우 시청자들은 마치 그런 것들이 실제의 이야기이고 실제 존재하는 사람인 양 여기고 느끼고 반응하게 된다. 어째서일까?

자발적 동의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극중의 상황에, 인물들에 동의하게 되는 것이다. 한명월(한예슬 분)이 강우(문정혁 분)를 유혹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는 모습들에, 그리고 강우가 그런 한명월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는 것에. 80년대 남파된 간첩 한희복(조형기 분)과 리옥순(유지인 분)에 대해서도. 실제 그럴 수 있다. 그래서 지금 저와 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지금 저 상황들은 지금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다.

그냥 되는 것이 아니다. 그를 위한 준비가 필요하다. 그렇게 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것이 설정이며 장치들이다. 어떻게 한예슬은 남쪽으로 내려왔고, 어떤 지령을 받았으며, 그것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최류(이진욱 분)와 한희복, 리옥순은 그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어떠한 상황에서 한예슬은, 강우는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그것이 개연성이다. 점차적으로 드라마 안으로 시청자를 몰입하도록 끌어들이는 통로. 그를 통해 시청자는 드라마를 보는 동안 현실을 벗어나 드라마 안에서 살게 된다. 말하는 이입이라는 것이다.

한예슬이 된다. 강우가 된다. 혹은 한희복이 되고 리옥순이 된다. 최류가 된다. 그래야 그들이 느끼는 감정이 바로 내가 느끼는 감정처럼 여겨지게 될 것이다. 그들 앞에 놓인 상황들이 실제 내 앞에 놓은 상황들처럼 여겨지게 될 것이다. 놀라고 당황하고 화내고 슬퍼하며 울고 웃고 사랑하고 기뻐한다. 그것이 재미다. 드라마를 보는 이유다.

이야기라는 것은 결국 궁극적으로 듣는 이로 하여금 이야기에 공감케 함으로써 그 감정을 직접 스스로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놀라운 이야기를 할 때는 놀라도록 하려는 것일 테고, 무서운 이야기를 하는 것은 무서움을 느끼도록 하려는 것일 것이며, 이야기 속에 빠져들어 슬픔을 느끼게 될 때 그것을 비극이라 하고, 웃음을 웃을 수 있게 될 때 그것을 희극이라 부른다. 역시 공감을 위해서는 동의가 필요하고 동의를 위해서는 극에 몰입하기 위한 준비와 과정이 필요하다. 마치 배우가 자신의 배역에 몰입하듯이.

문제는 과연 몰입이 되는가? 솔직히 한예슬이나 문정혁 등 출연배우들에 대한 연기력 논란에 대해 어느 정도 납득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과연 이런 시나리오로 제대로 캐릭터를 분석하고 이해해서 몰입해 연기할 수 있을까? 노래를 불러도 매번 비트가 다르고 리듬이 다르고 멜로디가 다르면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가사가 이어지지 않는데 거기에 감정을 실어 부르라는 것은 도저히 무리다.

어제의 전개가 오늘과 다르다. 지난주의 내용은 또 어제와도 다르다. 중간과정이 없다. 그렇게 되기까지의 설득력이 없다. 과연 어째서 그렇게 되는가? 어떻게 그렇게 되고 마는가? 한명월이라는 캐릭터에 대해서도, 강우라는 캐릭터에 대해서도 너무나 설명이 부실하다. 어떤 캐릭터인가? 어떤 서사를 갖는 존재인가? 전혀 묘사가 되어 있지 않다. 단편적인 조각 뿐. 단편적인 반응의 조각들만이 여기저기 산만하게 흩어져 있을 뿐이다. 그 어디에서 한명월을 느끼고 강우를 느껴야 하는 것일까? 강우가 병풍이 되고 한명월이 개인기로 소모되고 마는 이유인 것이다.

차라리 리옥순과 한희복을 주인공으로 했으면 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그나마 두 사람에게는 이유라는 것이 있다. 서사가 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는가 하는 설명이 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이라는 묘사가 있다. 기대가 되고 납득이 된다. 하지만 강우와 한명월은?

분명 에피소드 하나하나는 재미있다. 장면 하나하나만 따로 떼어 놓고 보면 그다지 나쁘지 않다. 그런데 왜 다 보고 나서는 재미없다 하는가. 도무지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으니까. 전혀 그 이야기들에 동화되지 못한 채 겉돌고 있으니까. 원래 전혀 상관없는 남의 이야기는 재미없는 법이다. 전혀 누군지 모르는 남이 길가다 넘어졌다 하면 웃기는가?

비일상의 놀라움으로 시작했으면 어느 시점이 되면 일상의 안정을 통해 이야기를 밀착시켜야 한다. 그것은 비일상의 놀라움에서 벗어나 보다 이야기에 자기를 몰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핸 배려이며 장치인 것이다. 기술이다. 지금쯤이면 어느 정도 강우와 한명월의 관계도 안정되어야 한다. 안정되어 더욱 시청자로 하여금 두 사람과 그 관계에 대해, 현재의 상황에 대해 보다 적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적응한 가운데 그러한 공감으로부터 재미를 느끼도록 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그런데 여전히 두 사람은 정신없이 분주하기만 하니.

겨우 집에 익숙해질만 하니까 벽이 허물어지고. 겨우 마음 붙이고 살만 하니까 바닥이 꺼지고. 이제는 마음을 놓을만 하다 싶으니까 지붕이 무너지고. 이제는 누워 자면서도 불안하다. 언제 이 집이 어떻게 되지는 않을까? 언제쯤에나 한예슬과 강우는 안정을 찾을 것인가?

역시 딱 두 회 짜리 시나리오였다. 플롯 자체가 미니시리즈로 만들 수 있는 플롯이 아니었다. 다시 짰어야 했다. 기왕에 놀래키며 시작하는 것 어디 쯤에서 안정을 찾게 하고, 익숙함 속에 편안하게 공감을 느끼도록 할 것인가. 허둥대며 이야기를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준비하고 그에 맞춰갈 수 있어야 한다. 잘 쓴 드라마는 바로 그런 안정기가 있기 마련인데. 여전히 빅뱅이며 창세기다.

답이 없는 드라마라 할 것이다. 어지간한 드라마는 재미있게 보려면 재미있게 볼 수 있다. 세상에 재미없는 드라마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렇게 맥이 끊기는 드라마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다. 겨우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 놓으면 바로 얼마뒤 드라마로부터 내쫓겨 버린다. 새로운 공감이 필요하다고. 새로운 동의가 필요하다고.

어쩌면 처음부터 눈치챘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때까지는 발칙하고 도발적인 자유로운 개성이라 여겼었는데. 그러나 그것이 한계였다. 그것이 작가의 전부였었다.

아이디어는 구슬이다. 기술은 구슬을 꿰는 끈이다. 기술 없는 아이디어는 아무것도 아니다. 기술이 뒷받침되었을 때 아이디어는 원래 의도대로 재미도 줄 수 있다.

후회하는 중이다. 왜 이 드라마를 보았을까? 어째서 지금까지도 이 드라마를 보고 있을까? 그래도 한희복과 유지인 커플이 귀여웠으니까. 이들만을 주인공으로 새로 드라마가 만들어진다면. 한예슬이며 문정혁이며 그저 화보만 보면 좋지 않을까?

연기력 논란은 의미가 없다. 시청자도 몰입 못하는 드라마 연기자라고 몰입이 가능할 리 없다. 스스로 완벽하게 드라마속의 인물이 되지 못하는데 무슨 연기가 가능할까?

나로서도 이 이상은 무리일 것이다. 포기다. 어떻게 해도 평가가 안 된다. 공포다.

모바일에서 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