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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1.07.29 07:26

시티헌터 "너무 급한 졸속마무리, 뱀꼬리를 그리다."

어느새 잊혀져버린 남자 박무열의 불행에 대해서...

 
바로 이런 것들이 필자로 하여금 출생의 비밀이라는 흔한 전개에 회의를 갖게 만드는 것이다. 도대체 이경희(김미숙 분)의 남편이자 이윤성(이민호 분)의 원래 법적인 아버지였던 박무열(박상민 분)은 어디로 간 것일까? 누구도 그의 이름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처음 이윤성의 출생의 비밀이 드러났을 때 많은 남자들이 그렇게 박무열을 비웃었었다. 호구짓했다고. 어떻게 남의 아이를 임신한 여자를 사랑한다고 아이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가. 결국 남의 자식인데 그야말로 남 좋은 일만 하는 게 아닌가. 문득 여러 해 전 친아버지가 아니라고 길러준 아버지를 재산까지 상속받자 버리고 이민을 떠나버린 자식들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이윤성은 그를 두고 전혀 상관없는 남이라 말한다. 이경희는 단지 자신과 이윤성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라 말한다. 이진표(김상중 분)도 더 이상 이윤성을 박무열의 아들이라 말하지 않는다. 최응찬(천호진 분)도 역시 마찬가지다. 과연 박무열의 자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물론 낳아준 아버지는 최응찬이다. 길러준 아버지는 이진표다. 그러나 그의 태어남을 기뻐해준 것은 박무열이었을 것이다. 하다못해 이경희의 입에서는 박무열의 이름이 나왔어야 했건만. 이진표 역시 박무열을 잊고 있지 않았다면 그의 이름을 입에 올렸어야 했다. 그러나 이 순간 박무열이란 이윤성과는 전혀 상관없는 타인일 뿐. 그야말로 호구짓 아니겠는가.

어쩌면 이진표가 이윤성을 납치한 이유 가운데도 모든 일의 원흉인 최응찬의 아들이 박무열의 아들로 자라는 것을 참고 보아 넘길 수가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대로 이경희와 함께 살게 했다면 이윤성은 박무열의 아들일 수 있겠지만 이제는 단지 길러준 정과 낳아준 천륜 사이에서만 고민하게 되었으니. 그것도 박무열에 대한 의리였을까?

뭔가 굉장히 고약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게 남자의 운명인가 싶기도 하고. 이래서 남자들은 가부장적 질서라는 것을 만들었구나. 그렇게 피에 집착하고 마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리라. 기껏 남의 아이임을 알고서도 아들로써 받아주고 태어남을 진심으로 기뻐해 주었는데 피가 이어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완전히 타인이다. 드라마에서 가장 불쌍한 캐릭터이리라. 목숨도 잃고, 아내도 잃고, 자식까지 잃고. 역시 급조한 엔딩인 때문일까?

급조했다는 또 한 이유는 다름아닌 최응찬에 대한 응징 때문이다. 응징이란 대상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다. 고통스럽게 하고 죄에 대해 참회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가 원하는 것은 이미 다 해 보았다. 아무런 여한이 없는 상태에서 끝을 내주는 것이 어떻게 응징일까? 아예 자기연민에 빠져서 그동안의 죄책감으로 자신의 죄를 대신하려는 것을. 오히려 그런 식으로 외부의 힘에 의해 비리가 드러나고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은 그러한 자기연민을 확인시켜주는 결과에 불과하다.

실제 드라마의 엔딩에서도 최응찬의 딸 최다혜(구하라 분)는 전혀 아무런 그늘도 어색함도 없이 밝은 모습 그대로 바리스타로서의 길을 가고 있었다. 이경희에게 편지를 보내는 최응찬에게도 더 이상 죄로 인한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후련해하고 있다. 마치 영화 <밀양>을 보는 느낌?

나는 죄를 지었다. 죄로 인해 그동안 고통을 받아왔다. 항상 반성했고 피해자에게 사죄해 왔다. 이제 네가 찾아와 나를 벌하겠다 하니 속이 시원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실제적인 고통이나 피해를 입히는 그런 응징이 아니다. 무엇보다 대통령까지 되었고 하고 싶은 것은 다 했으니 미련이 남을 일도 없다. 용서하라고 하는 것일까? 그렇게 죄책감을 느껴왔고 지금은 국민을 위해 열심히 잘 하고 있으니. 이런 정도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그래서 이윤성은 최응찬의 앞을 막아섰던 것이었고, 이진표 역시 최응찬이 아닌 이윤성을 쏘고는 경호원들 앞에 빈 총을 겨누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상 최응찬이 치른 댓가는 아무것도 없었다. 전혀 아무런 댓가도 치르지 않고, 그 어떤 고통도 없이 자기 뜻대로 마무리지었다. 이진표가 말한 가장 무서운 적이라는 표현이 이런 것일까?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어 버렸다.

아마 중간이 생략되어 버린 때문일 것이다. 최응찬이 용서받기까지. 혹은 최응찬을 용서하기까지. 이윤성을 보면서도 전혀 박무열에 대한 미안함이나 안쓰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최응찬에게. 이경희에 대해 떠올리면서도 그녀의 남편이었던 박무열이 자신의 계획에 의해 그렇게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갔어야 했던 일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혈연이란 그렇게 무섭다. 박무열이 짊어져야 했던 무게도, 박무열에게 지웠어야 했던 무게도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낳아준 아버지이고 낳은 아들이기에. 차라리 최응찬을 위해 죽을 수 있다. 그 과정이 설득력있게 그려졌다면.

이진표 역시 최응찬은 용서할 수 없지만 이윤성이 있기 때문에 그를 용서할 수 있다. 이윤성이 최응찬을 대신해 총을 맞는 순간 그의 머릿속에는 이윤성을 살릴 생각 뿐이었다. 최응찬조차 안중에 없었다. 이윤성이 시티헌터로써 범법자로써 쫓기기보다는 모든 죄를 자기가 안고 죽겠다. 이윤성은 자신이 바라는대로 평범하게 행복하게 살으라.

결국은 모든 결론은 최응찬과 이윤성의 관계에 의해 마무리지어졌다. 모든 죄도 모든 벌도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천륜 아래 모든 것이 흐지부지되는 이유가 되고 말았다. 그게 혈연이다. 피다. 대의를 대신하는 명분일 것이다. 대부분의 출생의 비밀이 뜻하는 바다. 피가 모든 비밀을 말해준다. 피가 모든 갈등을 해결해준다. 지독스런 혈연주의.

어쩐지 죽어간 이경완(이효정 분)과 천재만(최정우 분)이 불쌍해지려 한다. 불구가 된 데다 아들까지 잃은 김종식(최일화 분)이나 범죄자가 되어 감옥에 갇힌 서용학(최상훈 분)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단지 이윤성을 아들로 두지 않았기에 목숨까지 잃고 사회적으로 매장당하는 처지로 내몰리고 말았다. 이윤성만 그들의 아들이었다면. 자식은 잘 두고 봐야 한다.

비리를 저질렀어도 아버지니까. 부정을 저질렀어도 아버지이고 자신이 괴로울 테니까. 김나나(박민영 분)의 말처럼 그래서 김영주(이준혁 분)도 자신의 아버지가 지은 죄를 은폐하고 있었다. 가족이니까. 한 번 얼굴도 본 적 없어도 생물학적인 아버지니까. 온정주의. 혈연주의. 가족주의. 김나나라는 캐릭터의 한계가 드러난다.

생각을 잘못했다. 파트너라 생각했었다. 시티헌터 이윤성의 동반자일 것이라고. 그러나 드라마의 말미에 더 이상 시티헌터는 없고 자연인 이윤성만이 있듯, 김나나는 시티헌터의 파트너가 아닌 단순한 자연인 이윤성의 연인에 불과한 것이다. 인정에 이끌리며 감정에 솔직한. 전사는 될 수 없다. 이윤성이 그녀를 애써 떠나보내고, 다시 시티헌터를 그만두고서 만나는 이유가 있다. 가장 예상에서 벗어난 캐릭터이고 결말이었다.

그저 뻔한 멜로. 더 이상의 엔딩은 없었던 것일까? 여기까지 왔으면 뭔가 다른 엔딩을 생각해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광기에 사로잡힌 이진표는 죽고 이윤성과 김나나는 일상으로 돌아와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다른 등장인물들 역시. 아쉬움이 크다.

어쨌거나 참 어설펐다. 누가 극비문서를 그런 식으로 작성하는가? 만일 내 부하직원이 그런 식으로 문서를 작성했다면 바로 집으로 돌려보냈다. 무언가 구체적인 기록 속에서 단서도 찾아내고 궁리도 하고 해야 할 텐데 아예 보는 사람 이해하기 쉬우라고 사진까지 넣어 일목요연하게 정리까지 해 놓았다. 오피스 프로그램으로 작성한 것이었을까? 웃음이 나왔다.

더구나 대통령을 경호하면서 멋대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김나나는 무엇인가? 자기가 맡은 구역에서 혹시 만일의 사태가 벌어진다면? 복수의 경호원을 배치하고 있는 것은 각자의 영역에서 보다 집중해서 주위를 살피라는 뜻일 것이다. 더구나 이제 갓 대통령의 경호를 맡은 입장에서. 이미 시티헌터로 의심받고 있는 상황에서 당당히 청와대를 누비는 이윤성의 모습은 무모함을 넘어서 미친 것처럼 보였다. 아마 대통령이 자기 아버지라는 사실을 믿고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무너진 개연성에, 허술한 설명과 묘사에, 그동안 이것저것 사회적인 문제들을 비판하느라 이야기를 너무 키운 나머지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모양새다. 끝은 내야 하는데 남은 분량은 없고. 벌린 건 많은데 제대로 마무리하자니 시간도 부족하고. 그래서 너무 크게 벌리는 건 좋지 않다.

크게 벌리느라 드라마를 잃어버리더니 다시 드라마로 돌아와서는 여유가 없어 드라마를 되돌릴 새가 없다. 적당히 죽을 사람은 죽고, 사라질 사람은 사라지고, 해피엔드가 필요하면 그에 끼워맞추며. 그 가운데서도 시티헌터란 더 이상 없다. 더 이상 시티헌터는 사회의 악을 응징하지 않는다. 가장 아쉬운 부분일 것이다. 시티헌터는 남아 있어주기를 바랬는데.

그래도 그동안 즐거웠다. 공중파 드라마에서 보기 힘든 사회의 여러 부분에 대한 가차없는 비판도 통쾌했었고. 서툴고 어설프지만 그에 대한 응징역시 시원했었다. 좋았던 것과 안 좋았던 것을 서로 비교하면 그래도 전자가 조금은 더 많았으리라. 위안을 삼는다. 잘 보았다. 좋았다. 굿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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