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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4.06.23 09:27

[김윤석의 드라마톡] 정도전 48회 "정도전의 선의와 괴물이 만들어지는 까닭"

이방원 마침내 왕자들과 거병을 모의하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정도전(조재현 분)식 민본의 한계는 바로 계몽일 것이다. 동등한 눈높이에서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이 아닌 보다 높은 곳에서 일방적으로 베풀려 한다. 분명 자식을 생각하는 부모의 마음일 테지만 일방적인 판단과 자의적인 간섭은 오히려 자식을 병들게 만들 뿐이다. 자식을 상처입히면서도 그것이 자식을 위한 최선이라 믿어 버린다.

성리학이 말하는 민본의 한계이기도 하다. 백성은 결코 임금이나 사대부 등과 같은 주체적 존재일 수 없었다. 일방적으로 가르치고 이끌어주어야 한다. 먹이고 입히고 일깨워주어야 한다. 임금은 어버이이고 대부는 형과 같다. 지금의 형제관계를 생각해서는 안된다. 전근대사회의 가부장적질서는 아버지를 대신하는 큰형의 경우 집안을 위해 동생들의 인신과 생명을 구속하고 거둘 수 있는 권한까지 부여받고 있었다. 결코 넘볼 수 없는 천부의 질서였다. 어찌 자식이 되어 부모를 거스르고 아우가 되어 형을 범할 수 있겠는가.

▲ KBS 제공
그것이 그대로 주위와의 관계에서도 적용된다. 이성계(유동근 분)는 사적으로 주군이며 공적으로는 조선의 어버이인 임금이다. 거스르는 법 없이 항상 복종하며 순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마치 아버지의 사랑에 기대는 철이 덜 든 자식과 같다. 이성계가 보낸 편지에도 참지 못하고 눈물을 보이고 만다. 반면 이성계 바로 아래 자신이 있으니 그 밖의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생각하는 바에 일방적으로 동조하고 따라야 할 수하로써만 여기고 대하게 된다. 심지어 임금의 아들인 정안군(이방원 분)조차 아버지인 임금을 대신한 자신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

정도전이 폭주하는 이유다. 그런 점에서 정도전은 이인임과 닮았다. 이인임의 폭주 역시 자기에 대한 확신에서 비롯되었다. 자신의 권력과 지위, 무엇보다 능력을 의심하지 않았다. 아니 의심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의심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을 충분히 자신이 통제할 수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노회하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적이란 보이지 않는 곳으로 내치기보다 항상 가까운 곳에 두고 감시하는 것이다. 이인임과 다른 점이라면 정도전이 확신하는 자신이란 권력과 지위, 능력 이외에 자신이 가진 정의 역시 포함된다는 점일 것이다.

자신의 선의를 믿는다. 모두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는 자신의 올바른 의도와 동기를 의심하지 않는다. 당장은 아닐지 몰라도 언젠가는 모두가 알아줄 것이다. 결과가 모든 것을 말해줄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악역을 자처한다. 자신의 악의조차 결국은 선의를 위한 어쩔 수 없는 희생이라 여기며. 그를 위한 모든 협잡과 모략과 기만과 전횡마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며 과정일 뿐이라 자위한다. 그래서 더욱 궁지로 몰릴수록 급해지고 난폭해진다. 결과만이 자기를 증명할 수 있기에 모두가 인정하지 않는다면 더욱 결과에 집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나마 지금은 이성계가 자신을 전폭적으로 믿어준다.

오히려 더 안좋다. 이인임은 정치적으로는 무색무취였다. 그래서 호오는 있을지언정 선악은 없었다. 굳이 자기에게 위해만 되지 않는다면 일부러 적대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정도전은 스스로 정의롭기에 모든 것을 선악으로 나누려 한다. 자신의 선의에 대한 확신은 선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모두를 악으로 여기게 한다. 오랜 동지였던 조준(전현 분)마저 요동정벌에 대한 생각이 달라 서로 갈라서게 되자 서슴없이 협박의 말을 내뱉고 만다. 정치인으로서 실격이다. 정치에 선악이 있어서는 안된다. 어쩔 수 없이 적을 만들더라도 필요하다면 그 적마저 살려두고 이용하지 않으면 안된다. 조준마저 억지로 밀어내고 만다.

왕자들의 세력이 결코 만만치 않다. 이성계 자신마저 만일의 사태를 우려할 정도로 왕자들이 보유한 사병과 그 실력은 함부로 여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왕자들을 상대로 그들이 가진 힘의 전부라 할 수 있는 사병을 빼앗으려 한다. 한바탕 충돌을 피할 수 없는데 오히려 안에서는 적을 늘리고 있다. 이성계 한 사람만 믿는다. 미숙함이며 순진함이다. 말 그대로다. 정도전의 총재정치란 바깥일에 바쁜 아버지를 대신해서 큰형이 집안을 책임지는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최소한 드라마에서 묘사된 바로는 그렇다. 이성계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요동과 인접한 원의 옛도읍 북평에는 주원장의 아들 가운데 가장 용맹하다는 연왕 주체가 버티고 있었다. 원의 잔당을 추적하는 전진기지이며 연왕 자신이 수많은 전장을 누비며 단련한 역전의 노장이었다. 장차 압도적으로 우위이던 건문제의 토벌군을 상대로 남경을 함락하고 마침내 황제의 자리에까지 오른 영락제와 그의 군대가 바로 가까운 북평에 주둔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동을 공격하는 순간 북원을 향하던 연왕의 군대가 요동을 향하게 된다. 주원장이 죽고 난 뒤에도 왕들과 건문제 사이에 갈등이 표면화되기에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 요동은 알았지만 정작 명의 국내상황은 알지 못했다. 연왕은 매우 사나운 인물이다.

참아야 한다. 참고 견뎌야 한다. 참을 수 있을 만큼만 참는 것은 결코 참는 것이 아니다. 참을 수 없는 한계까지 참고 또 참으며 인내하는 것이야 말로 참는 것이다. 모욕을 모욕이라 여기지 않고 수모를 수모라 여기지 않으며 마지막까지 냉정하게 이해득실만을 따진다. 이성적인 태도다. 당장 억울함을 찾고 분노를 누르면 고작 사신으로 간 몇 사람의 목숨만 사라지고 말 뿐이다. 하지만 참지 못하고 명과 전쟁을 벌이거나 하면 그 몇 배, 아니 몇 만 배의 목숨이 사라질 수 있다. 그를 위해 소모되는 물자만도 상상을 초월한다. 전쟁을 일으켜 승리까지 거두면 잠깐은 통쾌하겠지만 그로 인해 백성들이 흘려야 할 피와 눈물은 누가 보상할 것인가.

최악의 평화가 최선의 전쟁보다 낫다. 위정자야 어떨지 몰라도, 혹은 많이 배우고 많이 아는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이들이야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결국 전쟁에 나가 싸우는 것은 수많은 이름없는 백성들인 것이다. 물자를 징발하는 것도 모두 백성들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한 집안의 가장이 목숨을 잃고, 농사를 지어야 할 장정들이 불구가 되어 노동력을 잃어버리고, 남은 여자와 아이, 노인들은 의지할 곳을 잃고 절망에 신음한다. 요동을 정벌하는 일에 무슨 대단한 대의가 있기에 백성들이 그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인가. 조준이 정도전에게 묻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게 정도전이 이루고자 하는 민본의 대의란 무엇이냐고.

백성을 위한다. 나라의 장래를 위한다. 자기만족이다. 장래의 일은 장래에 결정한다. 임진왜란만 일어나지 않았다면 명과 조선에 의해 만주의 여진족은 충분히 통제되고 관리될 수 있었을 것이었다. 그것은 굳이 정도전이 걱정할 필요 없는 후대의 임금과 관리들이 고민하고 대처해나가야 할 문제다. 정도전이 어떻게 하든 그들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면 결국 겪고야 말 고난일 뿐이다. 내일은 내일에. 백성들의 일은 백성들에게. 앞서 말한 그대로다. 선민이다. 선지자이며 순교자다. 오만이고 독선이다. 그것은 누구도 아닌 단지 자신을 위한 기만일 뿐이다. 전장에서 죽고 먹을 곡식까지 빼앗겨야 하는 것은 정도전이 아닌 이름없는 백성들이다. 원래 그들을 위해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자 대의를 가슴에 품었었다.

왕자들이 마침내 마지막 발악을 위해 모인다. 말 그대로 발악이다. 이대로는 안된다. 이대로 참고만 있어서는 안된다. 사병은 왕자들의 목숨줄이다. 세자가 왕위에 올라 안정적으로 국정을 돌보려면 가장 먼저 왕권에 위협이 되는 경쟁자들부터 정리해야 한다. 죽이거나, 유배보내거나, 모든 지위와 권리를 빼앗고 서인으로 만들거나. 어떤 식으로든 신변에 위해가 가해지게 된다. 그런때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왕명으로 관군을 동원하여 벌주려는데 사병으로 그것을 막을 수 있다 여기는 자체가 사병이 혁파되어야 하는 당위를 보여준다 할 수 있다. 이대로 사병을 내놓는다면 왕자들은 끝이다. 절대 그렇게는 안된다.

이성계의 동의를 얻은 선제공격은 일견 성공인 듯 보인다. 직접 군을 이끌고 이방원의 사저에서 이방원과 사병들을 제압한다. 하지만 정도전에게도 그것은 막다른 골목이다. 타협할 여지는 사라졌고,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적대관계만 확인한 꼴이다. 뒤가 없다. 죽거나 혹은 죽이거나. 그런데 정도전은 어떻게 해도 왕자들에게 직접적인 위해는 가하지 못한다. 자신의 입장을 읽지 못했다. 아니면 이성계를 너무 믿었거나.

겨우 한 주 남았다. 숨가쁘게 달려온 시간들이 이제 겨우 한 주 분량만을 남겨놓고 있다. 하나의 권력이 끝나려 한다. 하나의 대의가 마무리되려 한다. 권력이 스러진 시체 위에 새로운 권력이 자라난다. 대의가 썩어 흩어진 위에 새로운 대의가 싹을 틔운다.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 역사의 윤회론일 것이다. 그 연속된 순간들을 지켜본다. 무심히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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