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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4.05.18 08:08

[김윤석의 드라마톡] 정도전 37회 "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해야만 하기에"

정도전의 귀양과 이성계의 낙마, 위기가 다가오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것도 없던 시절에도 정도전(조재현 분) 역시 대업을 꿈꿀 수 있었다. 정도전 역시 스스로 밥버러지라 말할 정도로 아무것도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에도 아니 그 시절에 이미 정도전은 꿈을 꾸고 있었다. 차라리 망상이라 해도 좋을 너무나 큰 꿈을.

여전히 권신 이인임의 위세는 대단했다. 고려를 지탱하는 기득권의 힘 역시 너무나 강고했다. 무엇보다 무려 500년 가까운 세월을 이어온 왕조였다. 고려의 하늘과 땅과 사람이 너무나 당연했다. 고려가 아닌 것이 오히려 낯설었다. 수백년의 세월과 익숙해진 사람들의 감성과도 맞서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고려가 아닌 새로운 세상을 설득할 수 있어야 했다. 경전이나 읊을 줄 아는 일개 유자가 감히 꿀 수 있는 꿈이 아니었다. 그런데 감히 꿈을 꾸었다.

▲ KBS 제공

과연 정도전이 일찌기 이성계(유동근 분)를 만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역사상 수많은 반역이 있었다. 그보다 몇 배나 더 많은 모의가 있어왔었다. 모의조차 하지 못하고 스러져버린 꿈들은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그런 것을 흔히 몽상이라고 부른다. 그저 꿈을 꾸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아니 아무것도 하지 못하기에 꿈이라도 꾸어보는 것이다. 백성들을 위해서. 죽어가는 백성들을 위해서 썩어빠진 세상을 뒤집고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꿈을 꾸어보는 것이다. 불의한 세상에 정의롭고자 하는 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발버둥일 것이다.

마찬가지다. 차이라면 정몽주(임호 분)에게는 정도전과는 달리 이성계가 없었다는 정도일 것이다. 고려의 군권을 한 손에 틀어쥔 이성계라는 실력자가 정도전과 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 정도전의 꿈을 현실로 이루어 줄 수 있는 힘이 뜻을 함께 하고 있었다. 그래도 정도전의 꿈은 이제는 한 번 꾸어도 좋은 실현가능한 꿈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몽주는 자신을 그토록 믿고 아껴주던 고려제일의 무장과 그의 병사들과도 맞서싸우지 않으면 안된다. 정몽주와의 우정을 돌아볼 여유가 있었던 정도전에 비해 정몽주는 그래서 더 필사적이다. 자신에게 허락된 것은 고려왕조를 지켜야 한다는 대의 하나, 그 하나만을 믿고 불가능에 가까운 싸움에 자신을 던지려 한다. 당당히 이성계와 맞서고자 한다.

바로 그것이 대의라는 것이다. 정의와는 사뭇 그 의미가 다르다. 정의가 개인적인 가치라면 대의는 보다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가치이며 지향이다. 시대의 요구에 대한 대답일 것이다. 지금 자신들에게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을 필요로 해야 하는가. 무엇을 지켜야 하고 무엇을 쟁취해야 하는가. 그런 점에서 사명이라고 바꿔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래서 대의에 매몰되었다 말하는 것이다. 시대에 휩쓸리고 만다.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고려인가, 아니면 새로운 왕조인가. 방관자가 되거나, 비겁자가 되거나, 아니면 스스로 피를 흘리고 묻히거나. 사대부이기에 꿈을 꾸고, 그 꿈을 위해 돌아보지 않고 최선을 다한다. 목숨까지 내건다. 우정도, 신의도, 양심도 모두 시대에 맡긴다. 슬픈 것이다. 지식인의 숙명이다. 누구보다 앞서 판단할 수 있는 그들이기에 누구보다 치열하게 시대를 겪을 수밖에 없다.

자신이 정몽주를 그렇게 만들었다. 오랜 친구다. 그래서 누구보다 정몽주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정몽주가 왜 그러는가도 알고 있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는가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유자이기 때문이다. 유자로서 정도전 자신도 그토록 가고자 꿈꾸었던 길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공민왕의 고명을 들으며 고려를 위해 한 목숨 바치는 그런 꿈을 꾸었던 적도 있었다. 시대가 자신을 괴물로 만들었듯 자신 역시 정몽주를 괴물로 만들고 말았다. 정몽주에게 말하는 그가 겪는 고통이란 정도전 자신이 지금도 겪고 있는 고통이기도 했을 것이다. 정몽주는 친구인 자신을 노비로 만들어 굴욕속에 죽이려 하지만, 이미 정도전 자신 또한 스승인 이색(박지일 분)과 의절하고 심지어 그를 죽이려 하고 있었다.

정몽주 만큼은 마지막까지 순결한 선비로서 남아주기를 바랐건만. 아니 이 순간도 바라고 있다. 손은 자신이 더럽힌다. 피는 자신이 묻힌다. 정도전이 꿈꾸는 새로운 나라는 정몽주를 위한 나라이기도 했다. 순백의 새로운 세상에서 정몽주가 가진 바 이상과 실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기를 바란다. 정몽주와 같은 이가 자신의 뜻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그런 나라를 세우고자 한다. 역사의 아이러니일 것이다. 정도전의 꿈처럼 정도전이 세운 나라를 정몽주가 마지막까지 지키게 된다. 조선을 세운 정도전은 역적이 되어 죽고, 조선의 건국을 반대한 정몽주는 충절의 상징이 되어 영원히 살게 된다. 정몽주마저 괴물이 되어야 할 정도로 시대는 슬프고 인간은 아프다. 그것을 달리 난세라 이름한다.

투정이었다. 앙탈이었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뜻한대로 되지 않는다. 밥상을 뒤엎는다. 딱 그대로다. 정몽주와 정도전 두 사람을 모두 가지고 싶었다. 정몽주와 정도전 두 사람 모두를 자신의 곁에 두고자 했었다. 하지만 정몽주가 정도전을 죽이려 하고 있었다. 정몽주를 얻고자 한다면 정도전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다고 정도전을 포기한다면 대업의 꿈 역시 포기해야만 한다. 이미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왕이 되어야 한다. 왕이 되고자 한다. 처음으로 자신의 속내를 솔직하게 드러낸다. 공양왕(남성진 분)을 압박하고, 정몽주를 협박하고. 그리고 운다. 이루어지지 않는 짝사랑에 잔뜩 화를 내고 후회하며 우는 한심한 몰골처럼. 그만큼 왕위에 대한 욕심 만큼이나 정몽주에 대한 집착 또한 깊다.

죽이겠다고 해서 진짜 죽이겠다는 말이 아니다. 죽일 수 없기에 죽이겠다 하는 것이다. 죽이고 싶지 않기에 죽이겠다 애써 말해보는 것이다. 이성계를 막아서는 마지막 장애물은 어떤 무엇도 아닌 정몽주에 대한 인간적 신뢰였다. 인간의 정이었다. 마지막 인정에 막히고 만 정도전과 이성계와는 달리 정몽주는 더 철두철미했다. 조금의 여유도 없었다. 인간이 아닌 괴물이어야 했다. 인간이기를 그나마 바라던 정도전과 이성계와는 다를 수밖에 없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후회한다. 그리고 아파한다. 인간이라는 동물이다. 슬플 정도로 어리석다.

막바지다. 이성계가 자신의 야심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고, 정몽주는 이성계를 향한 자신의 마지막 인정까지 도려내려 한다. 이길 수 없다. 도저히 승산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싸워야 한다. 전장에 나서는 장수처럼 홀로 침묵하는 정몽주의 모습이 비장하다. 정도전이 유배되고, 이성계는 정몽주를 향한 원망을 쏟아내고, 정몽주는 어쩌면 불가능한 마지막 일전을 계획한다. 이길 수 없더라도 자신은 싸워야 한다. 그 담담한 단단함이야 말로 정몽주라는 인간이 가진 가장 큰 힘이었을 것이다. 정도전도 이성계도 모두 그것에 이끌렸다.

메시지를 공격할 수 없다면 메신저를 공격한다. 그 주장과 의도를 꺾을 수 없다면 당사자를 공격하여 굴복시킨다. 정치만이 아닌 현실에서도 흔히 쓰이는 레토릭일 것이다. 나이를 묻고, 성별을 묻고, 출신을 묻고, 과거 행적을 묻는다. 곧잘 토론이 감정싸움으로 번지는 이유일 것이다. 정도전이 먼저 주로 사용해 온 방법일 것이다. 낙인을 찍고 굴레를 씌운다. 천출이다. 노비의 자식이라 무도한 일들을 저질러왔다. 정도전이 그동안 해 온 모든 일들이 사라지고 오로지 그 한 가지만 남게 된다. 누구를 위해 어떤 일들을 해왔는가보다 자극적인 그런 내용들만이 사람들 사이에 남게 된다. 이렇게까지 비열해질 수 있을까.

이유가 있어 결론이 내려지는 것이 아니라 결론이 먼저 내려졌기에 이유가 단지 따라올 뿐이다. 필요가 논리를 만들고, 동기가 근거를 만들어낸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무엇을 바라는지 살아있는 자식이 알 수 있는 방법은 아무것도 없다. 그냥 자신이 바라니까 그렇게 합리화하려는 것 뿐이다. 부모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다. 전형적인 야심가의 얼굴이다. 부인 민씨(고나은 분) 역시. 유력한 권문세족이던 여흥 민씨 민제의 딸이다. 권력 앞에 다른 것은 모두 수단에 불과하다. 누구보다 권력의 법칙에 대해 일찍부터 체화해왔을 터였다.

옳고 그름은 상관없다. 오로지 필요만이 있을 뿐이다. 필요했기에 스승인 이색을 죽이려 하고, 필요했기에 오랜 친구인 정도전을 죽이려 한다. 너무나 필요한 과정이었기에 조금의 주저함도 망설임도 없다. 정도전을 지켜보는 과거의 동문들 역시 마찬가지다. 증오만이 남았다. 사실이든 아니든 정도전을 궁지로 몰고 죽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승복이었을 것이다. 이번에는 정몽주가 이겼다. 당신들이 이겼다. 괴물이 괴물을 낳는다. 정치가 괴물을 만들어낸다. 희생과 원망이 괴물을 자라게 만든다. 양보할 수 없는 것이 있기에 괴물이 되어서라도 지킨다. 흉측한 몰골이 그래서 차라리 슬프고 안타깝다. 괴물이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

TV가 터져나갈 것 같다. 배우들의 열연에 벌써부터 용광로처럼 후끈 달아오른다. 드라마와 현실의 경계마저 잊는다. 유동근이 이성계고 이성계가 유동근이다. 임호가 곧 정몽주다. 그 그늘까지 우울할 정도로 짙게 드리워 선명한 입체감을 그린다. 뜻밖에 약한 모습을 보이는 이성계에 비해 정몽주는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올곧고 강하기만 하다. 그를 강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의 의지와 그의 대의. 입장이 역전된다. 정몽주로 인해 정도전의 대의는 역모가 되고, 이성계의 이상은 권력욕이 된다. 대하드라마 '정몽주'다. 파국이 다가온다. 역사는 스포일러가 될 수 없지만 벌써부터 답답함에 굳이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한 주가 너무 빠르다.

뻔히 아는 이야기를 굳이 기다리며 보는 것은 때로 무척 허무한 일이다. 이미 아는 이야기라는 사실마저 잊는다. 끝을 아는데 거기까지 가는 길을 모르겠다. 새롭지 않지만 새롭다. 역사란 보는 사람에 따라서 이렇게까지 다양한 얼굴을 보여주기도 한다. 작가의 상상력이 역사라는 기본 위에서 자유롭게 노닌다. 칭찬이 새삼스럽다. 차라리 중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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