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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1.07.21 08:25

공주의 남자 "역사의 격랑에 휩쓸리는 작은 개인들의 큰 사랑"

거대서사와 개별서사의 조화로운 만남을 기대한다.

 
원래 수양대군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다. 그러나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죽이고 정난을 일으키려 하므로 딸이 수양대군에게 김종서를 죽여서는 안 된다고 간하니 수양대군이 그녀를 멀리 충남 공주의 동학사로 내치게 되었다. 그런데 운명인지 김종서의 손자가 난을 피해 동학사에 이르게 되었고 여기에서 수양대군의 딸과 서로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나중에 수양대군이 피부병을 치료하고자 공주에 이르렀을 때 딸과 꼭 닮은 남매를 보았으나 수양대군의 딸은 여필종부라 말하며 아버지를 버리고 울산으로 내려가 살게 되었다.

1873년 서유영이라는 역대 국왕과 조신들, 그리고 명사들과 관련한 일화를 정리하여 편찬한 <금계필담>이라는 책에 나오는 한 토막이다. 아마 드라마는 이 짧은 이야기를 모티브로 쓰여지고 있었을 것이다. 수양대군의 딸은 세령(문채원 분)이라는 이름을 부여받고, 김종서의 손자는 막내아들 김승유(박시후 분)가 되어서.

사실 수양대군과 계유정난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거의 잊혀질 만하면 드라마화가 되어 더 이상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태종과 세종을 거치면서 완성된 조선의 통치체제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조선이 끝내 안으로부터 무너져내리는 단초를 제공한 왕으로써. 신하에 의해 정당한 군주를 몰아내고 왕이 되었으니, 안으로는 공신을 신경써야 했고, 밖으로는 지배층이 자신의 권위를 인정하도록 배려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세종이 구축한 인적자원은 이로써 말라버렸고, 공신들의 전횡과 지방세력에 대한 배려의 결과 조선은 멸망하는 순간까지 고질적인 재정난에 시달리게 된다. 역설적으로 조선조 가장 식량생산이 많았을 때가 세종 때였다. 농사기술은 조선 후기 때 가장 발전해 있었다.

하지만 워낙 세조 이후 조선의 왕들이 하나같이 세조의 후손이었던 탓에. 세조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은 자신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240년이나 지난 숙종 24년 노산군에서 단종으로 복권되기까지 단종의 이름은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시되어 있었다. 더구나 현대에 이르러서도 두 차례의 쿠데타에 의한 군사독재정권은 수양대군의 결정을 구국의 결단으로 미화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김종서와 황보인 등은 따라서 왕권을 능멸한 권신으로, 세조는 위태로운 왕권을 바로잡은 왕으로써 평가되어 왔던 것이다. 어차피 역사는 승자의 것이므로.

아무튼 계유정난과 수양대군이란 그렇게 이제는 지겹기까지 한 너무나 뻔하게 자주 쓰여온 역사물의 소재였을 것이다. 아마 그래서 대중이 충분히 익숙해져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드라마 <공주의 남자>는 그런 이미 널리 알려진 역사이야기를 소재로 과감한 새로운 시도를 선보이게 된다. 마치 70년대 유행하던 서사순정물을 보는 듯한 역사의 격랑에 휩쓸리는 남녀의 비련이라고 하는 색다른 이야기로써.

물론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랑이야기는 이전에도 있어왔었다. 조선시대를 살았던 개인의 이야기도 여러차례 드라마화되었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역사적 사건과 그 역사적 사건 속에 놓여 있었던 개인의 이야기를 디테일하게 파고든 작품은 그다지 없었다. 더구나 매우 젊은 감각이다. 신선하고 세련되고 빠르고 가볍다. 계유정난이라는 묵직한 사건 뒤에 한없이 가벼운 - 그래서 역사의 격랑에 떠밀릴 수 없는 개인의 이야기가 있다. 다만 이 경우 계유정난이라고 하는 거대서사와 운명적 사랑이라고 하는 개인의 서사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가에 성패가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거대서사의 무거움과 개인의 소소한 이야기들.

이제 남은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죽고 난 이후를 걱정하는 왕 문종(정동환 분)과, 그러한 문종의 상태를 알고 더욱 야심을 불태우는 훗날의 세조 수양대군(김영철 분)과 그같은 수양대군의 야심을 경계하며 왕실에 충성을 다하려는 명신 김종서(이순재 분), 그리고 그러한 피를 부르는 정치적 대립 속에 전혀 상관없다는 듯 주색잡기를 일삼고 하릴없는 놀이로 시간을 보내는 김종서의 아들 김응유와 수양대군의 딸 세령, 문종의 딸 경혜공주(홍수현 분). 마치 같은 시간과 공간 속을 살아가면서도 서로 전혀 다른 시간과 공간을 살아가는 이들. 과연 이들의 시간과 공간이 서로 만나게 되었을 때 어떠한 일들이 벌어지게 될까? 문종이 죽고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죽이고 정난을 일으켜 왕이 되는 그 격랑에서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이들 젊은이들은 어떤 역경을 겪게 될까?

개인이란 그렇게 나약한 것이기에. 하긴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만 없었을 뿐이었다. 구한말의 격동기와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그리고 군사독재, 개발독재와 고도성장기. 개인은 그렇게 약하며 역사는 거부할 수 없이 거대하다. 약하기에 슬프고 감당할 수 없이 거대하기에 피할 수조차 없다. 운명이 사람을 가르듯 역사는 사람을 가른다.

어쩌면 이제껏 기다려 온 드라마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상상력을 자극한다. 과연 우리가 책을 통해 보는 역사의 한 켠에서 개인들은 어떻게 그 역사를 맞이하며 살아갔을까? 아주 비껴가지 않은 한쪽 귀퉁이에서 그에 휩쓸리고야 말았던 군상들에 대해서. 분노와 원한, 증오, 그리고 안타까운 비련. 감정과 감정이 교차하고 사람과 사람이 엇갈린다. 그리고 그와는 상관없이 엯하는 도도하게 흐른다.

물론 그렇게 무겁게 다루지 않을 것을 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을 기대한다. 자칫 불필요하게 무겁고 엄숙해지기 쉬운 역사물에서 보다 가볍게 개인의 일상에 접근할 수 있기를. 주인공은 계유정난도 수양대군도 아닌 김응유와 세령, 그리고 경혜공주일 것이다. 그들의 어쩌면 평범한 서로 사랑하고 미워하고 원망하며 그리워하고 안타까워하는 일상의 감정들을 그려내야 할 것이다. 역사에 치이더라도 그들 자신의 이야기로써.

기대가 크다. 어떻게 이야기가 전개되어 나갈 것인가. 분명 계유정난 자체는 무겁게 그려질 것이다. 계유정난과 관련해서 등장인물들이 휩쓸리는 과정에 대해서는 꽤나 심각하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그래도 사람은 사랑을 한다. 사랑을 하고 일상을 영위한다. 어떻게 해도 사람은 그렇게 살아간다. 그래서 기대하는 것이 어쩌면 이야기의 원전이 될 수 있는 금계필담의 저 이야기일 것이다. 사람은 살아간다고 하는 그 주제에 대해서.

어쩔 수 없이 그같은 거대서사에 익숙한 세대인 때문이다. 더불어 개별의 서사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다. 역사를 이해하고 시대를 이해하며 그러면서 개인의 일상과 체험을 우선한다. 간만에 정말 만족하며 볼 수 있는 드라마가 아닐까.

첫 회부터 일단 시작은 좋았다. 계유정난이라고 하는 역사의 무게와 말을 타는 것이 소원인 세령의 일상이 1년이라는 시간을 사이에 두고 교차하고 있었다. 계유정난이 일어난 밤의 어두움과 문종과 김종서, 수양대군이 머무는 공간의 음울함, 그에 비해 말을 타는 것을 소원으로 여기는 세령과 미모로 종학의 강사들을 농락하는 경혜공주, 주색잡기에 여념이 없는 한량 김응유가 머무는 공간은 색색이 밝고 화사하다. 어느 정도 무리한 설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젊은 그 대비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더구나 하필 그러한 대비 만큼이나 배우들의 나이차이도 크다. 과연 이같은 대비는 어떤 역할을 할까.

혼담이 계기가 되어 세령은 경혜공주와 자신을 바꾸어 김응유를 만나게 되고, 세령과 바꾼 경혜공주는 장차 남편이 될 정종을 저자에서 만나게 된다. 정종은 경혜공주인 것도 모르고 우연히 만난 그녀에게 첫눈에 반하며, 김응유는 경혜공주라 알고 있던 세령을 위기에서 구하게 된다. 문종이 다시 김응유를 부마로 원하게 되니 이렇게 젊은이들은 기성세대에 의해, 혹은 스스로에 의해 얽히고 섥히며 운명을 만들어간다. 물론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하지만.

정통시대물이지만 세련된 감각이 돋보이는 드라마일 것이다. 경박하지 않음녀서도 세련되다. 사극이라는 틀을 크게 해치지 않으면서도 현대적이며 젊은 감각이 느껴진다. 배우 면면을 보더라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박시후와 문채원, 홍수현, 송종호. 이민우는 이제 조금 나이가 있는 듯하고. 베테랑이 주는 무게감이 더욱 드라마의 중심을 잡는다. 확실히 전통적으로 사극에 강했던 KBS의 저력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깊이가 다르다.

아마 처음 만남에서 김응유가 세령에게 삼종지도에 대해 강의한 것은 금계필담에서 수양대군의 딸이 말한 "여필종부"를 위한 복선이 아닐가? 여성이 남성의 그림자가 되는 것은 거부하지만 그러나 사랑하는 이의 그림자는 될 수 있다. 그러자면 아마도 김응유가 수양대군에 대한 복수를 포기해야겠지만 말이다. 과연 그 과정에서 어떤 드라마가 펼쳐질까. 설레이려 한다. 느낌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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