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1.07.20 07:17

스파이명월 "강우를 살려야 드라마도 산다."

공주님들이 왕자님의 구원을 기다리고만 있는 이유...

 
이야기속의 공주님들은 항상 어디선가 왕자님이 찾아와 자신을 구원해주기를 기다리며 시간을 보낸다. 오로지 그것만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라는 듯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려 하지 않는다. 어째서일까? 남자가 만든 이야기인 때문이다.

여성취향의 이야기에서도 너무나도 잘난 이상에 가까운 남성일수록 사실상 하는 일이 없다. 그들은 그저 잘난 그대로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모든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은 다름아닌 여자다. 마치 저주에 걸린 공주님마냥 성격 나쁜 남자를 개조하는 것도 여자의 일이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다. 주인공은 가만히 있는데 오히려 주위에서 이것저것 챙겨주며 도움을 준다. 키다리아저씨나 우렁각시가 그런 예일 텐데, 이때도 도움을 주는 이성은 대상화되고 이상화되어 평면으로써만 존재한다. 결국 이야기를 하는 화자 자신이 주인공이 하는 이야기일 것이기 때문이다. 흔히 많이 범하게 되는 실수다.

보면서 생각했다. 어쩌면 발칙하기까지 한 이 새로움은 의도한 것인가? 아니면 단지 서툰 것 뿐인가? 재미있었다. 유쾌했다. 작가의 상상력이 그대로 느껴지는 감각적인 장면들에서. 원초적인 웃음을 자극하는 코믹한 상황과 이야기들에서. 하지만 정작 그러한 재미는 이어지지 않고 산산이 흩어질 뿐이었다. 그것도 새롭기는 한데 과연 의도한 것이었을까?

그러나 결국 4회를 넘기지 못하고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다름아닌 강우(문정혁 분)로부터였다. 너무나 뻔한 패턴. 세계적인 유명보석디자이너의 런칭기념 리셉션장에서 한명월(한예슬 분)을 강제로 어떻게 해 보려는 남자를 제지하고 그녀와 춤을 추는 장면은 너무나 뻔하게 예상되는 진부하다는 말조차 부족한 장면이었다. 차라리 그 장면에서 강우가 한명월을 외면하고 한명월이 힘으로 위기를 극복했으면 어땠을까?

더구나 강우의 약점이 뭔지 찾아보라는 리옥순(유지인 분)의 요구에 대해 강우는 바로 하필 한명월이 보는 앞에서 악몽을 꾸는 것으로 보답하고 있다. 물론 이전까지도 단서는 있었다. 강우에게 무언가 그늘진 과거가 있을 것이다. 원래 잘나고 성격나쁘고 더구나 어두운 과거까지 있으면 주인공 삼종세트가 삼위일체를 이루는 것이니까. 그렇더라도 이제까지 아무렇지도 않다가 갑자기 그런 모습을 보인다? 오히려 리옥순의 지시가 없었으면 역시 좋았다.

즉 말하자면 너무 전형적이다. 한명월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환상의 커플>에서의 나상실을 연상시킨다고는 하지만 그렇더라도 아예 극의 개연성마저 무시해가며 좌충우돌하는 한명월의 캐릭터는 로맨틱코미디에 최적화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열심히 부딪히고 망가지고 해야 강우라고 하는 벽도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놀라고 당황스러워하고 화내고 짜증내고 원망하고 그리고 어느새 호감을 느끼게 되고. 그런데 한명월은 열심히 부딪히고 깨지고 있는데 강우는 여전히 저리 밋밋한 채이니. 소리가 나지 않는다.

강우의 캐릭터가 <최고의 사랑>의 독고진을 답습한 것이라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 반대하는 이유다. <최고의 사랑>에서 독고진의 캐릭터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오히려 그러한 잘나고 까칠하고 어둡기까지 한 전형적인 남자주인공 캐릭터를 스스로 부순 데에 있었다. <시크릿 가든>에서의 김주원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더 길라임에게 달려들고 그러면서 망가지고. <최고의 사랑>에서의 독고진 역시 그 까칠한 완벽남의 이면으로써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었던 것이었다.

연예계의 이면을 다룬 드라마였다. 따라서 <최고의 사랑>에서 독고진 역시 자신의 이면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건방지고 제멋대로인 것은 같지만, 한심하고 찌질하고 유치한 모습들. 그래서 독고진은 오히려 구애정에게 적극적으로 대쉬하며 스스로 망가지고 있었다. 능동적으로 변화를 주는 그런 캐릭터였던 셈이다. 보기 드물게 남자주인공과 여자주인공의 밸런스가 잘 맞아떨어진 로맨틱코미디의 수작이었다.

반면 <스파이 명월>에서의 강우의 캐릭터는 어떤가? 여전히 그는 수줍어하고 있다. 앞으로 나서며 무언가를 보여주기를 매우 꺼려하고 두려워하고 있다. 내숭도 한두번이지 그것도 지나치면 사람이 지친다. 한명월이 그렇게까지 부딪히고 깨지고 있음에도 조금의 흐트러짐도 보이지 않은 완고함 앞에 질려 버린다. 혼자서 나대는 한명월은 어수선하고, 그럼에도 체면만 차리려는 강우는 지루하고, 서로 섞이지 않으니 어우러지지 못하고 서로의 단점만이 극대화되어 나타나게 된다. 정신없고 지루하다. <스파이 명월>에 대한 평가다.

사실 해결을 위한 단서는 있었다. 이를테면 3화에서 강우가 뱀을 무서워하던 장면이라던가, 4화에서 런닝머신을 하면서 한명월과 경쟁하다가 나가떨어지는 모습과 같은 것들. 한명월이 북한의 특수공작원 출신이니 오히려 한명월의 탁월한 신체적 능력을 강우의 의외의 허술한 모습과 대비하여 보일 수 있었다면 조금은 더 이야기가 흥미롭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리셉션장에서도 한명월을 도와주려는데 한명월 스스로 힘으로 위기를 헤쳐나간다든지, 혹은 마지막 스턴트 장면에서도 강우보다 더 뛰어난 액션연기를 선보임으로써 강우로 하여금 그녀를 의식하게 만든다든지. 어떤 액션과 리액션이 있고 교감이 있어야 관계라는 게 성립하는 것 아닌가 말이다. 아무리 초반이라지만 둘은 아직 너무 섞이지 못하고 있다.

물론 이해하는 것도 있다. 준비하고 있는 것이 있을 것이다. 바로 최류(이진욱 분)까지 얽혀 있는 '사합서'라는 고서의 비밀일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도 최류가 오히려 특수공작원으로 더욱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행동에 나서는 바람에 강우가 죽고 있다. 지금으로써는 최류 쪽이 오히려 주인공처럼 비중이나 존재감에서 강우를 압도하고 있다. 남자주인공으로서 굴욕이다.

과연 강우가 이후 '사합서'와 관련해서 최류를 넘어서는 존재감을 보일 것인가?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최류는 아무래도 준조역에 가깝기 때문이다. 주연인 강우가 그런 식으로 나서기 시작하면 드라마는 무너지고 만다. 강우 한 사람만 살아남는다. 결국 한명월의 존재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됨을 가정했을 때 조금 더 무너뜨릴 필요가 있지 않았을까. 강우에게 더욱 한명월의 존재가 절실하게 여겨지도록 설정할 필요가 있었다.

한 마디로 서툰 것이다. 개인적으로 작가가 아마 신인이거나 경력이 얼마 안 되지 않나 싶다. 아니면 이런 종류의 로맨틱코미디는 처음 써보는 것이거나. 강우의 캐릭터를 이상화시키고 한명월에 이입한 것은 좋은데 거기서 더 나가지 못했다. <최고의 사랑>과 <시크릿 가든>이 어떻게 까칠한 남자 주인공으로 성공할 수 있었는가. 강우를 조금 더 능동적으로 움직이게 하고, 보다 허술하게 한명월과 반응할 수 있도록 했어야 했는데 너무 이상화시켜 버렸다. 아마도 강우라고 하는 이상적인 남자에 스스로 취해버린 것일까?

결국 소통을 거부한 수다라는 것도 단지 대화에 익숙하지 못한 서투름이 원인이었던 것이다. 시청자가 어떻게 듣고 어떻게 반응할까를 전혀 생각지 않고 쓰고 있으니 각각의 이야기나 장면들이 파편처럼 끊어지고 이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런 아이디어는 어때? 이런 이야기는 어때? 그런 건 아이디어회의할 때나 하는 것이지 대화에 써먹는 게 아니다.

각각의 파편들은 분명 재미있다. 그래서 지금껏 재미있게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유기적 연결과 개연성이라는 부분을 조금 양보하면 그럭저럭 웃을 수 있는 괜찮은 코미디 드라마였으니까. 느닷없이 이대강이 한명월을 쫓아 강우의 매니저로 들어오고, 한명월이 또 스턴트우먼의 부재로 인해 스턴트를 맡게 되고. 강우의 사생팬들과의 한심한 에피소드까지. 역시 깨알같은 재미는 한희복(조형기 분)과 리옥순이 책임진다. 최류가 담당하는 스릴러의 긴장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제대로 유기적으로 이어가는데는 실패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도 개연성 무시하고 보면 재미있지만 그것이 의도적인 것일 때 의미도 있는 것이다.

조금 더 강우를 무너뜨릴 필요가 있다. 강우를 조금 더 무너뜨려야 이후 사합서와 관련해 강우의 차례가 돌아왔을 때 한명월과의 관계가 보다 부드럽게 이어진다. 차라리 독고진을 흉내내라 해주고픈 이유다. 김주원을 닮으라고 말해주고픈 것이다. 아니면 오스카를 쫓던가.

문정혁에게는 아무래도 재앙같은 드라마일 것이다. 문정혁이라는 배우의 매력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 그 이상의 매력까지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할 텐데 이대로라면 단순히 소모되고 끝나고 말 것이니. 앞으로 대본의 수정이 없다면 작품의 운이 없음을 안타까워해야 할 것이다. 너무 좋지 못하다.

촌스러움은 진짜였다. 의도한 촌스러움이 아닌 경험부족과 실력부족에 의한 촌스러움이었다. 변화가 필요하다. 아예 대놓고 더 촌스럽게 나가거나, 아니면 조금더 이야기를 추스리고 다듬어보거나. 아주 기대가 없지는 않다.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럴 의지만 있다면.

아쉽다. 아이디어는 좋았다. 각각의 장면에서 작가의 나름의 감각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로 인해 웃을 수 있었다. 그러나 대중을 상대로 하는 드라마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조금 더 대중적이고 기술적인 배려와 고민이 필요하다. 분발이 필요하다. 모자르다. 아직은 많이. 안타깝다.

모바일에서 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