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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4.04.28 07:59

[김윤석의 드라마톡] 정도전 32회 "개혁 아닌 개혁, 이성계 저항에 부딪히다"

이성계의 눈물, 고려에 작별을 고하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흔히 대의와 명분을 하나로 붙여 대의명분이라 쓰는 것인 이 둘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비는 아비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그렇게 모두가 자신의 자리에서 주어진 본분에만 충실할 수 있다면 세상의 많은 문제들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과연 본분을 다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명징(明澄)한 대의를 쫓는 것이 곧 본분인가, 아니면 본분에 충실함으로써 대의란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되는 것인가. 성리학이 말하는 리(理)와 기(氣)가 여기서도 쓰인다.

백성을 이롭게 하는 것이 유자가 된 도리일 것이다. 하지만 또한 고려의 신하로서 고려의 왕실과 국체를 지켜야 할 책임이 지워져 있기도 하다. 백성을 이롭게 만드는 것은 분명한 대의일 것이다. 그려나 고려의 신하로서 고려에서의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또한 아주 무시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고려란 백성만이 아닌 왕과 귀족, 군벌들 모두를 아우르는 개념이었다. 백성들에게 도움을 주자고 권문세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이색(박지일 분)을 비롯 온건파 사대부들이 토지개혁을 반대한 이유는 그런 거창한 명분보다는 자신들이 개혁의 대상인 권문세족이고 지주였던 탓이 더 컸을 것이다. 드라마이기에 긴장감을 더욱 고조시키고자 정도전에 반대되는 명분과 대의를 그들에게도 부여한다.

▲ KBS 제공

백성을 이롭게 할 수만 있다면 왕조를 바꾸는 것도 정당한가. 아무리 백성을 위하더라도 왕조를 바꾸는 것은 단지 반역에 불과한가. 그 목적이 옳다면 그것을 추진하는 과정에서의 다소간의 희생은 불가피한가. 아무리 목적이 옳아도 그 과정에서 부당한 희생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결코 옳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혁명과 개혁이 서로 갈린다. 목적을 위해 그를 방해하는 모든 것을 배제하고 철저히 소외시킨다. 설사 목적에 방해가 되더라도 그들 역시 동등한 구성원으로 인정하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점진적으로 대화와 타협을 통해 설득해 나간다. 전자는 개혁의 의도가 오염되고 왜곡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후자는 자칫 그로 인해 빚어질 혼란과 파괴를 꺼려한다. 그래서 정도전과 이색은 서로를 용납할 수 없다.

"정치란 지키는 것이다!"
"정치는 부수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고려의 신하로서 고려를 지키고자 했던 온건파 사대부들과, 그러나 이미 고려의 국가로서의 수명이 다했다고 여겼기에 대안으로서 새로운 왕조를 세우고자 했던 급진파 사대부들, 그들은 지키고자 했으며 또한 부수고자 했었다. 그것을 전제개혁을 통해 보다 극명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모순되고 부당한 제도라 할지라도 이미 수백년을 이어져 온 것이기에 마땅히 지켜야 하고 바꾸더라도 조심스럽게 전진적으로 해야 하는 것인가. 그것이 옳지 못하다면 하루아침에도 바꿔버릴 수 있는 것인가. 아이러니하다면 이색을 따르던 온건파 사대부 가운데 상당수가 조선이 건국하고 이방원(안재모 분)이 왕자의 난을 일으켰을 때 이방원의 편에 서서 권력의 핵심에 남아있게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권근과 하륜이 그 대표적인 예다. 그조차 받아들일 수 없는 이들은 낙향하거나 은거했다.

이방원이 굳이 이색을 따르는 온건파 사대부들에게 적대적인 감정을 드러내보일 필요가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방원은 일찍부터 유력군벌인 이성계(유동근 분)를 아버지로 두고 개경에서 명문가의 자제들과 자주 어울려다니고는 했었다. 하륜(이광기 분)이 이방원에게 대학연의를 읽을 것을 권했다는 일화도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정도전의 반대편에 섰던 이들 온건파 사대부들 가운데 일부는 이후 이방원이 즉위하면서 조선조정의 주류로서 등장하게 된다. 이들로 인해 정도전이 죽고 조준이 실각했으니 고려가 망한 복수는 톡톡히 한 셈이다. 왕조에 대한 충성과 개인의 친분은 별개라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정도전이 원래 친하게 지내던 이숭인 등과 멀어지게 된 계기가 조준 등과 어울리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사실상 개혁이라 할 것도 없다. 땅 하나에 주인이 여럿인 자체가 이미 비정상이다. 사유재산이라는 자체가 대상에 대한 개인의 배타적인 권리를 뜻한다. 내 것이기도 한데 남의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것이 서로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지 않다. 정확히 단지 토지에서 생산된 농작물 가운데 세금을 거궈들이는 수조권만을 나누어가지는 것인데, 더구나 원래 수조권이란 나라에서 정하여 나누어주는 것이었다. 불법이 일상이 되었는데 그것을 정상으로 간주하고 그것을 다시 원래의 정상으로 돌리는 과정을 개혁이라 일컫는다. 눈가리고 아웅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이 가진 기존의 권리를 조금이라도 포기하지 않겠다. 정도전이 새로운 왕조를 세우기 위해 스스로 괴물이 되려 하는 이유를 납득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비정상이 일상이 되어 차라리 그것이 정상으로 여겨지고 사대부마저 그것을 지키려 애쓰는 상황을 만든다.

▲ 정도전 방송캡처

최영(서인석 분)의 눈물이 애잔하다. 죽어서 고려를 지키는 귀신이 될 것이니 이성계더러 살아서 고려를 지키는 파수꾼이 되어달라 부탁하고 있었다. 이미 정도전과 대업을 함께 하기로 한 이성계로서는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이었다.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이성계의 대답에 최영은 이성계의 결심을 눈치채고 만다. 일부러 속이거나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 이인임도 죽고, 이제 최영 자신마저 죽고 나면 더 이상 이성계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이성계가 스스로 왕이 되고자 한다면 그것은 이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며 흐름인 것이다. 고려의 마지막을 예감한다. 단순히 왕이 되고자 해서가 아닌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라는 이성계의 말이 너무도 서럽다. 어째서 이성계가 꿈꾸는 더 나은 세상은 고려가 아닌 것일까. 모르지 않기에 이성계를 탓하지도 못한다. 그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려의 마지막을 아쉬워하고 안타까워할 뿐.

이성계에게도 고려란 곧 최영이었다. 고려의 국왕이 아니었다. 고려라고 하는 나라 그 자체가 아니었다. 고려가 이성계에게 베푼 관용이었다. 인정이었고 은혜였다. 고려가 아니어도 되었다. 그러나 고려여야만 했었다. 그 고려를 배신하고 그를 내쫓아 이제 대세에 떠밀려 베려 한다. 차라리 솔직하려 한다. 이제 고려를 무너뜨리고 자신이 새로운 왕조의 왕이 되려 한다. 최영을 향한 마지막 절은 고려에 대한 마지막 인사다. 최영이 처형당하던 순간 흘리던 눈물은 고려와 함께 한 시간들에 대한 상실이며 정리다. 이인임이 예언한대로 왕이 되기 위해 그가 치러야 할 희생은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그는 왕이 되려 한다.

오히려 칼과 창이 난무하는 전쟁보다 더 살벌하다. 대의를 앞세우고, 명분으로 치장하며, 웃는 얼굴로 서로의 빈틈을 노려 칼을 겨눈다. 그저 적장만 베어 쓰러뜨리면 되는 전쟁이 아니다. 서로를 따르는 모든 무리들과 일족마저 남김없이 제거해야만 끝나는 전쟁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칼을 갈고, 기회가 주어진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를 쓰러뜨린다. 논리가 살기를 품고 이론이 적의를 숨긴다. 정치도 충분히 재미있다. 작가의 역량이다. 그리고 그것을 소화해내는 배우의 역량이다. 벌써부터 후끈 더워질 정도로 뜨거운 열기가 전해진다.

조선건국은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인임은 고려의 모순이었다. 최영은 고려의 한계였다. 이색은 고려의 모든 모순과 부조리마저 고려라는 이름으로 끌어안으려 하고 있었다. 정몽주가 붙잡으려 한 것은 고려 그 자체였다. 그 모든 것을 넘어섰을 때 조선은 건국되어 있었다. 김저의 옥사가 준비된다. 이색과 변안열 등이 제거되고 이성계는 다시 한 고비를 넘기게 된다. 잠시의 위기는 반전을 위한 숨고르기다. 마치 게임같다. 재미를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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