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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1.02.27 15:50

위대한 탄생에 대한 공정성 논란이 끊이지 않는 까닭은?

한국사회는 시험의 서사에 길들여져 있다

 
지난주 방영된 MBC의 오디션 프로그램 <위대한 탄생>에 대한 공정성논란이 상당히 뜨겁다. 특히 특정 참가자에 대해 과연 멘티로써 합격될만한 자격이 있는가를 놓고 방송국과 멘토의 객관성과 도덕성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중이다.

하기는 <위대한 탄생>만이 아니다. <슈퍼스타K>에서도 공정성 논란은 끊이지 않았었다. 당연히 올라가야 할 출연자가 올라가지 못하고, 오히려 떨어졌어야 할 출연자가 덜컥 올라가 붙고.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이다. 왜 그 출연자가? 어떻게 그런 결론이 나올 수 있는가?

워낙에 한국사람 대부분이 시험이라는 절차에 익숙해져 있는 때문이다. 시험에는 답이 있다. 문제가 있고 답이 있고 그 사이에 분명한 개연성이 있다. 서사가 있다. 서사는 인과이며 단지 그 유기적 구조로서만 존재한다. 다시 말해 열심히 노력했으니 문제를 맞출 수 있고 실력이 있으니 더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 따라서 그 결과로써 그 동기와 과정까지 계량할 수 있다. 심지어 개인의 인격에 대해서까지 계량하고 판단할 수 있다.

문제는 오디션에는 답이란 없다는 것이다. 정해진 답이 없이 단지 참가자가 답을 내놓으면 심사위원이 그것을 판단하여 평가할 뿐이다. 어떤 객관적인 답이 있어 그것을 보편적인 기준에 의해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참가자가 내놓은 답에 대해 심사위원 저신의 경험과 역량, 성향, 양심에 비추어 주관적으로 판단하고 재량껏 평가하여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서사보다는 개별성과 우연성이 더 강하게 지배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다. 시험에는 답이 있다. 오디션에는 답이 없다. 시험에는 서사와 개연이 있다. 오디션에는 개별과 우연이 있을 뿐이다. 오디션을 그대로 오디션으로 보면 좋겠는데 공교롭게도 시험과 오디션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대상을 판단하여 평가하는 것이다. 시험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자칫 시험과 오디션을 혼동해 보게 만들 수 있는 부분이다.

실제 오디션 프로그램들에 대해 심사위원의 자질이나 공정성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보면 어떤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기준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시험문제처럼 딱딱 떨어지는 답이 있고 그것을 가지고 엄밀하게 판단하고 평가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시험점수처럼 그 결과를 가지고 서열화하여 그 수준을 정할 수 있다. 누가 더 낫고 누가 더 못하다. 누구에게는 충분한 자격이 있는 반면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 그리고 그것은 심사위원의 판단에 우선하는 선험적이고 절대적인 것이다.

더구나 그렇다고 딱히 그런 판단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할만한 근거라도 있으면 승복이나 하겠는데 말했듯 오디션이란 답이 원래가 답이 없다. 그에 대해 이렇다저렇다 말하기도 힘들다. 지금 보고 듣고 판단하는 그것이 역시 자기만의 답인 것이다. 심사위원이나 다른 시청자들이 내린 답과 같이. 그런데 뭐라 틀렸다 할 수도 근거를 댈 수도 없으니 그것은 옳은 것이 될 밖에. 더구나 여러 사람이 그 주장에 동의하게 되면 그것은 진짜 옳은 것이 된다.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판단이 된다.

결국은 믿음에서 출발한다. 답이 있을 것이다. 객관적인 답이 있고 그에 따른 보편적인 판단이 가능할 것이다. 그것은 심사위원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단지 결정되어 있는 것을 심사위원은 채점하듯 판단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데 현실이 그렇지 못하니 납득하지 못하고 불신을 드러낼 밖에. 답이 없는 시험에서 답을 찾고, 점수로 계량하기 어려운 결과에 대해 계량하려 드니 이렇게 오해가 생기고 마는 것이다. 더구나 <위대한 탄생>에서는 단순히 심사만 하는 것이 아닌 직접 가르칠 제자를 선발하는 것이었음에도.

시청자가 판단했다고 직접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굳이 멘토제가 아니더라도 누구에게 얼마의 점수를 주고 그에 대해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는 심사위원의 재량이다. 단지 방청성이나 TV앞이 아닌 심사위원석에 앉아 있다는 이유로 주어지는 권한이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 멘티로 선택되면 그를 책임지고 가르쳐야 한다. 가르쳐서 대중 앞에 세워야 한다. 그것을 다른 누군가가 대신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그조차 시청자의 판단에 맡기라 하는 것은 결국 시험점수에 따른 서열화에 그만큼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어찌 보면 서글픈 것인데. 세상은 여러가지 다양한 기준으로 이루어져 있다. 수많은 문제와 그 문제들에 대한 더 많은 답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사의 필연 만큼이나 개별적인 우연도 그 한 부분을 이룬다. 그러나 시험을 통한 단선적인 서사에 길들여진 사람들에 그것을 이해하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우리나라의 시험 대부분은 객관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른 판단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복합적이고 개별적인 다원적 판단의 세계를 받아들이기란 더 어려울 수밖에 없다. 답은 이미 나와 있고 단지 그것을 따라 답을 선택하고 채점이 이루어지면 된다는 생각에.

하기는 어디 오디션 뿐이겠는가? 학벌이 가장 대표적인 경우일 게다. 직장에 대해서도 그렇다. 자기 직업에 대해서. 혹은 가족에 대해서. 친분관계에 대해서. 외모를 가지고 서사적으로 비교하려 들 때 그것을 외모지상주의라 부른다. 스펙쌓기란 개인적인 서사일 것이다. 그렇게 소속집단에 대한 연대와 귀속의식이 강한 것도 서사적인 관계에 더 집중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미 답은 결정되어 있고 누가 옳은가 평가하는 것만이 남았다. 그리고 그 평가는 단선적이고 확정적이다. 알게 모르게 한국사회는 줄세우기에 익숙하다. 개인들은 그렇게 우연마저도 선험에 의해 판단되어지고 결정되어진다.

결국 오디션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오디션에 대한 이해의 문제였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결코 정해진 답이 있어 단지 심사위원이 그것을 채점하는 것이 아닌데도 그것을 자꾸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만큼 우리 사회가 시험에 길들여져 있다는 뜻이리라. 시험이 아닌 오디션에 대해서마저 시험이기를 요구할 정도로. 그렇게 여길 정도로.

시험에 익숙해진 사회에서 시험에 길들여진 사람들의 오해에서 비롯된 헤프닝이라고나 할까? 정해진 답이 있고 그것을 기준으로 서열화가 가능하다고 하는 한국사회에 만연한 신앙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것이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한국사회가 갖는 한 단면인 것이다.

기다려 보아도 좋지 않을까? 어떤 가능성을 보았고 그것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안목이고 능력일 것이다. 그 결과에 대해 그때 가서 비판을 해도 좋을 것이다. 아직까지는 멘토의 영역이다. 그들에게 주어진 권한에 의해 그들의 양심과 자존심을 걸고. 믿고 지켜보아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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