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 기자명 권상집 교수
  • 칼럼
  • 입력 2022.04.11 14:26

[권상집 칼럼] 문화혁명의 아이콘 서태지, 데뷔 30주년을 기념하며

1992년 4월 11일, 대중문화의 일대 변혁을 알린 서태지

▲ 서태지 ⓒ서태지컴퍼니

[스타데일리뉴스=권상집 칼럼니스트]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30년 전, 1992년 4월 11일 서태지는 ‘서태지와 아이들’이라는 댄스그룹을 결성, '난 알아요’를 통해 가요계, 방송계 문을 노크했다. 랩이 익숙하지 않던 시대였기에 당연히 ‘난 알아요’는 평론가들로부터 저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훗날 해당 곡의 평가를 내린 평론가들은 두고두고 당시 평가의 진위를 해명하며 진땀을 흘렸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열풍을 끌기 전, 10~20대들이 선호했던 음악은 빌보드에서 인기를 구가했던 팝 음악이었다. 80년대~90년대 광고의 상당수 배경음악은 모두 팝 음악이었고 라디오에서 인기를 누렸던 다수의 프로그램 역시 모두 팝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었다. 트로트 가수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그 시절, 국내 청소년의 눈과 귀는 팝 음악에 집중되었다.

팝 스타에 대한 동경은 1992년 2월 17일 당시 세계 최고의 인기를 누린 미국의 아이돌 그룹 뉴키즈온더블록이 잠실체조경기장에서 내한공연을 진행하는 것으로 이어졌지만 해당 공연은 10대 여학생 한 명이 숨지는 비극으로 끝나고 만다. 공연에 대한 체계적 관리와 노하우가 없던 시기, 수익에 집착한 주관사의 욕심으로 인해 벌어진 비극적 사건이었다.

팝 스타가 떠나고 난 빈 자리 그리고 10대들의 스트레스 해소와 분출되지 못한 열망을 서태지는 ‘난 알아요’ 한 곡으로 단숨에 채웠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1집 앨범은 1992년 3월에 출시되었지만 대중문화계에서 1992년 4월 11일을 유독 기억하는 건 서태지와 아이들이 MBC <특종! TV연예>를 통해 정식으로 자신들의 데뷔곡을 방송에 선보였기 때문이다.

당시 프로그램 MC를 맡았던 가수 임백천은 “방송이 나간 후 가요계는 물론 나라가 뒤집어질 정도로 전무후무한 일이 벌어졌다”고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밝혔다. 길거리를 나서는데 레코드점뿐 아니라 모든 가게에서 ‘난 알아요’가 흘러나오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데뷔 한달 만에 서태지와 아이들은 신인가수가 아닌 문화대통령, 대중문화의 아이콘이 되었다.

현 시점에서 대한민국 역대 최고의 가수가 누구인가 라고 묻는다면 서태지가 1위를 차지하긴 쉽지 않아 보인다. 조용필이라는 가왕 이외에도 전 세계에서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는 BTS 등 국내 음악계의 한 획을 그은 아티스트들이 즐비하다. 그러나 대중가수임에도 가요계를 넘어 사회적 파급효과를 가장 강력히 미친 아티스트는 지금까지 서태지가 유일하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새 음반을 내고 활동을 시작할 때 지상파 9시 뉴스의 첫 보도는 그들의 컴백 소식이었다. 도저히 믿기 어려운 얘기지만 당시 서태지 컴백은 연예 프로그램이 아닌 9시 뉴스의 첫 보도에 걸 맞는 이슈였다. 그가 솔로로 활동을 선언하고 귀국한 2000년 8월 29일, 지상파 및 언론사의 기자들이 김포공항에 총집결했던 것도 유명한 사건이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심지어 1990년대 국내 최고의 히트상품으로 서태지와 아이들의 음반을 꼽았다. 그보다 낮은 순위를 기록한 건 지금도 워드 프로그램으로 사용하고 있는 ‘아래아 한글’이었고 여전히 인기를 구가하는 박카스, 새우깡 등이었다. 1996년 성균관대는 서태지와 아이들에 대한 문화사회적 함의와 전망을 대학 논술고사 문제로 출제, 화제를 낳았다.

대중문화 아티스트가 대학별 논술고사의 주요 문제로 출제되고 한 시대를 대표하는 히트상품이 되고 컴백 소식이 방송사 뉴스의 첫 자리를 채운 건 서태지 이후 그 누구도 보여주지 못한 사건임엔 분명하다. 대중문화를 넘어 정치경제사회 모든 분야를 통틀어 사회문화적 영향력을 광범위하게 미치며 시대의 아이콘으로 인정받은 건 지금까지 서태지뿐이다.

2022년 4월 11일 현재, 그가 지나간 30년의 흔적은 음악계 전반을 뒤바꿔놓았다. <미스터트롯> 열풍이 불기 전까지 28년간 국내 대중음악의 흐름을 랩과 힙합 등 댄스 음악으로 전환시켰고 그의 영향을 받아 SM, YG, JYP, 지금의 하이브까지 국내 주요 기획사는 모두 아이돌 그룹을 중심으로 대중음악을 산업화시켰고 이를 K-POP의 거대한 흐름으로 진화시켰다.

특히 서태지는 방송사 및 기득권의 압박과 통제에 끝까지 저항했으며 대중문화에서 아티스트, 뮤지션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여기에 열거하기 힘들 정도의 상당한 노력과 애정을 기울였다. 여전히 다수의 대중문화 전문가 그리고 콘텐츠 기업의 CEO들은 서태지가 있었기에 K-POP의 한류 열풍 그리고 BTS의 글로벌 파급력이 가능했다고 입을 모아 얘기한다.

물론 그에 대한 비판이 없는 건 아니다. 지나친 신비주의로 인한 상술 극대화, 음악 표절 논란 등 다수의 비난과 비판을 서태지가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사생활에 대해 팬들에게 솔직하지 못했던 점도 그의 음악적 성과를 종종 깎아 내리는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가 지난 30년간 대중문화에 남긴 성과, 공적은 분명 인정받아야 할 발자취임엔 틀림없다.

1992년 4월 11일, 서태지는 비록 우물 안 개구리로 시작해서 우물 안에서 그 영향력을 끝냈을지 몰라도 그를 보고 꿈을 꾼 수많은 기획사의 CEO와 뮤지션, 아티스트들은 2022년 4월 11일, 글로벌 시장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만드는 우물 밖 개구리가 되었다.

- 권상집 한성대학교 기업경영트랙 교수 

모바일에서 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