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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사회
  • 입력 2011.07.05 20:04

해병대 총격사건 "우리 사회에 만연한 폭력성에 대한 경종"

정상과 비정상, 수단이 되어가는 개인을 경계한다.

왕따란 어쩌면 인간의 가장 추악한 본성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무엇인가?

"저런 놈을 그대로 놔둬? 본보기가 되도록 본때를 보여주어야 해!"

어느 시대에든 인간의 사회에는 정상과 비정상이 있었다. 얼마나 그 무리의 보편에 적합한가. 얼마나 그 그 무리의 표준을 따르는가. 정상에서 벗어난다면 그는 무리에 불필요한 존재일 것이다. 아니 해악이 되는 존재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항상 무리를 이루어 살며 무리에 소속감을 가지고 그로부터 정체성을 확인한다. 무리를 이루어 살아가는 동물이기에 무리 속에서 자신의 존재의미를 찾기도 한다. 그것은 충성과 헌신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런데 누군가 무리에서 벗어나거나 아니면 무리에 해악이 된다면?

이를테면 수단이라는 것이다. 무리를 위한 수단. 싸움을 할 때는 폭력을 위한 수단이 될 테고, 생산을 위해서는 노동을 위한 수단이 될 것이다. 도덕이란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수단으로써 개인이 갖추어야 할 표준이고 보편일 터다. 어떠한 덕목을 얼마나 잘 지키는가. 만일 그러한 자격에 미달한다면 그는 자격이 없는 것이다.

왕따가 일어나는 가장 흔한 이유다. 아이들더러 왜 왕따를 시키느냐 물어보면 바로 대답한다.

"재수가 없다."

다른 말로 아이들 사회의 보편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표준과 거리가 있다. 당연히 갖추어야 할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 지나치게 약하거나, 혹은 지나치게 강하거나, 지나치게 잘나거나, 지나치게 못났거나. 어찌되었거나 남들과 다르다. 무리에 적합지 못하다.

물론 그러면 그냥 그런가보다 보아 넘길 수 있을 것이다. 그냥 무리에 어울리지 않으니 무시하고 외면하자. 하지만 그것을 적극적으로 행위로 나타내는 것은 다른 구성원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서. 무리의 표준과 보편으로부터 벗어나면 이런 일을 당한다.

말하자면 아주 최근까지 도시의 광장에서 행해지던 죄인의 처형과도 같다고 할 것이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잔인하게 처벌받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경계로 삼는다. 물론 그러한 처벌에 직접 동참하게 한다면 더 좋다. 공범자가 되어 이탈하지 못한다. 전통사회에서의 조리돌림이나 멍석말이, 혹은 지금도 이슬람세계에서 행해지고 있는 투석형이 그것이다.

저놈은 나쁜 놈이다. 그러니 네 손으로 직접 응징하라. 손에 피가 묻는 만큼 당사자의 영혼에도 외상이 깊어진다. 폭력은 인간을 길들이고 죄로부터 헤어나지 못하게 한다. 이를테면 인지의 부조화라는 것이다. 내가 폭력을 휘두르고 상처를 입힌 것은 대상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그 죄가 너무나 크고 무거웠기에 그를 마땅히 응징한 것이다.

실제 이번 해병 2사단에서 발생한 김모 상병의 총격사건에 대한 해병 출신자들의 반응이 바로 그런 예일 것이다. 오죽하면 기수열외를 시켰겠는가? 당사자에게 잘못이 없는데 왕따를 시켰겠는가? 김모상병에게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당연하게 여긴다. 기수열외를 시키는 것을. 왕따로 만들고 그를 궁지로 몰아넣는 것을. 차라리 그를 해병대에서 받지 않았다면. 일찌감치 해병대에서 내보낼 수 있었다면. 그러므로 기수열외는 해병대의 군기와 전투력을 유지하기 위한 필요악이다. 그러니까 이때까지 기수열외라는 것이 전통 아닌 전통으로써 존재해 온 것이겠지만.

아마 해병이라는 명예가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아무나 해병이 될 수 있다면 나는 해병이 되지 않았다. 해병이라는 명예에 대한 고집이 그 명예에 어울리지 않는 사병을 용납하지 못한 것이다. 해병이라고 하는 명예가 그에 어울리지 않는다 여긴 사병에 대한 거부와 배제를 결심케 한 것이다. 보아라 이런 사람은 해병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그를 괴롭히는 자신들에 대해 진정한 해병이라고. 저런 고문관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해병만일까? 우리사회 곳곳에서 나타나는 모습이다. 보편을 정하고 표준을 부여하고 그에 어긋나면 과감히 배제한다. 인터넷에서 말하는 흔히 깐다고 하는 행위가 그것이다. 그 이유야 어지되었든 자신들이 정한 기준에 벗어났으니 깐다. 그 이유는 다른 사람들이 그러지 않도록 경계하기 위해서. 또한 자신들은 그렇지 않다고 하는 확인이다.

문제는 말했듯 소속감이란 인간의 중요한 본능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소속되고 인정받는 것은 인간이 갖는 가장 중요한 욕구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과연 무리로부터 거부당한 당사자는 전혀 아무런 상처가 없을까? 단지 놀리고 모욕주는 것 뿐이더라도.

그것은 인간의 존엄과도 관계되는 것이다. 스스로 인정받고 존경받을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거부당했다. 부정당했다. 자신의 존엄을 짓밟혔다. 그래서 때로 견디지 못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마는 것이다? 과연 김모 상병이 쏘아 죽인 것은 자신을 괴롭힌 후임병이었을까? 아니면 살인은 죄악이라고 하는 자신의 양심에 대한 믿음이었을까? 존엄을 파괴함으로써 존엄을 지킨다. 그것은 영혼의 자살이기도 하다.

어째서 이리도 극단으로만 치닫는가? 하지만 그렇게 길들여져 왔으니까. 국가를 위해. 민족을 위해. 가족을 위해. 학교를 위해. 집단을 위해. 그리고 군대를 위해. 부대를 위해. 정상을 강요받으며 비정상에 대한 증오를 배운다. 하기는 그래서 당하는 입장에서도 더 견디기 힘들 것이다. 자신이 비정상임을 인정해야 하니.

총체적인 문제일 것이다. 아직까지도 인간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써 보는 사회적 현상이 해병대라고 하는 특수한 경우를 통해 극단적으로 나타났다 할 것이다. 아니 형태는 다를 뿐 그동안에도 꾸준히 있어왔었다. 직장에서건 학교에서건 심지어 인터넷에서건. 네티즌이 하는 일이란 비정상을 찾아내 그를 찍어내는 것이다. 까는 것은 네티즌의 권리다. 그래서 까지 않는 것을 보장해주는 까방권이라는 것도 있지 않던가.

처음 뉴스를 듣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 왔었다. 후임병이 아닌 선임병이 후임병을 그리 쏘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것도 난사가 아닌 조준사격이라 했다. 난사는 단지 충동이라면 조준사격은 벼리어진 이성일 것이다. 도대체 그의 안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가?

군대에 가면 사람이 된다고 한다. 그런 한 편에서 군대 가면 사람 버린다고 한다. 둘 다 같은 말이다. 무리에 적응하는 법을 배우며 무리에 적응하기 위해 자신을 버리는 법을 배운다. 수단으로써 길들여지는 법을 배운다. 스스로 목적이 아닌 수단임을 인지하게 된다.

어찌되었거나 역시 문제라면 해병이라고 하는 허튼 명예일 것이다. 해병이라는 드높은 명예 아래 사병 개인의 존엄따위는 단지 수단에 불과하다. 그리고 아마도 사회 각부분에서 나타나는 인권유린에 대해서도. 진정한 명예는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해서 개인을 소모해서 얻는 명예와, 그런 개인들의 만족을 통해 얻어지는 자발적인 명예.

단지 한 사병의 우발적인 총격이 아닌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사건이 되기를. 단지 가해자를 엄벌함으로써 두려움을 심어주기보다 그 본질에 대해 깨닫고 반성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아무리 문제사병이라도 그 존엄을 부정당할 이유는 없다. 인간은 누구나 존귀하다.

슬픈 일이다. 가해자는 가해자대로 사정이 있을 테지만, 그렇다고 피해자는 무슨 죄이겠는가? 물론 아주 잘못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그런 일을 당할 정도는 아닐 터다. 무엇보다 피해자는 과연 그 순간 자신의 잘못을 인지하고 있었을까? 그저 억울한 죽음일 뿐.

부조리라는 것이다. 부조리란 그렇게 인간을 안에서부터 파괴해 버린다. 태연히 왕따를 저지른 피해자들이나, 그들에 총을 거눈 가해자나. 누구의 탓을 돌릴까? 죄야 저지른 사람의 몫이지만 그 원인은 누구에게서 비롯되었는가 말이다. 아프고 아플 뿐.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먼저 해병대 내부에서도 이런 일이 없도록 단속해야 할 테고, 사회적으로도 과연 이와 유사한 사례가 없는가 반성해야 할 터다. 비극은 반복되는가? 아니면 그 한 번의 사건으로 끝나고 마는가. 그것이 지혜일 테지만, 부디. 바라는 것이다.

정상과 비정상은 없다. 정상과 또 다른 정상만이 있을 뿐이다. 안타까운 것이다.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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