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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4.02.07 09:18

감격시대 "은(恩)과 원(怨), 그들이 시대를 살아가는 방식"

켜켜이 쌓여가는 은과 원, 엇갈리는 사랑.. 무협의 정석을 보여주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은혜는 두 배로, 원한은 열 배로. 무협소설에서 흔히 보게 되는 대사다. 실제 많은 무협물들이 바로 이와 같은 은과 원을 그 주제로 삼고 있다. 왕조가 단명하고 쉽게 난세가 찾아왔다. 어떤 왕조도 어떤 권력도 영원하지 못했다. 어떤 국가도 어떤 법도 개인을 구제해주지는 못했다. 스스로 지켜야 했고 스스로 살아야 했다. 믿을 것은 자신과 그리고 인연이다.

주먹 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바로 '의리'다. 조직폭력과 관련해서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의리'일 것이다. 의리란 인정이다. 직접적인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보편적이지도 일반적이지도 못하다. 거리를 재고 관계를 가늠한다. 동내 건달들도 만나면 족보부터 따진다. 누구를 알고, 누구와 친분이 있고, 누구와 함께 있었고, 그래서 다리가 이어지면 그때부터 한 식구가 된다. 친구가 되고 형동생이라 부르게 된다. 오로지 그 안에서만 의미가 있다.

▲ KBS 제공

국가가 자신을 보호해주지 못한다. 법이 자기를 지켜주지 못한다. 오히려 권력이 자기들을 속이고 착취한다. 세상이 자신들을 억압하고 소외시킨다. 자기들끼리라도 뭉쳐야 한다. 뭉쳐서 스스로를 지키고 보호해야 한다. 오로지 자신만을 믿는다. 오로지 자신들만을 믿을 수 있다.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운다. 누구도 자신들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누구도 자기들을 함부로 해치지 못하게, 그같은 배타성이 때로 폭력성으로 이어진다. 그같은 단절이 세상의 법과 윤리와 같은 가치들을 비웃게 만든다. 지켜야 할 것은 자신들 안의 자기들만의 룰이다.

그것이 바로 '의리'다. 사람을 죽여 그 고기를 먹는다. 지나가는 행인을 죽이고 그 물품을 빼앗는다. 멀쩡한 마을을 습격해 사람들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한다. 하지만 자기들만의 룰에 충실하다. 재물에 연연하지 않고 사람과의 만남을 귀하게 여긴다. 가는 길이 달라도 명성이 높은 사람을 만나면 기꺼이 예우해준다. 한 마디로 관계를 맺는다. 좋은 관계가 싸여 하나의 네트워크를 만든다. 대표적인 유협문학인 '수호전'의 관계다. 밀수를 하고, 마약을 거래하고, 사창가를 관리하는 폭력조직이 말하는 '의리'의 실체이기도 하다. 어차피 그것은 바깥 세상의 룰, 중요한 것은 자기들만의 룰에 얼마나 충실한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조직폭력배들이 멋있어 보인다. 보편의 규범과 가치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인정은, 의리는 눈에 보인다. 신정태(김현중 분)의 아버지에게 은혜를 입었다. 그 은혜를 갚기 위해 위험을 무릎쓰고 신의주까지 가서 일국회와 맞서려 한다. 신정태의 아버지 신영출(최재성 분)과의 인연으로 인해 설두성(최일화 분) 또한 신정태를 돕기 위해 굳이 모일화(송재림 분)에게 빚을 지려 한다. 가야(임수향 분)를 위해, 도비패를 위해 신정태는 신이치(조동혁 분)와의 목숨을 건 싸움에 나서고, 그 신정태를 구하기 위해 황봉식(양익준 분)과 풍차(조달환 분)는 목숨을 건다. 더구나 그것이 당연하게도 여겨진다. 어차피 일본인의 세상이고 일본인의 법이다.

어머니 김성덕(신은정 분)을 구하려다 김옥련(진세연 분)은 일본인 대좌를 죽인다. 자신들을 지켜주었어야 할 권력이 오히려 어머니를 겁탈하려 하고, 어머니와 자신들을 죽이려 한다. 법의 엄정함을 믿기보다 살기 위해 도망치려 한다. 총을 들고 뒤쫓는 도야마 아끼오(윤현민 분)의 군복은 그런 점에서 상징적이다. 살인자를 뒤쫓는 군인의 제복을 보며 오히려 적대감을 갖는다. 그런 군복으로부터 쫓기며 김옥련 일행은 압록강을 건넌다. 조선을 벗어난다. 신정태에게 형과도 같던 풍차가 죽던 그 순간 김옥련의 어머니 김성덕은 도야마 아끼오의 총에 맞는다. 법은 자신들을 지켜주지 못한다. 권력은 자신들을 지켜주지 못한다. 국가는 도망쳐야 하는 대상이다. 비극의 시대다. 차라리 법의 바깥에서 형제들의 인정에 기댄다.

하기는 권력이 하는 짓이 치졸하다. 도야마 아끼오는 단순한 일본군 헌병장교가 아니다. 그의 뒤에는 일국회가 있다. 일본정부의 실력자가 일국회의 뒤를 받치고 있다. 야쿠자는 범죄조직이다. 국가가 범죄조직인 야쿠자를 이용하려 한다. 법의 바깥에 있는 범죄조직을 이용해서 목적을 달성하려 한다. 스스로가 자신들이 만든 법을 부정한다. 자신들이 이룬 질서를 부정한다. 스스로가 부정한 법과 질서를 일방적으로 믿고 따라야 할 이유란 어디에도 없다. 일본제국주의는 폭력조직인 일국회와 동일시된다. 그래서 멋질 수 있다. 아니 그래서 기존의 가치와 질서를 부정하고픈 질풍노도의 시기의 아이들은 폭력에 빠져들고 마는지도 모른다. 정당성이 부여된다. 그런 일본이기에, 그런 일본이 지배하는 조선이기에, 밀수도 폭력도 정당화된다.

천하는 천자가 다스리고, 강호는 뭇사람들이 함께 살아간다. 강호의 이야기다. 천자의 지배가 미치지 않는 국가의 권력과 규범이 닿지 않는 가치도 윤리도 무의미하다. 그저 사람과 사람만이 존재한다. 사랑하고 원수가 되어 원망도 하며 용서하고 함께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다. 기꺼이 사람을 위해 자기의 목숨마저 내놓을 수 있다. 의지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이기에 어떤 거창한 명분보다 마음을 준 동생이기에 기꺼이 목숨마저 내줄 수 있다. 형 황봉식을 부탁하고 죽을 것을 알면서도 신정태를 구하기 위해 일국회를 찾아간다.

은혜가 쌓이면 원한도 쌓인다. 정이 깊으면 오해도 깊다. 절망에 빠진 신정태를 구원해준 도비패의 은혜에 친형과도 같은 풍차를 죽인 원한이 더해진다. 신정태의 아버지 신영출이 가야의 아버지를 죽였다는 오해를 받고 있다. 신정태는 가야에게 첫사랑이며 아버지의 원수의 자식이다. 신정태에게도 역시 가야는 첫사랑이지만 일국회와 신이치에 의해 이제 풍차마저 목숨을 잃어야 했다. 풍차의 은혜와 형제로서의 의리를 생각해서도 복수는 반드시 해야 한다. 가야와 충돌할 수밖에 없다. 여전히 신정태에게 가야의 빈자리는 크다. 신정태가 없는 사이 김수옥의 도움을 받아 압록강을 건너는 김옥련에게도 부담스러운 마음의 빚이 지워진다. 어머니마저 총을 맞고 막막한 중국땅에서 김옥련은 김수옥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된다.

원한을 쫓고 사랑을 쫓는다. 은혜와 원한이 서로 엉킨다. 원한과 원한이 서로 물고 물린다. 그런데도 사람은 사랑을 한다. 운명은 그들에게 사랑하라 한다. 모든 은혜와 원한을 갚았을 때 실타래처럼 뒤엉킨 운명은 비로소 제자리를 찾게 될 것이다.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매 순간 순간이, 지나치는 인연과 인연들이 첩첩이 이야기처럼 쌓여만 간다. 무협이다. 무(武)란 의지이며, 협(俠)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뜻한다. 정석을 보여준다.

가르침을 받는다. 수련을 쌓는다. 필생의 대적과 만난다. 희생과 만난다. 은혜와 원한이 쌓인다. 알지 못하는 인연이 자신을 이끈다. 운명은 그들을 갈라놓는다. 시련을 주려. 다시 만나도록 하기 위해. 우연처럼 그들은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머물렀지만 그것은 필연이었다. 아직 그들은 함께 할 수 없다. 일국회의 악의는 커져간다. 운명이 영웅을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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