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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1.07.05 08:20

무사 백동수 "한국무협의 전형을 보다..."

화려한 영상, 어설픈 액션, 진부한 설정과 전개...

 
원래 무협이라는 자체가 반문화적인 것이다. 공권력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혹은 공권력이 해결하지 못하는 일을 사적 폭력으로써 대신해 해결한다. 미국의 웨스턴이 그렇고, 히어로물이 그렇다. 일본의 사무라이물도 다르지 않다. 국가라고 하는 공적 기구와 법이라고 하는 공적 규범을 배제한 사적 폭력과 사적인 정의. 그래서 이야기도 거의 개인적인 것이 많다. 오히려 공권력이나 공적 규범은 그런 개인을 억압하는 기제로 나타나곤 한다.

한국의 전통에서 무협적 서사가 나타나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일찌감치 중앙집권을 완성하고 강력한 지방행정기구를 통해 말단에까지 지배력이 미치고 있던 조선사회에서 존재할 수 있었던 사적 폭력이란 홍길동이나 임꺽정 같은 의적이 고작이었으니. 그나마 홍길동이나 임꺽정과 같은 이들은 의적이라 할 만했지만 검계와 같은 경우는 그냥 무뢰배들이었다. 그리고 이들 모두는 역시 공권력에 의해 토벌당하고 만다. 차라리 귀신이 되어 왕에게 직접 호소하지 지나던 알지도 못하는 무사의 힘을 빌지는 않는다.

그래서다. 한국에서 만들어진 무협들이 어울리지 않게 거대서사를 다루는 경우가 많은 것은. 국가가 나오고, 민족이 나오고, 민초가 나오고, 보편적 정의가 등장한다. 개인의 원한을 갚거나, 혹은 억울함을 풀어주거나, 불의한 폭력으로부터 약자를 보호하거나, 그러나 그런 과정에서조차 국가와 민족, 백성, 혹은 보편적 정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것은 역시 근대 이후 민족주의에 경도되어 나타난 신필 김용의 무협과도 닿아 있을 것이다. 확실히 김용의 무협 역시 <소오강호>와 <연성결>의 정서는 <사조영웅기>와 <녹정기> 등의 이념과 구별된다.

아니나 다를까. 사실 백동수에 대해서는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단 두 줄 기록되고 있을 뿐이다.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한 한 사람으로써, 그리고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한 뒤 뇌물을 받은 혐의로 귀양을 가는 장면이 다른 하나다. 그 출생에 대해서도 전해지는 바가 없고, 그가 어떻게 살았는가도 알려진 것이 없다. 그러나 바로 그런 백동수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 드라마는 외세인 청과 조선이라는 민족주의적 대립구도를 만든다.

병자호란의 복수도 하고 청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 조선의 자주를 이루려는 왕세자(오만석 분)와 청을 등에 업고 그런 왕세자와 대립하고 있는 홍대주(이원종 분)등의 노론세력. 그리고 그런 왕세자를 대신해 목숨을 잃는 충신 백사굉(엄효섭 분)의 가족을 지키려 하는 검선 김광택(전광렬 분)에 대해 그와 맞서고 있는 청의 입장을 대변하는 살수집단 흑사초롱의 대결. 단순한 개인과 개인, 혹은 집단과 집단의 대립과 대결이 아니라 국가와 민족, 자주라고 하는 근대적인 이념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제일검이라 일컬어지는 검선조차 국왕인 영조와 권신인 홍대주와 직접 얽혀 있다는 점이 한국의 무협답다고 할까? 결국 주인공 백동수(지창욱 분)도 왕세자인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를 위해 일하게 될 것이다.

사실 무리가 있는 설정이었다. 홍대주 개인이라면 모를까 노론이 청을 등에 업고 왕실을 위협하다니. 물론 당시 노론은 낙론과 호론으로 나뉘어 청의 정통성을 인정할 것이냐의 여부를 두고 열심히 인물성동이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결국 병자호란이 있고 100년이나 지났으니 슬슬 현실을 인정하자는 것이 인물성동이논쟁이었지만, 그러나 결국 정조가 즉위하고 나서조차 청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그 문물을 배우자던 북학파는 여전히 소수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정조와 대립하게 되는 노론벽파 자신이 상당히 보수적이고 원리적인 성향을 띄고 있었는데, 그런데 청을 끌어들여 왕실을 위협한다? 알려질 경우 노론은 가장 큰 지지기반인 산림의 공격에 직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노론이 그런 위험한 선택을 했을까? 인조와 정조 연간 김자점이 그런 식으로 청을 등에 업고 전횡을 일삼다 끝내 제거되고 있었다.

사도세자가 죽고 마는 것도 오히려 청보다는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더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이인좌의 난 이후 영조는 소론을 포기하고 노론과 유착되어 있었는데, 사도세자가 그만 소론과 가까워지며 그에 동정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소론은 영조를 거부하고 그를 몰아내려 반란까지 일으켰던 당파. 결국 거기에서 오해가 불거졌고 사도세자가 왕이 되는 것을 꺼려한 노론의 당론에 의해 영조는 사도세자를 죽이는 것을 허락한다. 설마 드라마는 사도세자와 밀착한 소론을 자주적 성향의 당파로 포장하려는 것일까?

결국은 허구일 터다. 단지 영정조라는 시대적 배경만 가지고 왔을 뿐 모든 것이 무협적으로 재구성되어 있다. 당장 실재했을 리 없는 흑사초롱의 존재부터가 그렇다. 천주와 지주와 인주, 전형적인 무협의 설정이다. 그 배후에 존재하는 더 거대한 악 청과, 그와 유착한 현실의 권력 홍대주. 더구나 홍대주와 흑사초롱은 주인공 백동수의 부모의 죽음과도 연관이 있다. 복수는 무협의 가장 흔하고 오랜 소재다. 하물며 그것이 대의까지 담고 있다면. 조선이라는 조국과 조선인이라는 민족과 백성이라는 민초, 그 거대서사와 신념을 담아내고 있다면. 나머지는 단지 그를 위한 장치이고 설정일 뿐. 그냥 허구의 이야기다.

아무튼 부모의 억울한 죽음과 그 죽음으로부터 구사일생으로 살아나는 주인공. 그리고 그 과정에서 주인공과 관계를 맺게 되는 주위 인물들. 아마도 김광택이나 흑사모(박준규 분), 장대표(박원상 분) 등은 부모처럼 스승처럼 주인공 백동수를 기르고 가르치게 될 테고, 나중에 백동수가 홍대주와 흑사초롱을 상대로 복수를 하려 할 때는 곁에서 한 손 거들게 될 것이다. 출생과 장성과 그리고 주위의 조력자들. 하필 김광택이 자신의 한 팔을 희생해가며 주인공 백동수를 팽형의 위기에서 구해내는 것까지 너무 무협적이다. 문득 떠오르는 몇 편의 무협소설은 그러한 진부함에 따른 당연스런 반응일 것이다.

가장 중요한 액션에 대해서는 솔직히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차라리 조금 더 간결하게 기교 없이 보여주었으면 어땠을까? 장면과 장면이 이어지지 않는다. 그래도 멋지게 보이려 이런저런 기법도 쓰고 효과도 주고 하는 것일 텐데, 그러나 오히려 그런 장면장면들이 제대로 유기적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음으로써 보는 맥을 끊는 역할만 하고 있다. 더구나 박철민(흑사초롱 인주 역) 등의 어색하게 과장된 연기까지 더해지며 그야말로 3류 무협드라마를 보는 느낌이랄까? 예산 아끼려 단지 원작에만 기대어 급조한 무협드라마들. 설정마저 전형적인데다 액션과 연출 또한 어설프다. 차라리 효과를 쓰지 않느니만 못하다.

그래서 불안한 것이 그래도 시청자들에 보이는 첫회이니 가장 많은 시간과 노력과 정성을 기울였을 것이라는 점일 것이다. 사전제작으로 충분한 시간과 비용을 들여 만들었는데도 이 모양이라면, 과연 이후 시간에 쫓기고 노력에 쫓기게 되었을 때는 어떻게 될까? 대부분 드라마에서 첫회 이후 퀄리티가 점처 떨어진다는 점에 비추어 과연 앞으로 이나마라도 보여질 수 있을 것인가. 지금보다 못하다면 그것도 심각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직 첫회니까. 액션의 퀄리티는 떨어질지 몰라도 이제 주인공이 직접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과연 전광렬과 최민수(흑사초롱 천주 역)가 보여준 만큼의 존재감을 주인공 지창욱(백동수 역)는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차라리 전광렬과 최민수가 주인공이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두 사람의 연기나 존재감은 탁월 그 이상이었다. 지창욱은 그러한 두 선배의 연기와 존재감을 얼마나 대신할 수 있을 것인가.

확실한 악과 분명한 갈등구조, 거기에 익숙한 역사적 배경. 하지만 익숙하다는 것은 조금만 사실에서 벗어나도 위화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양날의 검이다. 얼마나 흡립력 있기에 이야기를 끌고 가는가. 설득력있는 묘사와 설정들, 그리고 어느새 동의하게 되어 버리는 매력적인 이야기. 여기에 확실하게 각인시키는 주인공의 존재감. 타이틀롤이란 그래서 하나의 작품을 책임질 수 있는 중심이라는 뜻이다. 과연 지창욱이라는 배우는? 백동수라는 캐릭터는? 불안한 가운데 주인공이 등장하고서야 비로소 시작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일단 보기에는 화려하고 멋졌다. 초반 김광택과 흑사초롱 천주의 대결이나, 백사굉을 구하려 쳐들어간 장대표와 관군의 싸움이라든가, 박준규 역시 오랜만에 쌍칼로 돌아왔다. 어색함이라는 기술적인 부분을 감안하고 볼 때 제법 그럴싸하다. 어지간한 무협드라마보다 퀄리티는 훨씬 높다. 흑사모와 장대표가 사는 판자촌의 세트도, 그리고 캐릭터의 분장도 역시. 드라란 보는 것이라는 명제에 충실한 모습이다. 시각적으로는 완성도가 높은데 과연 준비하고 있는 이야기란 어떤 이야기인가. 준비하고 있는 캐릭터의 매력이라는 것도 역시.

그리고 사족을 붙이자면 갓난아기인 백동수를 팽형에 처한다고 끓는 솥 위에 들고 서 있는 장면은 너무 심했다고 생각한다. 원래 조선이라는 나라 자체가 팽형같은 지나치게 잔인한 형벌에 대해서는 상당히 자제하는 편이었다. 오히려 그런 잔인한 형벌의 폐지를 꾸준히 논의해 왔고 영조는 그같은 노력들을 상당부분 현실화한 왕이었다. 선조나 광해군같이 역적이라고 아이에 대해서까지 고문을 가한 예가 없지는 않았지;만, 이제 갓 태어난 아이를 끓는 물에 삶아 죽인다라. 더구나 조선에서 사형은 왕명에 의해서만 행해졌다. 너무 자극적으로 나간 것이 아닌가. 무리한 설정이며 장면이라는 느낌이었다.

후반들어 벌서 힘이 떨어지고 있었다. 한 마디로 지루해지고 있었다. 아마도 드라마가 필자를 설득하는데 실패한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제 시작이니까. 아직 시간은 있다. 한 회 보고 판단하는 그런 타입은 아니다. 귀를 기울인다. 무엇을 이야기하려 하는가. 어떻게 그것을 들려주려 하는가.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들으면 되는가. 재미란 단순히 일방적으로 전하려고만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다가가 본다. 2회에서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간만의 제대로 된 한국무협을 기대한다.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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