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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박수빈 기자
  • 문화
  • 입력 2020.10.06 18:18

[박수빈의 into The book] #1. 춘향과 닮은꼴, 영월 관기 경춘을 아시나요

-‘방구석 인문학 여행’, 춘향전 보다 더 춘향전 같은 경춘 이야기

[스타데일리뉴스=박수빈 기자]

▲ 도서'방구석 인문학 여행'

1771년 어느 이른 봄날, 열다섯 소녀 경춘(瓊春)은 여느 때처럼 강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유난히 빼어난 경춘의 미모는 뭇 남성들의가슴을 늘 설레게 했다. 경춘은 어린 나이에 홀로 되어 갓 관기가 된 신분이었지만 늘 몸가짐이 정갈했다. 

그해 정월 영월부사로 부임한 이만회를 따라 내려온 아들 시랑(侍郞) 이수학은 경치 좋은 금강정에 올라 주변을 둘러보다 여느 남성들이 그랬듯 경춘의 미모에 눈길을 빼앗겼다. 수학은 나룻배의 노를 저어 경춘이 있는 곳으로 건너갔다. 마주한 두 남녀, 설레는 가슴으로 수학이 고백을 했고 경춘도 뿌리치지 않았다. 이후 둘의 사랑은 점점 무르익어 백년가약을 맺게 된다.

달콤했던 시간은 빠르게 흘러 영조 48년(1772년) 7월 29일, 문신들을 조정에 불러들이는 전교를 받고 이만회가 한양으로 올라가면서 수학도 경춘과 이별하게 된다. 수학은 떠나기 전 ‘입신(立身)해 훗날 꼭 다시 오겠다’는 약속의 글을 써서 경춘에게 정표로 남겼다. 경춘은 언제나 글을 품에 안고 수학을 기다렸다.

▲ 출처 Pixabay

그해 10월 21일 부사 신광수가 새로 부임했다. 신광수는 경춘의 미모에 반해 수청 들 것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경춘은 수학과 백년가약을 맺은 정표도 보여주며 부사의 청을 거듭 거절하다가 수차례에 걸쳐 추초(箠楚, 치는 형벌)를 받았다. 경춘은 더는 고통을 견딜 수 없어 하루는 성복(盛服)을 하고 부사를 찾아 태연한 척 웃으며 말하기를 “며칠간 부름을 멈춰주시면 병난 몸 잘 추스려 원하는 바를 다 들어드리겠습니다.”라고 했고 윤허를 받았다.

경춘은 이튿날 아버지의 묘소를 찾아 인사를 올리고 금장강(동강)변으로 향했다. 동생의 머리를 빗겨준 후 벼랑 위에 앉아 노래 몇 수를 부르니 눈물이 치마를 흠뻑 적시고 슬픔과 한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마음을 정리한 경춘은 옆에 있던 동생을 달래 돌려보내고 강물로 뛰어내려 생을 마감했다. 임진년 10월, 그의 나이 열여섯이었다. 

비극적 결말을 제외하면 춘향전과 많이 닮아있는 이 이야기는 소설이 아닌 강원도 영월에서 있었던 실화다. 경춘이 절개를 지키기 위해 떨어진 자리에는 ‘월기경춘순절지처(越妓瓊春殉節之處)’라고 새겨진 비석이 남아 이곳이 경춘이 가파른 절벽 위에서 뛰어내린 장소임을 알리고 있다. 이 비석은 1795년(정조 19년) 8월 강원도순찰사 이손암이 월주(영월)의 절행부를 살피던 차에 이 이야기를 듣고 “천적(賤籍)의 몸으로 이런 일을 해내다니 열녀로다. 어찌 본으로 세우지 않을수가 있겠는가.”라며 자신의 봉급을 털어 영월군수에게 순절비를 세우도록 한 것이다. 

▲ 영월 낙화암, 출처 '방구석 인문학 여행'

#. 동강의 애석한 죽음들

비련의 경춘이 절개를 지키기 위해 뛰어내린 낙화암에는 그보다 315년 먼저 꽃잎처럼 떨어진 사람들이 있었다. 영월은 단종과도 깊은 관계가 있는 지역인데, 단종의 궁녀와 관리인, 종인 등 국명을 어기고 단종의 유배길에 몰래 따라와 1457년 단종이 승하하자 이들을 비롯해 총 90명이 낙화암에서 목숨을 던졌다. 

당시 동강에는 시신이 가득했고, 이날 천둥과 번개가 일고 강한 바람에 나무가 뽑혀나갔다는 기록도 함께 전해진다. 슬픔에 빠진 주민들은 이곳에 낙화암을 설치해 넋을 기렸고, 영조 18년(1742년) 영월부사 홍성보가 왕명을 받아 이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사당을 건립하고민충사(愍忠祠)라는 사액을 내렸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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