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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서문원 기자
  • 영화
  • 입력 2020.09.16 18:35

'도망친 여자' 소품 하나로 홍상수 영화의 변화를 읽다

일상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우리 삶을 바꿔 버렸을 때

▲ '도망친 여자' 메인포스터(영화사 전원사 제공)

[스타데일리뉴스=서문원 기자] 이전까지 홍상수 감독의 작품들은 만남과 잠자리, 술자리, 여기에 안주처럼 곁들여진 대화, 술주정 등이 스토리의 전반을 이끈다.

덧붙여 인간들의 위선과 이중성, 의도적인 회피, 거짓말, 다양한 욕구불만 등이 푸른 색의 소주와 마리아주를 이룬다. 

하지만 오는 17일 개봉하는 '도망친 여자'는 홍상수 감독의 장편 신작이다. 담백한 단편 소설을 읽는 것처럼 깔끔하다. 

또한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감정을 애써 외면하면서, 간헐적으로 튀어나오는 반응은 어쩔 수가 없다. 홍상수 감독 다운 진솔함이 아닐까 싶다. 화자의 경계가 느껴지는 한 마디 그리고 어색하고 짧은 침묵과 기다림. 이는 타자에게도 결국 상대적이다.

'도망친 여자'의 줄거리를 보면, 결혼 뒤 남편과 한 번도 떨어져 본 적 없는 감희(김민희). 어느날 남편의 출장으로 얻어진 휴가를 빌어 한동안 연락조차 하지 못했던 친구들을 찾아간다.

먼저 서울을 떠나 지방에 자리를 잡은 영순(서영화)이 산다는 빌라 단지를 방문한다. 막걸리, 안주감을 들고 말이다. 

들고양이를 돌보며 사는 영순 그리고 같이 사는 영진(이은미). 이웃집은 고양이 때문에 항의를 해보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다. 전부터 늘 겪었던 것처럼 기계적으로 이웃을 대하는 영순과 영진. 상황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 '도망친 여자' 감희와 영순의 술자리 스틸컷(영화사 전원사 제공)

언택트 시대, CCTV로 포인트를 준 미장센

'도망친 여자' 메인 예고편에도 등장하는 CCTV가 전작들과 차별점을 뒀다. 30년 전 인기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1991)에서 가정집 주부 한심애(윤여정)가 바라보던 비디오폰은 당시 살림이 넉넉한 부잣집의 상징이었다.

2020년 홍상수 감독의 24번째 장편 신작 '도망친 여자'에 등장한 CCTV는 기존 드라마, 영화 속에 등장하는 비디오폰과 많은 차이가 난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사회적 통념처럼 변한 '거리두기'(단절)과 '관찰'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홍상수 감독은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부터 25년간 24개 작품을 선보이는 동안 전화기, 삐삐, 휴대폰, 스마트폰 등이 소품으로 사용됐다. 

돌아보면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은 아날로그의 향수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어떤 도구를 사용하건 인간과 인간의 대화, 그 가운데 드러나는 디테일한 심리 묘사가 주를 이뤘다.

그런데 이번 신작에 등장하는 CCTV는 우리네 사회에서 가장 익숙한 도구 임에도 2018년 흥행 스릴러물 '도어락'과 유사한 분위기와 공포감이 살며시 스며들었다. 다름아닌 '불신'이다.

▲ '도망친 여자' 스틸컷(영화사 전원사 제공)

영순에 이어 감희(김민희)가 오래 간만에 찾아간 수영(송선미), 우진(김새벽), 정 선생(권해효). 이들의 과거, 현재가 영화의 맥락을 실과 바늘처럼 엮어 시니컬한 대화를 이어간다.

올초 제70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은곰상(감독상)을 수상한 '도망친 여자'는 홍상수 감독 특유의 위트와 감칠 맛 나는 대사는 여전하다. 하지만 잿빛이다.

가령, 1994년 크지쉬토프 키에스토프스키 감독의 '세 가지 색' 시리즈 중 마지막편 '레드'에 나오는 여러 대의 CCTV와 카메라가 데자뷰처럼 떠오른다. 그럼 한 때 패션 모델 겸 대학생이었던 발렌틴은 감희(김민희)가 되나?

영화사 전원사가 제작하고, 콘텐츠판다가 전원사와 공동으로 배급하는 '도망친 여자' 개봉일은 9월 17일. 청소년관람불가로 러닝타임은 77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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