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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서문원 기자
  • 영화
  • 입력 2020.05.28 18:07

[S인터뷰①] '안녕, 미누' 소모뚜, 미누와 스탑크랙다운을 회상하다

소모뚜 "한국에 많은 미누 존재해... 이주노동자, 긍정적으로 바라보길 희망"

▲ 영화 '안녕, 미누' 공연 스틸컷으로 2017년 미누와 스탑 크랙다운 멤버들이 펼쳐보였던 네팔 공연이다.(영화사 풀, 영화사 친구 제공)

[스타데일리뉴스=서문원 기자] 27일 개봉한 다큐영화 '안녕 미누'는 28일부터 CGV, 롯데시네마에서도 상영을 시작했다.

개봉작 '안녕 미누'는 목탄 미노드, 미누로 불리웠던 네팔 출신 이주노동자. 불법체류자였으며 동시에 '스탑 크랙다운'이라는 인디밴드의 보컬이었던 한 사람과 주변인들에 관한 이야기다.

나아가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을 여과없이 드러낸다.

18년을 한국에서 살았고, 한국인 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던 미누. 용모도, 언어도 한국 사람이라고 했어도 차이를 못느꼈던 그는 이제 없다. 2018년 10월 15일 미누는 고향 네팔에서 심장마비로 세상과 작별했다.

2018년 9월 다큐 '안녕, 미누'가 DMZ다큐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면서 초청인사로 10년 만에 한국을 찾았고, 한국 정부부터 허가 받은 2박 3일간 머물다 돌아간 것이 미누의 마지막 '한국 살이'였다.

현재 극장가에서 상영을 시작한 '안녕, 미누'는 그래서 미누의 마지막까지 포함된 편집본이다.

그 안에는 2017년 소모뚜를 포함한 '스탑 크랙다운' 멤버들이 네팔에 모여 8년만에 공연을 했던 장면, 나룻배를 타고 '목포의 눈물'을 찰지게 부르며 한국으로 돌아갈 날만 손꼽아 기다리던 당시 미누의 모습도 있다.

미누, 여전히 우리 마음속에 남아있는 문화청년

1992년 산업연수생 신분으로 한국에 정착했던 미누의 18년은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가 겪었던 모든 만남과 사건은 십 수년으로 압축되어 한국의 민낯을 고스란히 보여줬기 때문이다.

갑질과 폭력, 폭언은 이주노동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내 예비취업생을 포함한 모든 근로자들이 겪고 있는 노동현장의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에 더 그렇다.

그럼에도 미누는 국내의 열악한 노동환경에 맞서 과격한 시위를 주도하거나 폭력적인 모습을 단 한번도 보여주지 않았다.

미누는 '단속을 멈춰라'라는 뜻의 인디밴드 '스탑 크랙다운'(Stop Crackdown)을 2003년 11월 미얀마(버마)출신 이주노동자 소모뚜를 비롯한 몇몇 동료들과 결성했다. 

스탑 크랙다운은 2003년부터 출입국 관리직원에게 검거돼 국외로 추방되기 전인 2009년 가을까지 전국을 돌며, 다양한 문화제와 콘서트에 참여했다.

이뿐 아니라, 미누는 이주노동자 방송(MWTV) 공동대표로 이주노동자와 그들의 목소리를 인터넷 방송에 담아 세상에 알렸다.

공연이 없을 때는 종로구 창신동 뒷골목에 위치한 봉제공장에서 일을 하고, 월급을 모아 밴드 멤버들과 연습하고, 앨범도 만들었다.

미누는 문화 활동에 모든 역량을 다 쏟아부은 것이다.이주노동자들에게 일어나는 잦은 임금체불과 불의의 사고를 노래로 만들어 노동현장의 현실을 계속해서 알렸다.

돌이켜 보니 미누는 네팔사람, 이주노동자, 불법체류자가 아닌 문화청년이었던 것. 문화를 통해 노동현장의 현실을 알리고 착취와 폭력을 평화로 풀어내려 했던 메신저로써 18년간 한국에서 살았다.

▲ 미누와 함께 2003년부터 '스탑 크랙다운' 기타리스트로 활동했던 소모뚜. 그는 현재 경기도에서 사업가로 제2의 삶을 살고 있다. ⓒ스타데일리뉴스

[파워 인터뷰] 소도뚜 "미누와 함께 앞으로도 희망을 갖고 살고 싶습니다" 

지금부터 시작하는 글은 미누의 동지이자, 그와 함께 인디밴드 '스탑 크랙다운'으로 활동했던 미얀마(버마) 출신 소모뚜와의 인터뷰다. 

2007년 종각에서 열렸던 'Free Burma' 집회에서 만났던 당시 소모뚜는 날카로운 눈매에 깡마른 모습이었지만, 배우를 했어도 인기를 끌만한 용모를 지녔던 수수한 청년이었다.

어느덧 14년이 지나, 몸도 후덕해지고, 서글서글한 모습의 중년 아저씨로 변했지만. 인터뷰 중 간간히 보이는 그의 눈매는 여전히 날카로왔다.

현재 경기 부천에서 이주민을 대상으로 교류센터와 휴대폰 사업을 하는 그는 3년전 미얀마 여성과 결혼후 제2의 삶을 살고 있다. 

Q. 소모뚜씨와 미누씨를 만났던 때가 기억납니다. 2007년. 종로 제일은행(스탠다드 차타드 한국본사)에서였죠. 그때 미누씨를 평범한 한국사람으로 알았어요. 한국말을 너무 잘했으니까. 그 뒤로 인디밴드 '스탑 크랙다운'을 처음 들었는데요. 정확히 언제 결성됐었나요?

소모뚜: 미누 형에 대한 인상은 대부분 비슷한 것 같아요. 한국인으로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죠. 그리고 스탑 크랙다운이 결성된 시점이... 2003년 11월 15일 전후였었죠.

당시 첫날 명동성당 앞에서 이주노동자 추방 반대 농성을 개최했어요. 다음날 광화문에 있는 성공회 성당으로 옮겨 집회를 이어갔죠. 불법체류자 합법화를 주장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스탑 크랙다운'이 결성됐습니다. 

당시 82일간 농성을 했었는데요. '스탑 크랙다운'은 밴드를 결성후 10일 만에 첫 앨범 준비를 하고, 하룻만에 녹음했습니다.(웃음) "농성 중에 앨범을 내는 것이 효과적이다"라고 해서 급하게 만들었죠.(웃음)

저희가 녹음했던 스튜디오가 워낙 바쁜 곳이라 단 하루 밖에 시간이 없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녹음실 사장님 부인이 생일이라 하루를 통째로 빌려 줬답니다.

돌아보면, 한국사회가 이주노동자에게 숱한 상처도 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 사람이 우리의 상처를 치료해주고, 위로를 전해주는 그런 모습이 많았어요. 

상처를 주는 것도 한국인, 위로를 전하는 것도 한국인

소모뚜: 농성중 외쳤던 'We love Korea', 'Stop Crackdown' 구호들을 가사로 만든 곡이 이미 있었고, 문화제를 하면서 노래들을 만든것도 있었어요. 그래서 몇 곡만 더 만들면 앨범 한장 낼 수 있겠다고 판단했었죠.

더구나 우리(스탑 크랙다운)는 당시 젊었잖아요.(웃음) 그러니 "안되는게 어딨어?" 이런 심정으로 앨범을 만들었어요.(웃음)

다들 "음악적인 욕심 보다 이 앨범이 나오면 활동하는데 좋은 영향을 줄수 있겠다"며 생각했었어요. 그때 스탑 크랙다운 멤버들이 서울센터 쉼터 작은 방에서 합숙하면서 작사-작곡하고 연습했어요.

그뒤에 녹음 하루 전날 최의팔 목사님(서울외국인노동자센터 트립티 대표)께 저희가 만든 음악을 들려주고 바로 앨범 녹음을 시작했습니다. 아침 10시부터 새벽 1시까지 자장면 먹으면서 하루종일 스튜디오에서 라이브 버전을 녹음했었어요.(웃음)

원래는 음반 한장 내려면 제대로 준비를 하고 내야하는데, 당시 저희는 그런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당시 그런 욕심을 부리는 것이 맞지도 않았고, 하지만 다들 내공이 있었으니까.

미누 형은 아시다시피 노래를 잘하잖아요. 녹음하던 날 하루 종일 노래하는데도 연신 '괜찮아'(웃음)라고 말하면서 진행했어요. 사실 다들 음악을 할줄 아는 사람들이 결성한 밴드였기에 빨리 녹음을 마쳤던 것 같아요.

물론 주변 여건은 좋지 않았지만, 이런 저런거 따지지 않고, 편하게 녹음을 하니까 앨범이 나왔던 것 같습니다. 

Q. 스탑 크랙다운은 농성 이후에도 활동을 계속 했었죠?

소모뚜: 그렇죠. 농성은 끝나지만 투쟁은 계속한다.(웃음) 대신 방법을 바꿔, 노래로 우리의 상황과 심정을 전달하자. 메신저 역할을 하자라고 말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스탑 크랙다운' 결성 전에 저도 고향에서 밴드활동을 했고, 미누 형도 음악활동을 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취미 활동이었습니다.

하지만 2003년 농성 중에 밴드를 결성한후 부터는 이주노동자들의 입장을 전달하는 메신저로써 활동하자"라고 다짐을 했었죠.

Q. 그렇게 출발했던 다국적 인디밴드 '스탑 크랙다운', 초창기 멤버와 지금은 달랐던 것으로 압니다. 드러머 송명훈씨는 언제 합류한 분인가요?

소모뚜: 미누 형, 강라이 형(이상 네팔)은 당시 명동 외국인가요제에서 1등을 차지했었는데요. 그 두 분과 저(소모뚜), 소띠하(이상 미얀마)이 농성장에서 결성된 '스탑 크랙다운밴드' 멤버로 참여했구요.

강라이 형이 밴드 기타를 잡았고, 원래 저도 기타리스트였는데, 소띠하가 베이스를 맡고, 저는 기타 대신 드럼을 쳤었어요. 그래서 1집 앨범은 드럼 소리가 제가 친 겁니다.(웃음)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사람은 정말 꼭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면 뭐든 가능하다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스탑 크랙다운' 활동 전에 같은 이주노동자였던 미얀마 친구들과 한국에서 '유레카'라는 밴드를 결성하고 활동했었어요. 당시 저는 드럼 치는 친구가 연습하는 모습만 봤지, 제가 스탑 크랙다운에서 드럼을 맡을 줄은 몰랐거든요.(웃음) 정말 짧은 기간 안에 피나는 연습을 해서 겨우 녹음했었죠. 

그리고 얼마 안가서 강라이 형이 네팔로 돌아가고, 제가 기타를 잡고, 드러머가 공석이라 제 친구였던 꼬네이(미얀마)가 드럼을 할줄 안다고 해서 합류했고, 인도네시아 해리가 키보드로 들어오고, 저, 미누형 포함해 다섯명이 '스탑 크랙다운'으로 활동하게 됐었죠.

그뒤 2006년도에 꼬네이가 공연을 앞두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됐고, 자리가 빈 드러머를 급히 수소문을 했었죠. 그렇게 해서 노래패 '꽃다지'에 아는 형이 명훈(송명훈)을 소개시켜준 겁니다.

대학생이었던 명훈이와 홍대에서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었어요. 당시 그는 저희를 만나 밴드의 취지를 듣다가 감동도 받고, 그렇게 해서 합류했어요.

원래 공연 한번만 참가하고 떠나는 거였는데 서로 정도 들고 저희도 좋아했었던 터라, 정식 멤버가 됐어요.

물론 그전에 '스탑 크랙다운'이 이주노동자 밴드라 명훈이가 들어가면, 그 맛이 떨어질까봐 다소 우려를 가졌었지만, "한국인이 참가하면 그게 완성되는거다"라고 얘기하고 명훈이를 포함해 모두 의기투합한 겁니다.

당시 공연 전후로 서로 정도 들었고, 일단 사람이 좋았어요. 국적을 떠나 서로 마음이 통했어요. 명훈이가 밴드 멤버로써 너무나도 열심히 연주하고 성실하게 함께 해주니까 멤버들 모두가 명훈이를 합류시키기로 한거죠.

▲ 2008년 11월 9일 홍대(롤링홀)에서 열린 손현숙과 스탑크랙다운의 인권콘서트 포스터. 맨왼쪽부터 소띠하, 송명훈, 미누, 해리, 소모뚜 (이주노동자조합 제공)

Q. 멤버들이 서로 돈독했었군요?

나라도 다르고, 다문화였지만, 서로 통하는게 많았었어요. 공연 끝나면 고기집에 가서 소주 마시고, 삼겹살을 구워먹곤 했었는데요.

예를 들면, 미누형과 저(소모뚜), 소띠하는 삼겹살에 김치를 같이 먹어야 스트레스도 풀리고 그렇거든요. 그런데 인도네시아 출신의 해리는 종교가 이슬람이기 때문에 돼지 고기를 못먹었어요.

그런데도 계란말이 시켜서 늘 같이 뒤풀이도 하고, 서로를 존중하고 소통하고 살았었습니다. 다문화라는거 서로가 다름을 인정하면 되는거잖아요. 그러니 명훈이도 우리와 같이하고 함께 할수 있었던 겁니다.

밴드 멤버들이 각자 의도적으로 혹은, 정치적인 동지라서 함께 하는게 아니라, 한 인간으로써 인간을 대하고, 서로의 장단점을 알아가고 같이 공연하고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던 겁니다. 그것이 '스탑 크랙다운'이 공동으로 묵시적으로 정한 목표였고, 지향하는 바였죠.

-2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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