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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3.12.01 11:49

불후의 명곡2 "노래를 넘어선 이야기, 이해리 우승하다"

거칠면서도 섬세한 남자의 목소리, 박상민을 만나다

▲ 출처: '불후의 명곡2' 방송캡처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처음 들었을 때 새로운 블루스 가수인가 싶었었다. 록인 듯 강하고 그러면서 진했었다. 그런데 가만히 들으니 섬세하기까지 했다. 허스키하면 강하거나, 섬세하려 하면 부드러웠다. 남자의 목소리란 말이 그렇게 어울릴 수 없다. 강한 척 여린 속살을 그대로 보여준다. 아무 노래나 그냥 불러도 블루스의 소울이 느껴지는 듯하다. 가장 깊은 곳에 숨겨진 진심을 후벼파듯 들려준다.

벌써 하고 지나갔는 줄 알았다. 1990년대의 한국 대중가요를 말하면서 박상민을 빼놓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내놓는 앨범마다 히트하고, 노래방에서는 그의 노래를 따라부르느라 남자들의 목이 터져나가고 있었다. 쉽지 않았다. 허스키하면서도 힘이 넘치는 고음에 더구나 섬세하기까지 해야 했다. 그래도 신나서, 우울해서, 혹은 남모를 사연이 있어서, 굳이 노래방이 아니더라도 어디선가 혼자서 흥얼거리고는 했었다. 그것이 대중가요 아니던가. 대중이 부른다.

과연 VOS. 박상민의 '애원'을 들으면서는 별조차 없는 어둑한 하늘을 떠올리고는 했었다. 아무도 없는 가운데 홀로 외치는 '애원'이었다. 그에 비하면 VOS의 '애원'에서는 그 대상이 보이고 있었다. 지금은 곁에 없지만 너무나 간절한 그 사람이. 그 사람이 바로 앞에 있는 듯 하염없이 외쳐부르고 있었다. 떠나지 말라고. 제발 돌아와 달라고. 아니면 죽어버리겠노라고. 술이라도 한 잔 들어간 것일까? 그러나 직접 찾아가 애원할 용기는 없다. 지난밤에도 어디선가 인적마저 끊긴 거리에서 떠나간 사랑에 홀로 목놓아 우는 풀어헤쳐진 남자들이 있었을 것이다. 남자의 목소리다.

상남자가 아니라지만 바로 그것이 상남자였다. 홀로 우는 것. 홀로 모든 것을 자기의 탓으로 돌리고 울음마저 삼키는 것. 자기의 이야기를 들려주듯 한껏 힘을 뺀 노래와 적절한 가성이 남자의 감성을 더한다. 아직은 어리다. 그러나 그 나이이기에 가능한 상남자도 있는 법이다. 있는대로 폼을 잡고, 그런 자신에 도취되며, 그래서 스스로 멋있기만 하다. 슬픔과 아픔마저 자신을 남자로 만들어주는 법이다. 노래를 부를 줄 안다는 말은 이제 너무 상투적이다. 집중해서 들었다. 점수가 아쉽다. 몇 점을 주더라도 아깝지 않다.

은지원의 말 그대로였다. 어딘가 무척 산만하게 느껴졌다. 그런 가운데서도 무대를 꽉 채우는 듯한 니엘의 목소리는 정말 대단했다.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그러나 너무 많은 것을 보여주려 한 탓일까? 정작 보여주고자 한 퍼포먼스가 통일성을 잃고 제각각 흩어져 있었다. 무엇보다 틴탑 자신들이 무대와 따로 노는 듯한 느낌이었다. 자신들에 어울리는 귀엽고 발랄한 무대였지만 중반 이후로 가면 무엇을 보았는지 기억조차 흐릿해지고 만다. 아마 그것을 자신들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퍼포먼스란 그래서 쉽지 않다. 춤을 잘 춘다고 퍼포먼스도 잘하는 것은 아니다. 아쉬운 무대였다.

이해리의 강점은 다름아닌 가사와 멜로디의 해석에 있다. 해석이라기보다는 해체에 더 가까울 것이다. 낱낱이 흩어서 그것을 감정의 바닥에 깐다. 그것은 이해리 자신의 이야기가 된다. 조용히 귀를 기울인다. 노래처럼 들려오는 그녀의 많은 이야기들을. 사연이 흐른다. 구구한 사연을 알지 못해도 어느샌가 그녀의 이야기에 빠져들고 만다. 같이 울고 같이 아파한다. 그녀 자신을 안타까워한다. 노래를 잘부른다는 수준을 넘어섰다. '해바라기'란 이런 노래였구나. 아니 이런 이야기였구나.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진다. 여운이 남는다. 우승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하필 선곡이 '무기여 잘있거라'였다. 순서도 안좋았는데 선곡마저 편곡하기에 상당히 어려운 곡을 고르고 말았다. 로큰롤 스타일의 흥겨운 리듬을 뺀다면 이 노래는 아무것도 아닌 노래가 되고 만다. 거의 원곡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었다. 약간의 변화를 주기는 했지만 인상적인 정도는 아니었다. 결코 쉬운 노래는 아닌데 이 정도로 소화해낸 것도 대단하다 할 만하지만 단지 잘 부르는 것만으로는 경연에서는 많이 부족하다. 관객은 더 큰 것을 가수에게 요구한다. 잔인한 경연의 룰이다.

처음에는 상당히 예쁘게 부르고 있구나 생각했다. 원래 '멀어져간 사람아'는 그렇게 예쁜 노래가 아니었다. 그러나 중후반에 알리의 진가가 드러나고 있었다. 노래를 부르는 대상이 다르다. 노래의 대상이 다르다. 마치 직접 저 멀리에 있는 이를 부르는 듯. 그에게 자신의 목소리가 닿으려는 듯. 고음이 터져나올수록 애절함보다는 처연한 느낌이 강해진다. 그러나 알지 않은가. 결코 닿을 수 없다는 것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그래도 노래를 부른다. 노래를 부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수는 노래를 부르는 것이던가. 감정이 목소리를 따라 저 높은 곳까지 치닫는다.

오랜만에 잊고 있던 노래들을 떠올렸다. 참 많은 시간동안 잊고 있었다. 어떤 노래들은 심지어 박상민의 노래였다는 사실마저 까맣게 잊고 있었다. 대중이란 이렇게 무심하고 잔인하다. 노래를 들으며 떠올린다. 그리고 그 노래를 듣고 있던 그 시간들마저 떠올린다. 문득 노래를 흥얼거리던 순간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마저. 시간을 옮겨 놓는다. 반갑다. 오랜만의 기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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