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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3.11.12 08:04

에일리 누드유출과 한결 성숙해진 대중의 반응

자기의 자기소유, 개인의 의미를 알아가다

▲ 가수 에일리(YMC엔터테인먼트 제공)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개인의 전제는 자기에 대한 자기소유일 것이다. 자기 것이다. 자신의 몸과 생각과 행동 모두 오롯이 자기에게 속한 자기만의 것이다. 누구도 임의로 침범해서는 안되는 배타적인 자기만의 권리인 것이다. 타인에 대한 배타적인 거부가 자기를 타인으로부터 독립시킨다.

자기의 몸이다. 자신에 속한 오로지 자기의 몸이다. 그렇다면 그 권리는 누구에게 있는가? 부모도 자식을 소유할 수 없다. 설사 부부라 할지라도 서로의 육체에 대한 권리마저 공유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가 결정한다. 자기가 판단해서 결정한다. 그 책임 역시 전적으로 자신에게 속한다. 다만 그 책임의 대상과 범위는 행위의 대상에 비례한다.

공개된 장소가 아니었다. 불특정한 다수를 상대로 한 것도 아니었다. 댓가가 오고간 것도 아니었다. 그로 인해 권리를 침해당하거나 고통을 겪은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설사 유출된 사진으로 인해 불쾌감을 느끼는 사람이 없지는 않더라도 그 또한 유출이라는 행위로부터 비롯된 것이지 사진 그 자체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애시당초 다른 사람들 보라고 찍은 사진도 아니었다. 문제라면 사적공간에서의 사진을 공개된 장소에서 타인에 공개한 행위 자체일 것이다. 의도하지 않은 것이기에 결국 사진을 찍은 당사자도 피해자가 되고 만다.

역사의 발전을 어쩔 수 없이 믿게 되는 이유일 것이다. 불과 얼마전까지만 하더라도 그같은 사진이 유출되었다는, 아니 그같은 사진을 찍었다는 그 자체만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고는 했었다. 사적공간에서의 개인적인 일들까지 공적인 공간으로 끌고와 난도질하고는 했었다. 개인의 사생활조차 공공의 영역이다. 개인의 사적 영역마저 공공의 소유를 주장한다.

오랫동안 하나의 단위를 이루고 살며 함께 노동집약적인 농업에 종사해야 했던 농경사회의 사고방식이다. 너와 내가 따로 없고, 서로의 경계 또한 모호하다. 좋게 말하면 인정이고, 조금 비꼬아 말하면 오지랖이며, 보다 비판적으로 보자면 집단주의 문화일 것이다. 너와 내가 서로의 일을 자기 일처럼 나서지 않는다면 생산에 차질이 빚어진다. 노동력의 관리라는 측면에서도 개인의 사생활이란 없어야 했다. 내 일이 전체의 일이 된다.

그러나 시대는 달라졌다. 인식도 당연히 달라졌다. 아니 농경사회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공동체에 속하지 못한 이방인에 대해서는 농경사회 역시 배타적이었다. 결국은 단위다. 토지에 종속되어 있던 농촌에 비해 도시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하나의 단위로 삼고 있었다. 내가 일해서 내가 먹고 산다. 이웃해 있더라도 하는 일이 다 다르다. 한 번 본 적 없는 낯선 이웃과도 함께 단위를 이루고 살아가야 한다. 배타적인 개인이 발전할 수밖에 없다. 사실 지금에 와서 옆집에 누가 살든 내가 사는 것과 전혀 상관이 없다.

그동안 착각하고 있었다. 미디어의 발달로 인한 과도적인 착각이었다. 한 번 얼굴도 본 적 없는 사이인데 어느새 국민이네 민족이네 하나로 엮이게 되었다. 별 상관없는 이야기까지 시시콜콜 보도되기 시작했다. 인터넷은 그것을 심화시켰다. 그다지 알 필요 없는 사적인 영역의 이야기까지 다수가 공유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른바 네티즌 수사대라 불리는 일련의 현상들일 것이다. 하지만 그로 인한 여러 모순과 부작용들을 직접 경험하면서 마침내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이 나와 무슨 상관인데?"

집단이 거대해지면 개인은 왜소해진다. 집단이 거대화 고도화될수록 개인의 존재 역시 희박해진다. 집단에 대한 유대감이나 소속감도 약해진다. 집단의 이름으로 목소리를 높이는 만큼 다른 생각들도 많아진다. 통렬한 자기반성이다. 결국 그같은 사적 공간에서의 개인적인 행위들이 자신의 삶에 아무런 영향도 피해도 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 대한 개입과 관여가 불행한 희생자만 낳았을 뿐이다. 비례해서 생각한다. 무엇이 더 이익이 되는가. 더 옳은가. 상관도 없는 개인의 일을 비판해서 얻는 이익과 그로 인한 손해를 계산한다. 이성이다.

에일리의 누드유출에 대한 대중의 반응이 이제까지와는 사뭇 다른 이유일 것이다. 개인의 공간에서 이루어진 철저히 개인적인 행위였다. 그것을 개인의 목적과 이유에 의해 특정한 개인과 공유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에 대해 타인이 관여할 부분이란 전혀 없다. 오히려 그것을 불특정 다수를 향해 공개함으로써 작게는 에일리 개인에게, 크게는 다수의 대중들에게 불쾌감과 모욕감을 불러일으킨 행위 자체가 더 문제일 뿐이다. 유출한 당사자를 비난하더라도 정작 에일리에 대해서는 동정여론이 높다. 물론 전부는 아니다. 다소간 이미지훼손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이런 정도로 넘어갈 수 있다는 자체가 사회의 성숙을 보여주고 있을 것이다. 충분히 이런 정도는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게 되었다.

잘못한 것이 없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그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도 없다. 오히려 그를 보고자 하는 사람들로 인해 당사자가 더 큰 피해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다수의 이름으로 그 한 사람만을 비난하고 있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어이없는 일이다. 이성이 있다는 것은 반성할 줄 안다는 것이고, 잘못을 바로잡을 줄 안다는 것이다. 잘못한 것이 없는데 비난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로 인해 피해를 입어서도 안된다. 다만 그럼에도 유출사진을 보고자 목숨을 거는 군상들은 어쩔 수 없는 속물의 모습일 것이다. 분리할 줄 알게 된 것이다. 유출사진을 보고 싶은 욕망과 그럼에도 억울한 피해자인 에일리의 입장을..

찾아보지는 않았다. 성인이다. 여성의 누드에 목을 맬 만큼 아쉬운 처지도 아니다. 당사자가 괜찮다고 허락한 것도 아닌데 굳이 당사자가 불쾌할 일을 하고 싶지도 않다. 아무때고 에일리와 직접 마주하게 되었을 때 민망해질 일은 하고 싶지 않다. 다만 사람들의 반응을 보았다. 혹시 에일리에게 불리한 상황은 없는가. 안좋은 결과가 돌아가지는 않을까. 다행스러운 일이다. 에일리의 재능을 사랑한다. 에일리의 노래를 좋아한다. 그녀의 활달함을 사랑한다.

굳이 움츠러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더 당당해져도 좋다. 다만 조금은 눈치를 살피는 영악함도 필요하다. 죄를 짓지도, 잘못을 저지르지도 않았지만 세상일이란 이론이나 당위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일들이 너무 많다. 많은 희생을 겪으며 겨우 얻어낸 작은 성장이다. 더 이상은 억울한 피해자가 없기를. 에일리의 건재는 그 보상이다. 웃을 수 있기를 바란다. 에일리를 응원하는 모두의 한결같은 바람일 것이다. 사소한 일로 상처입기에는 에일리가 너무 아깝다.

연예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죄인이 되어야 했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단죄되어야 했다. 한 번에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계기가 필요하고 과정이 필요하다. 많은 희생이 있었다. 그리고 한 걸음을 내딛었다. 고무적인 이유다. 그나마 다행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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