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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1.06.21 18:59

김흥국과 김여진, 우리 시대의 슬픈 자화상에 대해서...

시민의 정치참여는 이상한 것도 대단한 것도 아니다.

국민과 시민은 무엇이 다른가? 국민은 국가에 종속된다. 시민은 자기 자신에 종속된다. 국민은 국가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고, 시민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그러한 주체적 충돌과 갈등의 결과 국가라고 하는 계약이 이루어진다.

이를테면 최근 불거지고 있는 '의약품 슈퍼판매'를 둘러싼 갈등이 그런 예일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약사도 약사협회도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고. 봉사해야 한다고. 하지만 약사가 최우선해야 할 이익은 누구의 이익일까? 약사협회가 가장 우선해서 고려해야 할 이익은? 그러나 그 반대편에 시민의 이익이 걸려 있다면 역시 시민 자신이 약사들에 압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러한 가운데 정치가 존재한다. 누구의 이익을 우선하며 누구를 양보케 할 것인가?

원래 그리 해야 해서가 아니다. 국가, 혹은 국민을 위해서 그리 해야 해서가 아니다. 만일 이 과정에서 시민의 목소리가 크지 않다면 당연히 모든 것은 약사와 약사협회의 입장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반면 시민들의 목소리가 크다면 시민의 입장이 더 크게 반영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어느 정도는 타협도 할 것이며 어느 정도는 양보도 이루어질 것이다.

대학등록금 문제는 어떨까? 문제를 제기하는 그 자체가 의미가 있다. 거리로 나와 대학생들이 실력을 행사하며 정부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치권에 있어 대학재단들이 갖는 영향력이란 어쩌면 그 이상일 수 있다. 자칫 대학등록금 인하에 세금이 쓰일 수 있다는 우려의 입장도 있다. 대학생과 그 가족들, 그리고 대학당국, 그 밖의 시민들, 그렇게 서로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정치인들은 각자 자신이 서야 할 줄을 고르고 그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 결국 대학등록금 인하 여부나 인하 정도는 그 과정에서 결정될 것이다.

그것이 민주주의다.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개인이 정답을 가지고 있다. 칸트는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주체로써의 개인을 전제했다. 그것은 다른 무엇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개인의 엄정한 이성과 양심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서로 다른 답을 갖는 사람들이 모여 함께 더 나은 최선의 답을 찾아가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중요한 것이 각 주체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참여다.

민주주의에 있어 침묵은 미덕이 아니다. 침묵이란 무책임이며 방기다. 어떻게 해도 좋다. 누가 되어도 좋다.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상관없다. 선진국에서 투표율이 낮은 것은 이미 그들 사회가 안정화되어 더 이상의 첨예한 이슈가 생산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암묵적 동의. 하지만 정작 결정적인 사안이 있을 때는 그들 역시 망설이지 않고 거리로 나선다. 피켓을 들고 때로는 경찰과 맞서 싸우기도 한다. 자신의 입장을 관철하기 위해서.

만일 자신이 옳다면 그렇게 주장해야 한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한다면 적극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고 그것이 관철되도록 행동해야 한다. 그것은 시민으로서의 당연한 의무다. 더 나은 대안이 있는데. 더 나아질 수 있는 아이디어가 있는데. 그런데 정작 그것을 감추고 숨긴다. 이 역시 개인의 주체적 판단에 의한 결과일 테지만 사회 전체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모두의 이익을 해치는 배반과도 같은 행위다. 그보다는 차라리 틀린 답이라도 제시할 수 있다면 그것이 틀린 것은 알 테니까.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다. 좋은 것이 가장 좋다. 나쁜 것은 그 다음으로 좋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이 가장 나쁘다. 나쁜 것은 반성케 한다. 경계하도록 한다. 그로써 더 나은 다른 대안을 찾을 수 있도록 한다. 그에 비하면 이도저도 아닌 것은. 나쁜 것이 두려워 좋은 것도 포기하고, 실패라 두려워 도전을 그만두고. 워낙에 틀린 답을 두려워하기에 갖는 한국사회의 근본적 문제일 것이다. 더구나 시민이기보다 국민이고자 하기 때문에.

그래서 한국사회에서 유독 목소리도 크게 들려오고 있는 것이 중립이라는 단어다. 정치적으로 중립이어야 한다. 과연 서로 100을 가지겠다고 다투고 있는 사람에게 공평하게 50씩 나누어 가지라 한다면 그것이 중립일까? 결국 서로에게 50씩을 포기할 것을 강요하는 또 하나의 극단에 불과하다. 두 사람 가운데 만일 100을 갖지 않으면 가족이 죽는 사람이 있다면? 50을 가져가면 확실하게 가족이 죽는다. 그래도 양보는 모두를 위한 것이 될까? 하지만 국가라는 단위에서는 그것이 허용된다. 또한 객관식에서의 정답은 그 자체로 옳다.

국가를 위해서. 국민을 위해서.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그래서 정치적 견해를 피력하기보다 침묵해야 한다. 자신의 입장을 이야기하기보다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 그러면 그 중립이란 누구의 중립일까? 어디로부터의 중립일까? 하지만 객관식에는 정답이 있고 정답은 하나다. 국가와 국민이라는 이름이 그 정답을 정의하고 다른 답을 가려준다. 그래서 침묵이 정당화된다. 아니 미화된다.

침묵하는 사람이 아름답다. 침묵하며 자기를 양보하는 사람이 아름답다. 갈등하지 않고 분쟁하지 않고 순종하며 양보하는 사람이 아름답다. 전통사회의 가치이기도 하다. 서로서로 알아서 양보하며 좋게좋게. 하지만 지금과 같은 수많은 이해가 첨예하게 충돌하고 있는 고도화된 사회에서도 그같은 방식은 통할 것인가. 그러나 여전히 사람들은 생각한다. 침묵하며 단지 양보하고 순종하는 것이 옳고 좋다. 바르다.

가끔 한국사회가 민주주의 사회인가 생각케 되는 이유다. 바로 그런 이유로 오래전 어느 사회학자는 일본을 두고 가장 성공한 사회주의 국가라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개인의 가치보다 사회의 가치가 우선한다. 사회의 가치가 개인의 가치를 침범하고 억압한다. 그러면 사회적 가치는 누가 결정하는가? 민주주의에 있어 첫째 의문일 터다. 무엇이 그들의 생각과 행동을 결정하고 강제하는가? 그러면 대한민국 사회에서 정답은 누구에 의해 제시되는가? 그것은 누가 평가하고 채점하는가?

웃기는 것이다. 연예인이라고 단지 일외적으로 개인의 시간을 할애해서 정치인의 유세를 지원했다. 공공재인 방송을 이용한 것도 아니다. 방송을 통해 어떻고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피력한 것도 아니다. 다른 사람에게 강제한 것도 없다. 민주사회의 시민으로써 당연한 자신의 권리이며 의무를 행사한 것인데 그것으로 인해 방송으로부터 퇴출되었다. 내규라는 이유로 그에 대해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마저 있고. 김흥국씨 이야기다.

그래서 또 웃기는 것이 어느새 소셜테이너라 불리며 대단한 영웅으로 떠받들려지고 있는 배우 김여진씨의 경우일 것이다. 김여진씨가 한 일이란 다른 것 없다. 단지 사안에 대해서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할 수 있는 한 적극적으로 행동에 옮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정도는 대단한 영웅적인 행위라기에는 민주사회의 시민으로써 당연한 것 아니던가? 해외의 유명 연예인들도 그런 식으로 사회적인 이슈에 대해 자기 견해를 밝히고 행동에 나서기도 한다. 김흥국씨처럼 아예 정치인을 지지하는 행사에 참여하고 직접 모금파티를 여는 사람들도 있다.

누구도 뭐라 하지 않는다. 특별히 대단히 여기지도, 그렇다고 그것을 터부시하지도 않는다. 김여진씨를 영웅으로 떠받드는 이면에 존재하는 배우가 왜 정치적인 문제에 끼어드느냐 하는 냉소적인 시선들. 김흥국씨를 방송에서 내몰고 일인시위를 하도록 만든 그것들이다. 무려 유명인씩이나 되어서 정치적 견해를 말해서는 안된다. 행동에 나서서도 안된다. 유명인이니 공공의 이익을 위해 침묵하라. 이제까지 해 온 이야기들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서야 한다. 사안에 대한 자신의 의사를 솔직히 밝히고 다른 사람들처럼 직접 행동에 나서기도 하고. 햇살 밝은 광장에서 서로의 견해를 나누고 입장을 나눈다. 더 나은 결론에 이르기 위해 싸우고 갈등하며 충돌하고 타협한다. 김흥국씨의 경우가 무슨 대수일까? 김여진씨의 경우가 무슨 대단한 일일까?

안타까운 것이다. 김흥국씨가 머리를 깎고 홀로 일인시위를 해야 하는 상황이나, 김여진씨가 경찰에 체포되고 어느새 온라인에서 영웅시되고 있는 현실이나. 결국 어느 개인이나 특정한 집단이 아닌 우리 사회에 만연한, 뿌리깊이 체화되어 있는 무의식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 더 그렇다. 침묵해야 한다. 사양해야 한다. 순종해야 한다. 원죄인 것이다.

개가 사람을 물면 뉴스가 되지 않는다. 사람이 개를 물면 뉴스가 된다. 전혀 이상할 것 없는 행위도 이상한 사회에 가면 이상한 일이 되어 뉴스가 된다. 김흥국씨나. 그리고 김여진씨나. 김흥국씨의 행동이 문제가 되는 이유일 터이고, 김여진씨의 행동이 유독 눈에 띄는 이유일 것이다. 이상하다. 도저히 이상하다. 모든 것이 정상일 터인데도. 그러나 이상하다.

떠드는 사람이 옳다. 행동하는 사람이 옳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미덕이다. 이기적이고 탐욕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그러나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귀는 열어두어야 한다. 그렇게 서로의 이기와 탐욕과 세계가 충돌할 때 보다 아름다운 미래는 열린다. 중학교 수준에서 배우는 것들이다.

다시는 김흥국씨와 같은 경우가 없기를 바라며. 김여진씨 역시 그저 평범한 한 시민일 수 있기를 바라며.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은 김흥국씨와 김여진씨가 있기를 바란다. 당연한 민주사회의 시민으로써. 한 일원으로써. 그 어떤 어색함도 거리낌도 없이. 당연한 권리와 의무로써. 말하는 자가 아름답다. 행동하는 자가 아름답다. 모든 권리와 의무를 다하는 이들이다.

항상 던지는 물음이다. 그리고 돌아오는 답이다.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것이지 민주주의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 선진국에서조차 민주주의는 현재진행형이다. 틀린 답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것을 바로잡기를 주저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은 기회가 될 수 있다. 그런 무수한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주체가 모였을 때. 역사가 진보하는 방법이다.

다시 한 번 홀로 외로이 일인시위에 나선 김흥국씨를 지지하며, 김여진씨는 조금 더 자신을 아끼시기를. 비록 모든 사안에서 입장을 같이 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곧 시민으로서의 연대일 것이기에. 저들이 있어 나도 있다. 독립적인 개인은 연대로써 힘을 얻는다. 지지하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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