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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3.09.17 09:04

[TV줌인] 굿닥터 "박시온의 시련, 비로소 성장의 계기를 갖다"

아버지의 트라우마와 차윤서의 거절, 환자가 눈앞에 닥치다

▲ 굿닥터 (제공:KBS)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두려움을 모른다면 그것은 용기가 아닐 것이다. 욕망을 가져보지 못했다면 그것을 순수라 일컫지 못할 것이다. 본능이 시키는 악의마저 이겨냈을 때 그것을 비로소 '선'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두려움을 모르는 용기는 만용이고, 욕망을 알지 못하는 순수란 순진함이며, 악의를 깨닫지 못한 선이란 무지이고 어리석음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단어가 바로 '의지'다.

인간이 존엄한 이유일 것이다. 인간만이 오로지 이 '의지'를 갖는다. '의지'란 때로 본능을 거스르고, 욕망을 부정하며, 너무나 자연스런 이기조차 거부하려든다. 존엄은 자아에서 비롯되고, 자아는 이성에서 태어난다. 비로소 추상적인 사고가 가능해진다. 배가 고프면 먹을 것을 찾는 것은 생명으로서 당연한 본능일 것이다. 그러나 먹을 것을 눈앞에 두고서도 병든 노인을 보면 그것을 양보하려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당장 눈앞의 먹을 것으로 나의 주린 배를 채울 것인가, 아니면 배고픔을 감수하고서라도 더 고통받는 누군가를 도울 것인가. 선하다는 것은 가장 용기있고 가장 강인한 이만이 할 수 있는 매우 특별한 행위인 것이다.

의사란 무엇인가. 단순히 병을 고치는 일을 하는 직업인에 불과한가. 배우고 익힌 지식과 기술로 의사라는 역할을 부여받고 그에 따른 댓가를 받아 누린다. 아니 다른 직업도 마찬가지다. 하다못해 건설현장에서 일용직으로 일하더라도 자신이 일하는 현장에서 조금씩 형체를 갖춰가는 건축물을 보고 있으면 어깨에 힘이 들어가게 된다. 받는 임금은 같더라도 더 힘들고 더 어려운 길을 마다하지 않는다. 환자가 눈앞에 있다. 기계적으로 외운 내용을 읊으며 습관적으로 치료를 시작한다. 지금까지의 박시온(주원 분)이 그랬다.

사실 그림이 나오지 않는다. 알지 못하는 병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환자가 있다. 혹은 어떤 병인가는 아는데 그 치료법에 대해서는 아직 알지 못하고 있다. 가지고 있는 모든 의학서적과 세계의 관련논문들을 찾는다. 부족하면 다른 권위있은 전문의들에게 메일을 보내 자문을 구한다. 의사들끼리 모여 방법을 찾기도 한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과 기술을 동원해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법을 찾아낸다. 마치 전쟁과도 같다. 그런데 박시온의 경우 그 과정이 완전히 생략되어 있었다. 기계같다. 그냥 자동으로 나온다. 결국 의사로서의 치열함이 아닌 기계적인 지식과 상투적인 연설이 반복될 뿐이다. 드라마로서의 후퇴다. 아쉬울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드라마 초반 김도한(주상욱 분)이 박시온의 능력을 부정하며 질타하던 내용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의사란 지식이 전부가 아니다. 기술이 전부가 아니다. 그것은 노력으로 채워넣으면 된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굳은 의지다. 의사로서 반드시 환자를 살려야 하고, 살릴 수 있어야 한다. 수많은 죽음을 눈앞에서 지켜보았고, 더구나 그 가운데는 자신의 무력함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지켜보아야만 했던 죽음 역시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결코 좌절하거나 포기하는 일 없이 사람을 살려야 한다는 의사로서의 사명을 위해 도전을 멈추지 않고 있다. 의사를 의사이게 하는 것은 부족한 지식과 미숙한 기술에도 끝내 의사이고자 하는 자신의 '의지'인 것이다. 의사로서의 '존엄'이다.

고충만(조희봉 분)이 소아외과 과장인 이유일 것이다. 그저 전무인 매형의 배경만을 믿는 속물로만 여겨졌었다. 전무와 함께 병원장을 상대로 음모를 꾸미며 때로 의사로서 해서는 안되는 일들까지 서슴없이 저지르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의사로서의 자신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는 결정 앞에서 고충만은 머뭇거리고 있었다. 끝내 전무의 지시마저 거부하며 사적으로 매형과 의절해가며 그는 자신의 의사자격을 지키려 하고 있었다. 의사이고 싶어했다. 단지 자신의 기대에조차 미치지 못하는 자기에 대해 실망하고 좌절했을 뿐 그는 이미 뼛속까지 의사였다. 박시온이 보았던 손의 수많은 상처들이 그것을 증명해준다. 어쩌면 고충만에게도 의사로서 스스로 우뚝서게 되는 계기가 찾아오지 않을까.

박시온에게도 시련이 주어졌다. 박시온 앞에 나타난 아버지 박춘성(정호근 분)이 바로 그 시련의 단초였다. 적절했다. 어린시절 박시온에게 가해뎠던 아버지 박춘성의 폭력과 그로 인한 박시온의 트라우마, 그리고 자폐증으로 인한 정신적인 불안정. 서번트 신드롬 자체가 정상에서 벗어난 상태인 것이다. 갑작스런 아버지의 등장으로 박시온은 공황에 빠지고 끝내 그를 의사이게 해주던 초인적인 기억력을 잃어버리고 만다. 오히려 평범한 다른 의학도들만도 못하다. 기본적인 처치야 배우고 익힌 것이 그것이니 어느 정도 가능하지만, 이제는 김도한이 묻는 질문에 대답하기가 무척 버겁다. 그런데 그런 박시온 앞에 환자가 찾아온다.

하필 아버지로 인해 고민하는 박시온의 앞에 앞을 보지 못하는 아버지를 위해 매일같이 길잡이를 하는 어린 딸이 나타난다. 아버지를 대신해서 다치기까지 했다. 그런데 바로 그 소녀가 사고당한 버스에 타고 있다가 병원으로 실려왔다. 그것도 병원의 의사들이 손을 쓸 수 없는 수술이 모두 결정된 뒤에 이송환자로 도착하고 있었다. 믿었던 김도한마저 급박하게 돌아가는 수술로 인해 손을 빼지 못하는 상황에 어쩌면 박시온만이 소녀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의사로 남았을 것이다. 다른 모든 의사들과 레지던트들은 수술실에 들어가 있고 박시온만이 남아 소녀를 살피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할 수 없다는 말은 안된다. 도저히 안 될 것이라는 말도 절대 안된다. 살려야 한다. 어떻게든 살려야 한다. 설사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살릴 수 있어야 한다. 차윤서(문채원 분)가 그렇게 자신의 첫환자를 수술대 위에서 떠나보내고 있었다. 포기한다면 죽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박시온 스스로 말한 바 있었다. 살아날 기회를 주는 것도 의사의 일이다. 자폐증으로 인한 정상을 벗어난 초인적인 기억력에 의해서가 아닌, 의사로서 환자를 살리겠다는 의지가 그를 의사이게 할 것이다. 의사가 된다. 비로소 사랑을 고백하고 남자로서 조금은 더 성숙해졌듯.

전형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소재의 특별함과 맞물려 매우 설득력있게 긴박하게 드라마의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다. 이대로 박시온은 자신의 특별한 능력을 잃을 것인가. 박시온을 의사이게 했던 특별한 능력과 겨우 용기내어 고백한 차윤서에 대한 사랑까지, 박시온이 겪어야 할 시련이 작지 않다. 아버지로 인해 겪어야 했던 어린 시절의 폭력에 대한 트라우마와 그럼에도 죽음을 앞둔 아버지에 대한 익숙지 않은 고민, 어머니는 아직 앞으로 나서지 않고 있다. 병원을 둘러싼 음모 역시 숨가쁘게 돌아간다. 클라이막스로 단숨에 내달리려 한다.

의사로서 자각한다. 의사로서 성장한다. 차라리 차윤서에게 거절된다면 더 흥미로울 것이다. 남자가 실연의 쓴 맛도 알아야 비로소 어른이 되는 것이다. 스스로 행복한 기억 속에 가두고 있던 의식이 결코 아름답지 않은 세상과 맞닥뜨리게 된다. 의지를 갖는다. 자신을 갖는다. 자아를 갖는다. 자신의 발로 걷기 시작한다. 김도한을 뛰어넘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어깨를 나란히 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늘같던 형이 이제는 술친구가 된다.

무언가 흐트러진 것들이 단숨에 정리된 듯한 느낌이다. 하나로 정돈되며 무시무시한 힘으로 내달린다. 필요한 때가 되었다.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박시온이 어른이 된다. 박시온이 의사가 된다. 다만 병원의 위기에 대해 박시온은 과연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아니면 박시온과는 상관없이 어른들의 사정에 의해 병원의 문제는 해결될 것인가. 차윤서의 선택은 무엇일까. 흔하지만 행복한 해피엔딩일까, 아쉽지만 쓰린 성장의 이야기일까. 어떤 식으로 마무리되든 이것은 박시온에게 기회가 된다. 드라마를 위해서도 기회다.

오랜만에 집중해서 보고 있었다. 아쉬움이 불식된다. 시리즈물이 갖는 아쉬움이다. 시간을 두고 판단해야 한다. 시간에 의해 단절된 내용들을 성급하게 판단하지 않으면 안된다. 결론은 한참 뒤에나 확인할 수 있다. 어차피 대중예술이란 다수의 클리셰로 구성된다. 대중과 만나는 접점이다. 다음이 궁금해지고 있었다. 하루가 길어지고 있었다. 안달한다. 빠져든다.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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