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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칼럼
  • 입력 2013.09.14 20:54

야만적인 한국사회, 갑을 문화의 기원.. '힘이 모든 것을 대변하는 정글, 그 배경을 살피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러일전쟁 이래 구일본제국군은 가혹할 정도로 엄정한 군기로 유명했었다. 보급조차 없이 죽으라는 명령을 내려도 기꺼이 따랐다. 아직 그다지 불리한 상황이 아님에도 착검하고 만세돌격을 하는 일본군은 연합국에게 공포의 대상이기도 했다. 강해서가 아니라 이해할 수 없어서였다. 

그러나 한 편으로 지휘체계가 흔들리거나 하면 일본군은 어느 나라의 군대보다 군기가 무너진 모습을 자주 보여주고 했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포로가 되었던 일본군 장교들일 것이다. 그토록 악착같이 저항하던 일본군 장교들이건만 포로가 되는 순간 길들여진 개처럼 연합군 심문관들이 놀랄 정도로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모습을 보이며 중요한 기밀마저 순순히 털어놓고 있었다. 항복하는 순간에조차 엄격하게 지휘체계를 유지하던 다른 열강에 비해 더 이상 지휘관이 명령을 내릴 수 없는 상황이 되면 하극상마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하기는 지휘자인 초급장교에 대한 폭력이 일상으로 이루어지던 곳이 바로 구일본제국군이기도 했었다. 초급장교라면 명백히 지휘체계상 자신들의 상급자였을 테지만 이미 부대를 장악하고 지배하고 있던 고참병들에게 있어 이들은 자신들의 입맛대로 길들여야 할 대상에 불과했다. 즉 장교와 병이라고 하는 체계보다 현재 힘을 가진 것이 누구인가를 우선항 행동이라 할 수 있었다. 먼저 군복무를 마치고 전역한 예비역조차 예외는 없었다. 엄연한 병 선배였지만 그들은 신참이었고 그런 만큼 가혹한 대우를 감당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바로 구일본제국군이 자랑하던 군기의 실체였다. 지휘관들은 도시출신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말도 많고 생각도 많다. 그래서 묵묵히 시키는대로 따르는 농촌출신들을 선호하고 있었다. 지휘관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들의 위치나 역할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이성적인 존재가 아닌,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명령이니까 시키는대로 따르는 맹목적 대상들이었던 것이다. 부족한 이유와 논리들은 권위와 폭력으로 대체되었다. 따르지 않으면 댓가를 치러야 한다.

워낙 메이지유신 이전까지 각 번으로 나뉘어 일본인이라는 자각조차 없이 살아가던 일본인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을 하나로 묶기 위해서는 고도의 이론과 논리가 필요했다. 자신들이 일본인이고 일본을 위해 충성해야 하는 이유들을 제시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쉬운 방법이 있었다. 천황이라는 이름 아래 모든 일본인을 억압하면 되는 것이었다. 복종을 강제하고 이탈자를 처벌한다. 일본군은 단지 그러한 극단적인 예에 불과했다. 전투를 치러야 했었다. 과연 그러한 상황에서 폭력이라고 하는 요인이 제거되었을 때 일본인들은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기자가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강점되었던 역사에 대해 분노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승만과 군사정권에 의한 독재에도 분노하는 이유다. 한반도의 근대화는 일본제국주의의 강요와 억압에 의해 시작되었다. 근대화라기보다는 근대화된 일본화였다. 일본의 필요에 의해 한반도인의 입장이나 바람과는 상관없이 강제로 근대화된 일본은 이식되었다. 한반도인들에게 필요해서가 아니라 일본인들의 필요에 의해 일방적으로 강요되었고 강제되었다. 한반도인들은 새로운 지배자가 된 일본인들의 폭력 앞에 일방적으로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한반도인들은 그에 대해 무엇도 묻거나 따질 수 없었다. 철저히 피동적인 대상으로서만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수십만의 사람들이 이데올로기에 의해 학살당했다. 나라를 지켜야 할 군대가 총부리를 돌려 쿠데타를 일으켰다. 독재정권을 지키기 위해 권력은 그에 반대하거나 저항하는 이들을 무차별로 체포, 감금, 고문, 심지어 살인까지 저질렀다. 그 모든 일들이 권력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유일하게 그들이 내세울 수 있었던 명분이 바로 '반공' 하나였다. 해방되고 나서도 무려 수십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대한민국이 내세울 수 있는 판단의 기준이란 알량한 '반공' 하나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나마도 한국전쟁이라고 하는 특수한 상황에서의 폭력에 대한 기억에 기반한 감정적 '정의'에 불과했다. '반공' 이외의 정의란 한국사회에는 아주 오랫동안 존재하지 않았었다.

무엇이 옳은가보다 무엇이 이익이 되는가를 따진다. 무엇이 바른가보다 무엇이 현실인가를 먼저 생각한다. 경제적으로 성장했다. 그래서 잘살 수 있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들이 있다. 부당하게 억압당하고 인신의 자유와 심지어 목숨마저 빼앗긴 사람들이다. 분노해야 당연하다. 하지만 그로 인해 얻어진 이익만을 생각한다. 그로 인해 얻어질 이익들만을 생각한다. 권력만 가지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만한 힘만 가질 수 있으면 무엇을 해도 상관없다. 그래서 부모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아이들에게 그렇게 말해왔었다.

"대학에만 가면 너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해도 좋다!"

출세만 하면. 돈만 벌면. 그래서 남들보다 높은 자리에만 오르면. 정의가 사라진 곳에 이익과 힘의 논리만이 남게 된다. 마음대로 하기 위해 대학에 가고, 다시 마음대로 하기 위해 더 높은 곳을 바라보며, 모두가 하나같이 보다 높은 곳을 향해 경쟁하며 달려간다. 먼저 도착하는 자가 승자다. 더 높은 곳에 먼저 도착한 자가 승자가 된다. 승자는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승자가 정의다.

아마 그러한 갑을문화의 전형적인 모습을 단적으로 드러내보이고 있는 것이 바로 '진상'이라 불리우는 이들일 것이다. 손님은 왕이다. 물건을 구매하며 돈을 지불하는 위치에 있으니 당연히 판매자에 비해 우위에 있을 것이다. 평소 그러던 사람이라면 차라리 이해하기도 쉬울 것이다. 하지만 평소에는 얌전하던 사람이 가게에만 들어가면 돌변하고 만다. 반말에 폭언에 심지어 폭력까지 일삼는다. 원칙도 규정도 무시하고 자기 하고 싶은대로만 하려 한다. 누군가 그것을 지적하면 반발한다. 내가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데.

연예인에 대한 대중의 입장을 갑을문화의 한 부분으로 이해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잘못된 사실을 근거로 비난을 퍼붓는다. 누군가 그에 대해 조심스럽게 진실을 알리고 주의를 요구한다. 오히려 화를 낸다. 대중을 가르치려 든다. 대중은 가르치는 대상이 아니다. 복종의 대상이다. 대중이라는 이름 뒤에 숨은 채 자신에게 오류를 지적하는 대상에 대해 분노를 드러낸다. 같은 대중에게조차 '실드'라는 표현으로 그들의 무도함을 공격한다. 무오류는 권력이 추구하는 것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하는 지적에 대해서조차 대중이니 따르기를 요구한다.

한국사회의 기만적일 정도로 엄격한 도덕주의의 근거일 것이다. 어떤 체계적인 이론이나 논리에 기반한 도덕주의가 아닌 것이다. 왜 그래야 하고 어째서 그래야 하는가에 대한 깊이있는 고민의 결과가 아닌 것이다. 그것을 진지하게 대화하고 토론할 수 있는 문화가 아니다. 부모가 시키니까, 선생님이 그렇게 가르치니까, 사회가 그렇게 강요하니까, 그래서 그것을 거부할 위치가 되면 도덕이란 한낱 웃음거리가 되고 만다. 그러기 위해서 힘을 가지려 하는 것이기도 하다. 엄격한 도덕률이란 그럴만한 위치에 이르지 못한 이들이나 지키는 것이다. 명령에서 벗어난 구일본제국군처럼 도덕적 강제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마음대로 해도 상관없다.

그래서 한국사회의 갑을문화에는 도의라는 것이 없다. 보편의 합리 역시 없다. 모든 사회적 의무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대신 그 모든 책임은 을에게 씌워진다. 그들은 도덕적이다. 도덕적이기 때문에 도덕으로부터 자유롭다. 사회는 그들을 질시하면서도 부러워한다. 그들처럼 되고 싶어한다. 함부로 행동해도 아무도 뭐라 하지 못하는 매장은 그래서 그들에게 훌륭한 탈출구가 되어준다. 함부로 말하고 행동해도 오히려 눈치를 보아야 하는 연예인이란 훌륭한 대상이 되어 준다. 자신들은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 않으면서도 연예인에게는 사소한 잘못으로도 가차없는 비난을 퍼붓는다.

뒤틀린 근현대사의 잔재일 것이다. 고민할 여지조차 없이 강요된 근대화가 가져온 폐해일 것이다. 명분없는 권력의 불의한 지배가 만들어낸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한국사회에는 이성이란 없다. 인격도 인간에 대한 존중도 없다. 힘만을 쫓는다. 힘의 우열만을 판단한다. 한국사회에서 유독 성범죄가 빈발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성범죄란 가장 저열한 폭력의 투사일 테니. 성욕보다는 오히려 폭력에 대한 욕구가 성범죄를 일으킨다.

아무튼 현실에서도 흔히 듣게 되는 말일 것이다.

"네가 뭔데?"

먼저 상대의 정체부터 묻는다. 상대의 나이와 성별과 직업과 신분을 묻는다. 우열을 판단한다. 나보다 우월한가. 혹은 나보다 열등한가. 토론이 성립할 수 없다. 혹은 좌파인가를 묻는다. 혹은 일베인가를 묻는다. 나 자신이 무엇이라서가 아니라 나 자신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어려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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