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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3.08.01 07:59

[TV줌인] 너의 목소리가 들려, "민준국과 박수하의 차이, 살인자가 되기까지"

민준국의 절규, 박수하 장혜성과 자신을 지켜내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참으라. 잊으라. 없었던 일로 여기라. 자기 삶에 충실하라. 열심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복수일 것이다. 그것이야 말로 진정 가치있는 일일 것이다. 희생된 이들도 그것을 바랄 것이다. 그러니 아무것도 하지 말라. 아무것도.

묻고 싶다. 그래서 민준국(정웅인 분)이 그렇게 울부짖으며 절규하다가 어머니와 아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위해 조용히 다시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려 했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그토록 피를 토하며 외쳐도 들은 척도 않던 그들이었다.

기자라는 신분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야 했을 심장을 빼돌렸다. 고작 몇 줄의 기사를 얻어보겠다고 의사로서의 양심을 팔았다. 어쩌면 살릴수도 있었을 환자가 그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누구도 민준국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고, 또한 누구도 그들에게 책임을 물으려 하지 않았다. 여전히 아무일 없었다는 듯 그들은 변함없는 일상을 누리며 살고 있었다.

물론 장혜성(이보영 분)의 말도 옳다. 살인을 저지른 이상 그는 단지 살인자에 불과하다. 아무리 정당한 이유가 있고 동기가 있어도 사람을 죽이는 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살인이라는 죄를 저지른 범죄자로서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처지로 내몰리고 만다. 너무나 안타깝고 절박한 자신의 사연조차 자신의 죄와 함께 심판대 위에 올려진다. 처벌을 피하고자 법의 관용을 구걸해야 하는 비루한 모습에서 도대체 무슨 정의를 찾을 수 있겠는가.

살인자가 되어 교도소에 가 있는 동은 늙은 홀어머니와 어린 자식이 노숙자가 되어 떠돌다 얼어죽고 말았다. 그러나 결국 살인이라는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죄를 은폐하려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며 끝내 법의 처벌을 피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민준국이 처음부터 사람을 죽일 마음을 먹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비극이었다. 하다못해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법의 온정과 관용에 기대려 했다면 어쩌면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민준국은 사람을 죽였고, 그리고 세상을 속이려 했다. 그 댓가는 너무나 참혹했다. 누구의 탓인가? 다름아닌 민준국 자신의 잘못이었다.

▲ 제공:SBS
하지만 그렇다고 민준국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하고 순순히 받아들이려 했다면 모든 것은 순조롭게 순리대로 해결될 수 있었을까? 누구도 민준국의 편에서 민준국이 하는 말들을 들어주려 하지 않았다. 억울함과 원통함에서 비롯된 자신의 절박한 몸짓마저 법은 오히려 잘못을 저질렀다 공권력을 동원하여 체포하려 하고 있었다. 의사는 여전히 존경받는 의사였고, 기자는 언론이라는 권력을 손에 쥐고 있었다. 법은 민준국이 아닌 그들에게 더 가까웠다. 민준국이 아무일 없었던 듯 넘어가려 했다면 그야말로 아무일없이 그들은 지금도 그들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부정한 자가 기대는 마지막 수단이 다름아닌 '정의'라 하던가. 때로 '도덕'이라고도 부르고, 때로 '윤리'라고도 부른다.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것들과 해서는 안되는 것들이다. 수많은 살인을 저지른 살인마가 자신을 죽여 복수하려는 주인공에게 다급히 외친다.

"폭력은 안돼!"

하기는 그나마 살인자라면 범죄자다. 범죄자라면 마땅히 법에 의해 처벌을 받는다. 하지만 때로 그 법마저 굽어보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있다. 사적인 폭력이나 응징은 금지되어 있는데 정작 법이 그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는 위치에 있지 못하다. 아니 아예 그 법을 직접 만들기도 한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법이, 도덕이, 윤리가, 사회의 규범이 금지한 모든 것을 감히 시도조차 못하고 그저 지켜보아야만 한다. '규범'이라고 하는 '정의'가 그들의 손에 쥐어진 이상 누구도 감히 그것을 어기고 그들에게 도전할 생각을 하지 못한다.

민준국과 박수하의 차이? 너무나 간단하다. 박수하가 사랑하고 박수하를 사랑하는 그녀가 바로 변호사다. 장혜성의 동료인 차관우(윤상현 분)와 한때 라이벌이기도 했던 서도연(이다희 분) 역시 장혜성을 통한다면 얼마든지 도움을 부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민준국은 살인자다. 전과자이기도 하다. 전국에 수배까지 내려져 있다. 굳이 박수하가 나서서 어떻게 하지 않아도 법이 대신해서 처벌해 줄 것이다. 그런데 민준국이 사회적으로도 명성이 높은 영향력있는 고위인사였다면 과연 어떠했을까? 심지어 변호사인 장혜성조차 그의 존재 앞에서 무력할 뿐이다.

자신의 아내를 죽음으로 몰고간 그들이 고작 그저그런 정도의 주제들이었다면 민준국도 굳이 자신의 손을 더럽히며 살인까지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저 경찰에 신고하는 것만으로도 제대로 수사가 이루어지고 법에 의해 처벌까지 가능하다. 엄정하게 사실을 밝혀 당사자이게 그에 따른 엄격한 책임을 묻는다. 그러나 그다지 내세울 것 없는 가난한 처지의 민준국에게 의사와 기자라고 하는 직업은 너무나 버겁고 두려운 것이었다. 차라리 죽인다.

혁명이란 그렇게 일어난다. 들어주는 이가 없을 때. 도저히 들어주려 하지 않을 때. 혼자서만 떠들고 있을 때. 억울함이 쌓이고 분노가 쌓인다. 그것을 풀 어떤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다. 처음에는 그저 당장의 억울함과 분노를 풀기 위해서, 그리고 이내 보다 근본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생각해낸다. 한 개인이 저지르면 살인이지만 수천수만의 민준국이 부정을 저지른 의사와 기자를 테러하여 근본부터 바꾸려 한다면 혁명이다.

답답하다. 사람을 죽였으니 살인이다.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었다. 도저히 그것 말고 다른 방법은 보이지 않았다. 짐승이 된다. 괴물이 된다. 어머니와 아들마저 그 순간 그는 잊고 있었다. 그러나 누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가. 모든 것의 시간은 민준국의 살인이라지만, 그렇다면 민준국의 살인은 어디로부터 비롯되었는가. 그것은 과연 누구의 탓일까? 법도 정의도 이 사회도 누구도 그를 죄로부터 지켜주지 못했다. 장혜성의 어머니 어춘심은 너무 늦었다. 장혜성의 어머니를 죽인 순간 민준국 역시 다시 돌아올 수 없게 되어 버린다. 돌이킬 수 없다. 한 사람만 있어주었더라면.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그래서 부럽다. 그보다는 억울하고 화가 난다. 자기가 박수하 같았으면. 간절히 믿어주는 이가 있고, 그에게 충분한 힘까지 주어져 있다. 누구라도 의지할 수 있는 한 사람만 있었다면. 믿고 기댈 수 있었던 한 사람만 있었더라면. 그것이 더욱 민준국을 견디지 못하게 만든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이 민준국 자신이었다는 인정과 함께 박수하와 같을 수 없었던 자신의 불운에 대해 더 절망한다. 박수하가 옳다. 그러나 자신은 옳을 수조차 없었다. 그렇다고 그대로 참고 넘어갈 수는 없었다.

민준국은 박수하가 아니다. 장혜성도 아니다. 그럼에도 민준국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이 사회의 룰이기 때문이다. 민준국 개인의 억울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회의 보편적 규범이다. 그래서 민준국은 죄인이 된다. 심판을 받는다. 그러나 묻는다. 죄란 무엇인가? 민준국은 죄인이다. 살인자다. 무엇이 민준국을 살인자로 만들었는가? 장혜성은 민준국 자신이라 단정해 말하지만 차관우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인간은 오롯이 홀로 존재할 수만 없다. 오롯한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도 인간은 너무 많은 조건들을 필요로 한다. 약하기 때문이다. 악한 것이 아니라 약한 것이다.

박수하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 거의 비중없이 지나갔다. 굳이 필요없는 능력이었다. 중반 이후부터 박수하의 능력은 그저 구색맞추기에 불과했다. 민준국의 절규가 귓가를 맴돈다. 그럼에도 허무하게 뒤로 넘어가고 마는 무기력한 모습 역시. 과연 정웅인이다. 민준국이 살린다.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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