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사회
  • 입력 2013.07.20 08:32

해병대 캠프사고, 병영사회의 우울한 단면을 보다

아이들이 구명장비조차 없이 위험한 바다로 나가야 했던 이유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유럽의 군대에서 구타와 가혹행위가 사라진 것은 사실 그리 오래지 않다. 특히 머스킷시대 유럽의 군대는 거의 이같은 구타와 가혹행위에 의해 유지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정면에서 서로 마주보고 차례대로 총을 쏘는데 명령에 따라 대열을 유지하며 두려움없이 전진하기 위해서는 먼저 살고자 하는 본능을 지워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도구로 만든다. 단지 수단에 불과하다. 인간은 없다. 인격을 가진 존엄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쓰레기다. 하잘것없는 고깃덩이에 불과하다. 당장 어떻게 된다고 아쉬워 할 사람 하나 없는 그저 흔하디 흔한 병사의 하나에 불과하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병사들 가운데 그는 고작 하나다. 무차별적으로 퍼부어지는 모멸과 학대는 인간의 존엄을 낱낱이 해체하여 그저 명령에 충실할 뿐인 유용한 도구로서 재탄생시킨다. 이제 나가서 명령에 따라 죽어도 좋다.

군대 갔다오면 사람된다는 말이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할 수 있다. 시키면 도무지 말을 들어먹지 않는다. 하라는대로 그저 하면 그만인데 따박따박 이유를 따져묻고 자기가 그 여부를 결정한다. 부당하고 불합리한 지시나 명령에 대해서는 심지어 아예 대놓고 거부하거나 제멋대로 내용을 바꾸는 경우도 적지 않다. 불편하고 성가시다. 그저 시키는대로만 하면 된다. 그저 시키는대로만 하면 되는데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필요따위 전혀 없다. 철저히 주어진 명령에 복종하는 순종적이면서도 피동적인 존재야 말로 가장 쓸모가 있을 것이다.

요즘 아이들은 나약하다. 왜 불평불만을 늘어놓으니까. 자기때는 안그랬다. 묵묵히 참으며 버텼다. 어른들이 하라는대로. 직장상사가 시키는대로. 힘들고 불편해도 그것이 자기에게 주어진 일이니까. 자기에게 주어진 요구니까. 그것을 도저히 참아내지 못한다. 견뎌하지 못하고 그만 나약한 자신을 드러내고 만다. 강해져야 한다. 누가 무슨 일을 시키는 묵묵히 시키는대로 끝까지 버틸 수 있는 강한 인간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그런 것을 배울 수 있는 곳으로 보낸다. 훌륭한 사회인이 될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인내력이 강하다. 어떤 억울한 일도 묵묵히 참아낼 수 있다. 폭력과 욕설과 가혹행위까지 동원된다.

아이들을 그토록 해병대캠프로 보내려 하는 이유일 것이다. 아이들만이 아니다. 이미 어른인 직장인 가운데도 많은 수가 자의나 혹은 타의에 의해 해병대캠프로 보내진다. 올림픽을 앞두고 국가대표팀 선수들이 해병대 캠프에서 훈련받는 장면이 뉴스로 보여지기도 했었다. 그래서 방치하는 것이다. 더 위험할수록, 더 고통스러울수록, 우는 소리를 하면 아직 한참 나약한 것이다. 그런 것까지 꿋꿋하게 견뎌낼 수 있어야 한다. 구명조끼조차 없이 밤바다로 나가게 되더라도 두려워하거나 당황하는 일 없이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어른도 쉽지 않다.

뉴스를 보다 말고 스마트폰으로 날짜부터 확인했다. 올해가 벌써 2013년이었다. 어렸을 적 2013년이면 자동차가 하늘을 날아다니고 우주여행을 해외여행하듯 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었다. 필자가 어렸을 적에도 수련회라는 것이 있었다. 극기훈련이라고도 불렸다. 다른 것 없었다. 엄격하게 통제된 일상과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가해지는 고통, 더불어 부실한 잠자리와 먹거리까지. 참고 견뎌야 한다. 참고 견뎠다. 어차피 일정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게 될 테니. 강요와 강제에 의한 단련이라는 것이 갖는 의미였다. 그런데도 지금도 아이들을 굳이 비싼 돈까지 들여가며 사설 해병대캠프로 보내고 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그러고보면 바로 이런 것들이야 말로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한국사회 특유의 갑을문화의 한 원인이 되고 있을 것이다. 역시 2차세계대전 당시 가혹한 군기를 통해 전투력을 유지하고자 했던 구일본제국군이 그 한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명령체계가 유지되는 동안에는 그런 정병이 없었다. 그러나 명령체계가 붕괴되면 군이라는 조직 자체가 함께 사라져버리고 만다. 누군가 명령해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 강요와 강제로써 그들을 통제해 줄 사람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엄정한 군기를 자랑하다가도 한순간에 더 이상 군이라고도 할 수 없는 야만적인 상태로 돌아가 버리고 만다.

불과 얼마전까지만 하더라도 한국군 역시 그와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았었다. 군기란 아직 이른바 짬밥이 되지 않는 신병들을 위해 있는 것이다. 고참이 되고 더 이상 위에 사람이 없게 되면 그때부터는 군기란 남의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말년병장이라는 말이 그래서 나온 말이다. 고참이 될수록 군기가 엄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고참이 되고 나면 오히려 군기가 빠지게 된다. 폭력에 의해 유지되는 군기가 갖는 한계인 것이다. 지금만 견디고 나면. 지금만 버티고 나면. 그리고 마침내 지금의 고통과 공포로부터 벗어났을 때 일탈이 시작된다. 평소 멀쩡하던 사람인데 자기보다 열등하다 여기는 대상 앞에서 자신을 잃어버리는 예가 그런 것이다.

이성으로써 사고하는 것이 아니다. 양심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복종하게 한다. 그저 인내하게 한다. 그리고 궁리하도록 만든다. 공자가 말했다. 법이 너무 엄하면 백성은 그것을 피하는 방범만을 궁리하게 된다고. 가혹한 폭력과 억압은 그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동기만을 강화시켜줄 뿐이다. 때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막다른 지경에 이르면 극단적인 선택도 서슴지 않는다. 그런데 폭력과 억압이 사라졌다. 강요와 강제가 사라졌다. 자신을 통제할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갑을관계에서의 갑도 결국 다른 갑을관계에서는 을일 수 있다. 평소 억압받는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힘과 지위를 확인하고 싶어한다. 오로지 갑만이 존재하게 된다. 다시 그것을 참고 인내하지 않으면 안된다.

현명하다면 부당한 일을 당할 경우 그에 먼저 항의부터 할 것이다. 항의할 상황이 아니라면 다른 현재의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습관적이고 반복적이라면 근본적으로 바로잡을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할 것이다. 오히려 조교들에게 묻는다. 그리고 대화를 통해 대안을 찾아간다. 폭력이 아니다. 욕설이 아니다. 위험천만한 과제들이 아니다. 차라리 밤바다로 나가자고 하면 먼저 구명조끼부터 스스로 찾아 입고서 배에 오르도록 훈련시킨다. 하지만 그런 것을 해병대캠프라 부르지는 않을 것이다.

거대한 병영사회일 것이다. 어쩔 수 없다. 구일본제국군에서 복무했던 이들이 해방 이후 이 나라의 군의 주축이 되었다. 군사독재가 있었다. 군인들이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대한민국이라는 사회를 통제했었다. 아무것도 없을 때는 효율적이기도 했다. 강제로라도 등을 떠밀면 무언가 되어가는 것이 보이기도 한다. 말 잘 듣는 병사가 훌륭한 병사다. 자발적이고 창의적인 개인보다 그저 시키는대로 묵묵히 잘하는 조직을 위한 부속이 더 유용하다. 꿋꿋하게 참고 버티며 아무리 부당하고 억울한 상황이더라도 마음을 다한다. 그런 개인들을 길러낸다. 무려 개명한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안타까운 사고였다. 아니 사고가 아닌 인재였다. 그것은 살인이었다. 안전장비조차 없이 아이들을 험한 바다로 내몬 교관들이나, 수영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조교들에게 그것도 바다에서 아이들을 내맡겼던 캠프나 방송국 관계자들, 무엇보다 그같은 해병대캠프로 아이들을 떠밀듯 내몰고 혹은 방치했던 학교와 학부모들. 전혀 이상한 것을 느끼지 못했었다. 당연하게만 여겼었다. 당연하게 사고가 나고 말았다. 우리사회 전체의 문제다. 어째서 아이들은 그곳에서 그 위험한 바다에서 아무런 구명장비 없이 배에 타야 했던 것일까?

왜 하필 해병대캠프였을까? 그리고 일어난 사고 역시 그 의미를 곱씹게한다. 위험한 바다로 안전장비조차 없이 아이들을 내몰리고 있었다. 반대는 있을 수 없었다. 거부란 있어서는 안되었다. 그런 아이들로 자라나도록 철저히 통제하여 가르친다. 해병대여야 하는 이유다. 아직까지 해병대는 대한민국의 모든 군대 가운데 가장 군기가 세다고 알려져 있다. 해병대캠프가 필요한 이유다. 비극의 이유였다. 화나기보다 차라리 미안해지는 이유일 것이다. 이제는 필자 역시 아이들을 해병대캠프로 보낸 기성세대의 일부가 되었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향하는 바다가 얼마나 위험한가도 제대로 듣지 못하고 있었다. 교관들 자신도 그에 대해 전혀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었다. 교사들은 그런 아이들을 교관들에게 맡기고 방치하고 있었다. 아마 아이들에게 구명장비마저 주지 않은 것은 아이들을 강하게 만들려는 선의에서였을 것이다. 근본적인 이유를 생각하게 된다. 그조차 견뎌냈어야 했다. 바로 아이들이 해병대캠프로 가야 했던 이유였다. 구명장비 없이 바다로 나가야 했던 이유였다.

인간이기에 편하고 싶다. 존재하기에 안전하고 싶다. 당연한 것이다. 쉬엄쉬엄 할 수 있는 만큼만 한다. 할 수 있는 만큼이 해야 할 만큼이 된다. 그것이 궁리다. 그것이 지혜다. 인간의 문명은 그렇게 발전해 왔다.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되돌린다. 도대체 그토록 필사적으로 참고 견디는 법을 배워야만 하는 당위란 무엇이었을까? 무엇을 대비한 것일까? 우울하다. 아프다.

모바일에서 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