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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음악
  • 입력 2011.06.12 17:13

나는 가수다 "뽕끼와 한, 서러움, 신명, 한국인의 보편적 정서에 대해서"

이문원씨의 "나가수 임재범과 옥주현, 결국 '뽕끼'의 수준차"에 덧붙여!

 

문화평론가 이문원씨의 "나가수 임재범과 옥주현, 결국 '뽕끼'의 수준차"라는 제목의 평론을 읽었다. 대중음악평론가 차우진씨의 "[특집]노래만 남고 음악은 빠진 '나가수' 신드롬"이라는 비평을 인용하며 가창력과 뽕끼에 대해 심도있게 접근하고 있었는데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을 수 있었던 흥미로운 글이었다. 다만 한(恨)이라는 정서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는 조금 소홀하지 않았는가.

흔히 우리 민족의 보편적 정서를 두고 한(恨)이라는 한 글자로 정의하는 경우가 많다. 한(恨)이란 이문원씨가 지적한 대로 아마 "서러움"이라는 단어로 다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단지 과연 서러움이란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상대와의 비교에 따른 질투와 열등감의 감정인가. 일견 비슷하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지 않을까.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여러 해 전 미국에서 한 한국인 여성이 연방경찰에 의해 아들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에 넘겨진 바 있었다. 이유인 즉 아이가 죽었다는 신고를 받고 경찰이 출동했는데 그 여성이 죽은 아이를 앞에 두고 이렇게 울부짖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내가 죽였다! 내 탓이다!"

어쩐지 공감이 가지 않는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여상하게 받아들일 일상적인 넋두리일 것이다. 누구나 말한다.

"내 탓이다! 내 잘못이다!"

물론 거기에는 이문원씨도 지적한 대상에 대한 비교에 따른 상실감과 열등감도 크게 자리한다.

"어째서 나만..."

다른 사람도 같이 불행하다면 차라리 그것은 낫다. 모두가 함께 불행해 질 수 있다면 그것으로라도 마음의 위안을 삼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 뿐이다. 오로지 나만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만이 이런 불행을 겪고 아픔을 느끼는 것. 여기에서 분명 이문원씨가 말한 비교에 따른 상실감과 열등감이라는 설명이 맞아떨어질 것이다. 다만 한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간다.

이유를 찾기 시작한다. 어째서 나만일까? 어째서 나만 이 모양인 것일까? 다른 사람들 다 놔두고. 다른 사람들은 다 멀쩡한데. 그러면서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자기 안에서 찾아낸다. 결국 다른 사람은 다 괜찮다면 나에게 잘못이 있을 것이다. 다 나에게 탓이 있을 것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이고, 불교에서 말하는 업이며, 유교에서 말하는 천며일 것이다. 내가 다 잘못한 것이 있으니 지금 이렇다. 내가 죄를 지은 것이 있으니 지금 이런 꼴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내 탓이다. 내 잘못이다. 한이다.

앞서의 한국여성이 말한 "내가 죽였다!"라고 하는 말도 그런 맥락이다. 내가 복이 없어서. 내가 죄가 많아서. 그래서 나의 죄가 아들에게 미쳤다.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고자 죄없는 아들을 죽이고 말았다. 차라리 하늘을 원망하고 다른 이를 원망하기보다 나 자신을. 그것은 또한 슬픔의 극에 이르러 감정의 정화를 얻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와도 닮아 있다. 말하는 신명이다.

한국인의 신명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슬픔의 극에서 낙천을 얻는다. 불행의 끝에서 그래도 끝내 딛고 일어설 수 있는 낙관을 가지게 된다. 그것은 한국인이 갖는 해학 - 페이소스와도 통한다. 자기의 내면으로 끝없이 파고들어간 끝에 그 심연에 이르러 비로소 더 이상 슬프지도 아프지도 않은 평정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제는 슬픔조차도 웃으며 넘길 수 있게. 아마 그러한 페이소스가 가장 잘 녹아들어간 작품이 고전소설인 "흥부전"일 것이다. 그렇게 흥부와 그 가족의 가난이란 비참하고 슬프기 이를 데 없는데 어쩐지 피식피식 웃음이 나오는 낙천이 거기에 있다.

원래 신이 내리는 것도 한이 깊은 사람이라고 한다. 한이 너무나도 깊어 그에게 신이 내리는 것이다. 신명과 한은 그렇게 통한다. 카타르시스와 페이소스도 그렇게 통한다. 그것이 한국인이 말하는 한이고 신명이다. 그리 청승맞은 트로트를 들으면서도 어느새 어깨춤이 절로 나오는 것은 그래서다. 한국사람들은 슬픔의 극에 이른 노래에 맞춰 춤을 출 수 있는 민족이다.

뽕끼란 그런 것이다. R&B의 애드립은 밖으로 향하는 것이다. 흑인음악의 바이브레이션은 밖으로 향해 외부의 신을 맞아들이려는 것이다. 반면 트로트와 전통음악에서의 바이브레이션은 안으로 머금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원래는 굴린다 했었다. 흔히 트로트의 특징이라 여겨지는 꺾기 역시 소리를 안으로 머금는 기교 가운데 하나다. 가슴에 맺힌 답답한 무언가를 밖으로 끄집어내기보다는 오히려 머금음으로써 그것을 극대화한다.

그런 점에서 이문원씨의 지적이 매우 정확했던 것이 옥주현의 노래에 대한 판단이었다. 필자 역시 옥주현이 부른 "천일동안"을 들으며 그런 생각을 했었다. 이승환이 부른 "천일동안"에는 떠나간 연인에 대한 원망과 더불어 그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 떠난 이를 쿨하게 보내지 못하고 이런 한심한 꼬락서니를 보이고 있는 자신에 대한 환멸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사람에 따라서는 이승환의 "천일동안"을 두고 참으로 찌질하다고까지 표현한다. 그런데 옥주현의 "천일동안"은 아주 정직하게 뮤지컬에서 관객에 전달하듯 노래를 들려주고 있었다.

임재범의 경우만 해도 남진의 "빈잔"을 리메이크해서 부를 때나, 윤복희의 "여러분"을 부를 때 그는 곧잘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는 퍼포먼스를 보이고 있었다. 답답하다. 무언가 북받치고 억눌려 있다. 비록 샤우트로 내지르고는 있지만 그것은 안으로 머금는 소리다. 자신의 비극으로 끝없이 침잠하며 그 비극과 마주하고자 하는 소리다. 그것은 흑인음악과는 다른 우리만의 소울이다. 임재범은 가장 한국적인 소울을 잘 표현해내는 가수 가운데 한 사람이다. 아니 거의 유일하다.

솔직히 필자의 경우 이같은 한국인 특유의 한의 정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앞서 언급한 기독교의 원죄나 불교 - 아니 힌두교의 카르마, 유교의 천명이 내포하는 어떤 의미와도 통하기 때문이다. 내 탓이다. 내 잘못이다. 그래서 나 혼자 자학하며 그렇게 안으로 삭이고 넘어간다. 그것은 사회적 변화와 발전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 한이 서린 노래를 부르면서도 정작 민중의 봉기를 통해 역사를 바꾸지 못한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권력은 바꾸었으되 세계를 지배하는 패러다임 자체는 바꾸지 못했다.

하지만 그래도 좋지 않은가. 누군가를 탓하기보다는 나 자신을 탓한다. 운명을 탓하고, 신을 원망하고, 하지만 그 전에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며 그로부터 원인을 찾는다. 한국인의 매몰참과 정겨움 모두가 여기에서 비롯된다고 본다면. 어차피 자기 탓이다. 그렇더라도 내 탓이다. 그 미묘한 경계야 말로 한국인의 정서를 이해하는 첩경일 것이다. 한국인은 무정하면서 다정하다.

이문원씨에 감사하는 까닭이다. 과연 이문원씨의 글을 보지 못했다면 이런 글을 쓸 생각이나 했을까? 뽕끼와 한, 그리고 서러움, 어쩌면 일상에서 흔히 쓰이고 아무 생각없이 쓰고 있던 말들이겠지만. 지식인이 존재하는 이유일 것이다. 좋은 글은 생각을 하게 하고 불현듯 깨닫게 한다. 대부분 동의하는 가운데 단지 한 조각 이야기를 덧붙이고자 할 뿐. 훌륭한 평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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