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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3.06.04 09:03

상어 "복수의 시작, 잔혹한 복수극을 기대하는 이유"

한이수, 비극을 품고 순수의 옛기억 앞에 나타나다

▲ 사진제공=에넥스텔레콤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 복수란 허락된 악의일 것이다. 아니 문명화된 사회라면 개인의 복수를 허락하거나 하는 일 따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문명화된 사회이고 강제에 의해 엄격하게 통제되고 있다 하더라도, 그럼에도 스스로 손에 피를 묻히지 않으면 안되는 절박함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스스로 금기를 범하고 악을 행해서라도 풀지 않으면 안되는 억울함과 분노가 있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오롯한 자신의 정의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복수란 결국 다른 누군가를 해치려 하는 것일 터다. 원수라는 이름의 누군가를 다치게 하거나 심지어 목숨까지 빼앗으려 한다. 재산을 빼앗고, 지위와 명예를 빼앗고, 그 가족과 주위의 사람들마저 빼앗아 자신이 느낀 그 이상의 고통과 절망을 느끼도록 만든다. 때로 그 가족과 주위에 대해서까지 자신이 겪은 그것과 같은 수모와 좌절을 안겨주려 한다. 그런 모습을 보며 성취감과 쾌감을 느끼고자 한다. 과연 다른 누군가의 고통을 보면서 쾌락을 얻고자 하는 그것을 인간으로서 정상이라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절박함이라 말하는 것이다. 막다른 궁지로 내몰려 더 이상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인 것이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그래서 허용된다. 그래서 허락된다. 타인을 상처주고, 심지어 죽이고, 가족과 주위에까지 피해를 주며 그것으로 쾌락을 얻고자 하는 행위가 복수라는 이름으로 용납될 수 있는 것이다. 정확히는 인정이다. 그만한 사정이 있었다. 그만한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다만 당사자야 어쩔 수 없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굳이 보고자 하는 관객의 입장이란 무엇일까? 관객은 어디까지나 제 3자로써 결코 복수의 당사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관객들은 복수하는 주인공에게 그렇게 요구하기도 한다. 더 잔인하게. 더 잔혹하게. 더 악랄하게. 더 지독하게. 복수의 대상이 저지른 악행은 그같은 수단과 과정을 정당화하는 훌륭한 빌미가 된다. 악을 저질렀으니까. 악 그 자체니까. 그러나 정작 복수를 위해 손을 더럽혀야 하는 것은 관객들 자신이 아니다. 안전한 곳에 있다. 더구나 그들은 정의롭다. 억울한 일을 당한 주인공을 동정하고, 그 과정에서 희생된 이들을 연민한다. 복수의 대상에 대한 그들의 분노는 정의감에 기초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굳이 주인공에게 진흙탕을 구르고 피투성이가 되어가며 복수를 하도록 강요할 이유란 어디에 있는가? 복수가 아닌 용서를 선택했을 때 관객들은 야유와 비난을 퍼붓는다. 마치 적에게 자비를 베푼 콜로세움의 검투사에게 그리하듯이. 그래서 그것은 하나의 유희에 불과한 것이다.

악이 있기에 스스로 악해져야 한다. 거대한 악이 있기에 스스로 더 큰 악이 되어야 한다. 더 강한 힘을 가진 악에 맞서 더 강한 힘을 가져야 한다. 잔인하고 무자비한 악에 맞서 더 잔인해지고 무자비해져야 한다. 그래서 악에 맞서 복수하려는 자신은 또한 악이 되어간다. 필연이면서 또한 관객의 요구에 의한 필요의 결과일 것이다. 그것이 악이 아닌 것은 그것을 지켜보는 관객 자신이 그것이 악이 아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자신이 지켜보고 또한 즐기고 있는 그것이 악이 아니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것은 악이지만 악이 아니다. 누구나 악을 꿈꾸지만 스스로 악이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악이 아닌 정의이기를 바란다. 그래서 그들은 거리낌없이 잔인해질 수 있고, 관객 또한 그것을 아무런 도덕적 부담 없이 응원하며 즐길 수 있다.

하필 조해우(손예진 분)가 결혼식을 올리는 그날 한이수(김남길 분)는 돌아온다.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그러나 아는 사람처럼. 그리고 그녀가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그 다음날 그는 자신의 복수가 시작되는 그 현장으로 그녀를 유인한다. 어린시절 첫사랑이었고, 지금도 그녀가 오준영(하석진 분)의 아내가 되는 그 순간 뜬 눈으로 밤을 지새고 있었다. 그리움이었을까? 아니면 미련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미처 떨치지 못한 다른 무엇이었을까? 더구나 그녀는 한이수의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을 죽이려 했던 조상국(이정길 분)의 손녀였다. 한이수에게는 조해우마저 어쩌면 복수의 수단에 불과한 것인가?

버거운 상대다. 크고 강하다. 무엇보다 가장 선량한 얼굴로 태연히 세상을 속이고 악을 행하고 있다. 양심의 가책따위는 없다. 주저하거나 망설이는 일 없이 자신이 하고픈 바를 바로 행동으로 옮긴다. 그럴 힘이 있고 그럴 능력이 있다. 자칫 그에게 기만당한 세상 전부와 맞서싸워야 하는 순간이 오게 될 지도 모른다. 수단과 방법을 가려가며 상대하기에는 여유가 없다. 옛추억에 잠기고, 인정에 이끌리고, 새삼 양심을 돌아보게 되고. 그래서 상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더 독해지고 더 악해져야 겨우 그를 이길 수 있을까? 아니 그럼에도 정당한 절차와 방법을 사용해 정의로써 복수를 이룰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조해우가 현직검사라는 것이 역설이 될까? 아니면 단서가 되어줄까?

아무튼 시작은 매우 인상적이다. 그는 잔인하다. 그리고 냉혹하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추억속의 그녀가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는 그 수간 그는 상처입은 짐승이 된다. 그의 복수에는 또 하나 당위가 더해진다. 그가 입은 상처만큼 그의 복수는 면죄부를 받는다. 더 잔인해져도 좋다. 더 난폭해져도 좋다. 더 악해져도 그는 용서받을 것이다. 그리고 시청자는 지독한 만큼 더 통쾌한 복수극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나쁜 남자가 어울린다. 양면적이다. 상처를 겉으로 드러내면 누구나 난폭한 인상을 가지게 된다. 그는 더욱 나쁜 남자가 되려 하고 있었다. 조상국의 진실을 알았을 때도 그는 조해우만은 믿으려 하고 있었다.

비극을 예고한다. 여전히 조해우는 한이수를 잊지 못하고 있다. 한이수도 어쩌면 조해우를 잊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사랑할 수 없다. 오준영의 아내가 됨으로써 차라리 그 관계는 명쾌해진다. 서로 사랑할 수 없음을 알면서 그들은 서로의 주위를 맴돈다. 기억을 일깨우고 감정을 헤집는다. 고통 뿐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통쾌한 복수일 것이다. 통쾌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복수를 해야 한다는 당위가 시청자를 잡아끈다. 복수를 지켜봐야 한다.

정의로운 복수는 없다. 복수를 하고자 하는 정의만이 있을 뿐이다. 복수를 행동에 옮기는 것은 결국은 정의라는 이름의 악의다. 아직까지는 그 악의가 매력적으로 그려진다. 조상국은 죄값을 치러야 한다. 그 진실이 파헤쳐지고 철저히 난도질당하여 고통속에 살아봐야 한다. 그것을 한이수가 이루어낼 것이다. 그래야 한다. 그것이 한이수의 정의이며, 악의의 이유일 것이다. 그는 이미 충분히 악이다. 짜릿할 것이다.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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