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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명 김윤석 기자
  • 방송
  • 입력 2011.06.09 17:11

비호감과 나가수 논란, 만연한 사회적 현상에 대해...

무한경쟁은 무수한 패자와 희생양을 양산한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노래방에서 누군가 노래를 부른다. 그런데 참 못 부른다. 사람들은 그런 때 어떻게 반응하는가?

"푸하하하하~! 뭐야 그게?"

아주 모르는 사이거나 서로 어렵다면 모른 체 넘어갈 테고, 어느 정도 친분이 있거나 하면 그것을 빌미로 놀리거나 비웃으려 들 테고,  아마 대부분 그런 정도에 멈추지 않을까.

하긴 사실 그것만도 상당한 벌칙이다. 비웃음이란 수치다. 불명예다. 명예란 자기 자신의 인정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 수치를 당하고 명예를 잃는다면 그것이 과연 당사자에게 가벼울까? 때로 사람은 그래서 명예에 목숨을 건다.

프로가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프로가수다. 명색이 노래로 먹고 사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노래를 못 부른다. 도저히 못 들어주겠다.

"푸하하~ 저게 노래야?"

오히려 프로이기 때문에 더 큰 상처가 될 것이다. 프로라고 하는 긍지가 오히려 그같은 수치와 불명예를 감당하지 못할 수 있다. 그래서 대중이 그를 외면해서 공연장에도 사람이 없고 음반을 구매하는 사람도 없다면 실의에 빠져 살던가 아니면 다른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바로 사람들이 말하는 시장이라는 것이다.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경쟁이다. 대중은 그 가운데 자신이 듣기에 가장 좋은 노래와 가수를 선택해 그를 소비한다. 그로부터 선택되지 못한 가수와 노래는 따라서 도태된다. 다만 이 경우 아티스트라고 하는 자부심과 긍지가 시장으로부터 도태되는 것에 대해 아티스트로써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고 하는 불명예까지 안기게 된다.

불명예는 수치이며 자존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다. 연예인 가운데 인기를 이유로 고민하고 아파하며 끝내 돌이킬 수 없는 불행한 선택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 그래서다. 존재를 부정당하면 사람은 때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자존은 인간에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명예에 목숨을 걸기도 하는 인간에게 있어 그것은 무엇보다 무거운 징벌이 될 수 있다. 현실에 있어서는 음악과 연기가 팔리지 않고, 자존에 있어서도 자기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고, 이보다 더 큰 징벌이 존재할 수 있을까?

문제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언제부터인가 당연하게 여겨졌다.

"노래가 그게 뭐야?"

단순히 비웃던 것에서,

"저게 무슨 가수야? 꺼져!"

첫째는 역시 공짜라는 것일 게다. 자기가 직접 구매하고 찾은 음악이거나 음반이었다면 이미 그 전에 선택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판단하기에 노래를 못한다. 음악이 형편없다. 구매대상에서 제외되었고 아예 공연을 보러 갈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저 집에 앉아서 TV프로그램에 나오는 것을 일방적으로 보고만 있으니까. 내가 원하는 가수가 아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에 대한 평가는 역시 가수답지 못하다는 데 대한 비웃음으로 충분할 것이다. 가수가 가수답지 못하고 연기자가 연기자답지 못하다. 비웃고 놀리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리고 그 가수와 - 혹은 음악인과 연기자의 음악과 작품을 소비하지 않으면. 그러나 사람들은 그로써 만족하지 못한다. 어째서?

고민했었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 사이에 당연하게 회자되기 시작한 비호감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그리고 과격할 정도의 폭력성에 대해서도. 무엇보다 어째서 그런 문제들로도 그렇게 쉽게 흥분하고 공격적이 되는 것일까? 그렇다고 나쁜 사람들은 아니다. 그러다 생각이 미쳤다. 바로 이것이 문제로구나.

명예를 잃는 것이 곧 악이 되고 죄가 되는 경우를 떠올려 보면 되겠다. 이를테면 애국자가 있을 것이다. 애국자는 명예이며 비애국자는 불명예다. 열녀는 명예이며 정조를 잃었다는 것은 불명예다. 착하다는 것은 명예이며 악하다는 것은 불명예다. 곧 도덕적 가치가 부여되는 것이다. 명예 자체가 선이 되고 정의가 되면 된다. 즉 노래를 잘하는 것이 선이며, 연기를 잘하는 것이 정의다. 따라서 못하는 것은 악이고 죄다. 단죄되어야 한다. 어째서?

답은 이와 비슷한 다른 것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겠다. 비슷한 것으로 무엇이 있을까? 바로 시험이다. 누구나 시험을 잘 볼 수도 있고 못 볼 수도 있다. 잘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못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학교에서 학생들은 그로 인해 징벌을 받는다. 점수가 낮다는 이유로 매를 맞거나 폭언을 듣고 점수가 높으면 어지간한 잘못은 면제되는 특혜를 누린다. 공부를 잘하는 것은 단지 명예가 아닌 선이고 정의이며, 공부를 못한다고 하는 것은 학생으로써 자기 본분을 다 하지 못한 악이고 죄인 것이다. 무엇인가? 결국 경쟁이다.

무한경쟁사회라 부른다. 그 가운데서도 한국사회는 특별하다. 그렇게 남을 의식하고 비교한다. 더 낫게. 더 높게. 더 훌륭하게. 더 대단하게. 도태되는 것은 무능한 것이다. 아니 모두가 승자가 되기 위해 내달리고 있는 중이니 능력이 부족하거나 아니면 노력이 부족한 것이다. 노력이 부족하다는 것은 나태하다는 것이며 성실하지 못하다는 뜻이다. 그것은 악이다. 승자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자기의 가치를 증명한 것이니 선이다.

남들보다 못한 것은 단순히 웃고 넘어갈 놀림거리가 아니다. 아니 놀림은 그 자체로써 징벌이 되어야 한다. 끊임없이 환기되어야 하고 그로써 상처를 입어야 한다. 상처는 그로 하여금 다시는 그같은 수치를 겪지 않도록 하는 약이 되리라. 상처를 입는 쪽이 차라리 패자가 되는 것보다는 낫다. 그래서 공부를 하지 못해서 선생님에게 맞는 매를 사랑의 매라고 말한다. 공부를 잘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며 못하는 것은 비정상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사회를 지배하기 시작한 논리다. 심지어 작년 타블로와 관련한 논란에서 그런 이야기들을 적잖이 들어야 했었다.

"처신이 영리하지 못했다."

만일 그것이 가치중립적인 단순한 판단에 불과하다면 문제될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다 대고 책임을 묻는다.

"그러니까 까여도 할 말이 없다."

여기에도 처신을 영리하게 잘했어야 한다는 당위가 붙는다. 그것은 정상이고 표준이며 선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벗어났다. 그보다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비난을 들어도 할 말이 없다. 그것은 잘하지 못한 데 대한 책임이다. 사실 이 말이 가장 큰 힌트가 되었다.

어째서 비호감인가? 그러고 보면 무한경쟁 속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열등감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항상 비교하고 비교당한다. 가장 잘하는 한 사람마저도 바로 밑에서 추격해 오는 다른 사람을 항상 의식하고 긴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의 정신이라는 게 그렇게 항상 긴장해가며 열등감을 감당해가며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강하지 못하다. 그것을 발산할 다른 대상이 필요하다.

전근대사회에서도 엄격한 신분질서에 따른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천민이 존재했었다. 어차피 상위신분들에게 억압받고 차별받는 것이야 같지만, 그러나 천민이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천민을 억압하고 차별할 수 있는 신분의 사람들은 위안가 안도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위로부터의 억압과 강제는 아래에 대한 억압과 강제로써 해소된다.

바로 그러한 무한경쟁의 스트레스가 원인인 것이다. 항상 주위를 의식해야 하고, 그러면서도 열등감에 시달려야 하고. 그것을 발산할 - 배설할 창구가 필요하다. 그것은 만만해야 할 것이고 자신의 정의를 내세울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자신에게 씌워진 죄와 악의 굴레만큼 그것을 넘겨 씌울 수 있는 대상이면 더 좋을 것이다. 한 가지 빌미만 있다면. 남들보다 못하고, 남들에 미치지 못하고, 그래서 당연히 응징해야 할. 차라리 도덕적인 잘못이 있다면 그것을 가지고 비난을 가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 자체에 대한 부정은 잘못 이전의 당위에 대한 것이다. 그는 이 만큼 못나고 못하다.

지금도 가끔 - 아니 아주 자주 듣는다.

"저 가난한 것이 제 못나서지."

한국사회에서 복지에 대한 논의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다. 못나서다. 못해서다. 스스로 자격을 갖추지 못했고 노력을 하지 않았으니 그것은 당연하다. 가난은 징벌이다. 더 부유하게 만들어줄 시련. 그것은 19세기 유럽 부르주아들의 도덕론과도 닿아 있다. 가난을 겪게 해야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 수 있다. 즉 가난은 돈을 벌지 못한 상태다.

맞물려 노래를 못하니 깐다. 그럼으로써 노래를 더 잘하게 된다. 최소한 노래 아닌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해준다. 다리를 떨면 복이 달아나니 그 다리를 잘라준다. 부자가 되었다면 당연히 다리를 잘라준 살마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런 논리 속에서 그것은 그들이 최소한 바닥은 아니라고 하는 확인의 수단이기도 한 것이며.

<나는 가수다>라는 프로그램에 대해 처음 우려하던 바였다. 다만 그때는 논리가 정리가 덜 되었었다. <나는 가수다>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이유. <나는 가수다>를 이유로 아이돌이며 다른 가수들을 비난하며 공격하는 이유. 한국사회에서는 잘한다는 것에 도덕적 가치가 부여된다. 아니 정확히는 못하는 것에 대한 도덕적 책임이 부여된다.

억압된 사회의 한 단면이랄까? 무한경쟁 속에서 오로지 경쟁을 통해서만 자기를 확인할 수 있는 군상들일 것이다. 그래서 항상 비교하고 항상 의식하며 누군가를 비난하고 깎아내리고. 못한 것은 죄다. 악이다. 스스로 선이 되고 정의가 되기 위해서. 그 만족을 위해서. 단지 노래는 그 빌미에 불과한 것이다. 비호감이 되고 마는 이유란 그를 위한 한 근거에 불과한 것이다.

결국은 무의식은 현실의 반영이라는 것이다. 특히 익명성을 무기로 보다 솔직해질 수 있는 인터넷이라는 공간과 인간의 욕구에 봉사하는 연예계라는 특수함이 어우러지며 이러한 현상을 만들어낸다고나 할까? 물론 "무슨녀"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을 비난하는 것으로 자신의 정의를 다시 일깨우고 확인할 수 있다. 인민재판 같은 것이다. 그들을 비난하고 돌을 던짐으로써 나는 저들과 동류가 아님을 일깨울 수 있다.

어쩌면 슬픈 현실이랄까? 모든 잔혹극에는 슬픈 이면의 사연이 존재한다. 사람이 잔인해지는 것은 절박하기 때문이며, 절박함은 슬픔이라는 감정을 동반한다. 그조차도 느끼지 못하게. 집단 속에 마모되어 버린 감정으로. 왜 그러는지도 모른 채 오늘도 정의감에 취해서. 우월감에 도취되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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